일본군 장교였지만 친일파는 아니다?

쿠라라네 작성일 09.11.04 08:5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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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만씨가 자기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는 데 이의를 제기하여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가처분신청을 했다는 소식은 우리를 착잡하게 만든다. 경위야 어떻든지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좋게 남기고 싶은 자식의 마음이 반영되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그는 자기 아버지가 애국자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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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지난 10월 26일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친일인명사전에 박 전 대통령을 게재해서는 안 된다"는 가처분신청을 한 사실이 2일 드러났다.  ⓒ 이경태

 

 

누나 박근혜 의원도, '5·16은 구국의 영단'이었으며 '아버지는 국가를 위해 사신 분'이라는 말을 공개석상에서 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자식 된 도리로서 아버지가 반민족 행위자의 대열에 끼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효도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벅지만씨는 자기 아버지가 단지 일본 군대의 군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라고 간주될 수는 없다고 한다. 또한 자기 아버지는 일본 관동군이 아닌 만주국 군대의 소속이었으므로 친일파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아버지가 조선민족을 괴롭힌 증거가 전혀 없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친일파의 개념과 경계는 모호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 민족은 세계사의 흐름이 전제왕권의 시대에서 근대 공화정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무려 36년(을사늑약부터 계산하면 41년) 동안이나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 긴 시간 동안 가치관이나 역사관 따위의 혼동이 적잖이 빚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족이나 국가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예컨대 이번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서정주 시인 같은 이는 대일본제국이 영원할 줄 알았노라고 솔직히 고백하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과연 어떻게 살았을 것인지를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대한민국은 반민족행위자에게 세계에서 가장 관대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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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군 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 그는 만주 육군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해방 전까지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
ⓒ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임시정부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친일파 청산의 지침을 세워 놓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이른바 반민족 행위자 '7가살(七可殺)'을 선언, '죽여도 되는 일곱 가지 유형'의 처단 대상을 정해 놓았다.

1. 일본인 2. 매국적(賣國賊) 3. 고등경찰, 형사, 밀고자 4. 친일부호 5. 적의 관리 6. 불량배 7. 배반자

또한 1941년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건국강령에는, '적에게 부화(附和)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한다'고 부칙으로 규정해 놓았다.

일 본군 장교였던 박정희는 임시정부가 천명한 지침에 의하면, 제5항 '적의 관리'에 해당하는 자로서 '죽여도 되는 자'의 경우가 된다. 아니면 최소한도 부칙에 있는 '적에게 부화한 자'로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해야 하는 경우이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점령국의 군인으로서 피점령국의 국가원수가 된 인류사의 아주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가처분신청 내용에 따르면, 박지만씨는 "(박 전 대통령이 근무한)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과는 별도로 창립된 만주국의 군대였으며, 특히 그들은 조선의 독립군 토벌과 같은 활동에 참여한 사실조차 없으므로 (민족문제연구소의 판단은) 그 기초가 되는 사실관계마저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 처럼 그는 자기 아버지가 관동군이 아닌 만주국 군인이었으므로 친일파가 아니라고 한다. 혹시 그는 만주국을 일본이 아닌 중국의 우방국쯤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명백한 역사적 사실은 만주국은 1931년 일본이 자작극으로 연출한 만주사변 이후 대륙 침략을 위해 급조한 괴뢰정부였고 일본 관동군의 지휘체제에 있었으며 나아가 1930년대 일본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뒷받침이 됐다는 점이다.

만 주국은 일본의 군대와 관료들을 위한 훈련장, 통제경제, 건축, 도시계획 등 일본 근대화의 실험장이었다. 게다가 만주군은 침략군을 상대로 혁혁하게 저항한 중국 팔로군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군대이기도 했다. 박지만씨의 아버지는 바로 이런 군대에 몸담고 있었던 장교였다.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5년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본제국에 협력한 중국인들도 많았다.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대일협력의 주모자들을 사형 등으로 처벌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국의 고위관리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모두 강제소용수에 수용되었다.



혈서의 '진충보국'은 만주국을 위해 충성한다는 것이었나

 

박정희는 조선인으로서 극히 이례적으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황국 군인이었다. 그가 박지만씨의 주장처럼 직접적으로 조선인을 괴롭혔거나 독립군을 소탕한 역할을 맡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역사 기록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가 조선인에게 악명 높았던 간도특설부대 소속으로 '조센징' 토벌에 의욕적이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이와 달리 그가 비록 일본 군인이었지만 민족정신이 투철했다는 주장도 있다.

" 박 전 대통령 부대와 대결했던 팔로군 이운창 부대에는 조선인 청년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연변에는 당시 이 부대원이었던 조선인 독립운동가의 회고록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으로서 조선인 청년들 섬멸전을 벌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토벌한 일이 없다니요?" (민노당 이정희 의원, '박정희 전 대통령 명예훼손 무죄판결에 부쳐')

" 몸은 왜놈의 번견(番犬) 노릇을 하고 있지만 힘을 길러 독립해야 한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조국을 잃은 조선인 생도로서의 생활은 그렇게 순탄하지가 않아 우리끼리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필 자는 위 두 주장이 어느 면에서 모두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박정희가 친일파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데에는 하등 관계될 바가 없기 때문이다. 친일파를 가리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적확한 것은 '자발성'이 아닐까 한다.

박 정희는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자발적으로 만주군관학교를 지원했다. 게다가 그는 '진충보국멸사봉공(盡忠輔國滅私奉公)'이라는 혈서까지 써서 제국주의자들을 감동시켰다. 이 혈서에서 말하는 나라는 만주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것을 박지만씨가 모를 리 없다. 그러니 그가 친일파가 아니라는 주장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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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원내)
ⓒ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물에 빠진 개는 때려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이번 친일인명사전 발간에는 1991년 연구소가 발족한 때부터 18년 간에 걸쳐 3천여 종의 문헌 자료를 수집ㆍ분석하고 250만 명의 인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왔으며, 2001년 편찬위원회가 구성된 후 본격적인 연구 조사와 검수ㆍ심의 작업에만도 8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방대한 작업 끝에 가려낸 친일파 수가 고작 4370명밖에 안 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주체적 우수성을 알게 해주는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업이 얼마나 신중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 리가 알고 있듯이 2차세계대전 직후부터 1950년대 초까지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대독협력자 숙청을 진행했는데 전국적으로 약 35만 명(당시 프랑스인 116명 중 1명 꼴)에 대해 서류 검토가 있었고 이 가운데 12만 명이 재판을 받아 9만 8000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1500명은 정식 재판 후 사형, 8000~9000명은 재판 없이 처형됐으며 2만 명의 여성 부역자들은 삭발 등의 모욕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치 점령이 있은 후 무려 50년이 경과한 1994년 프랑스인 폴 투비에는 뒤늦게 나치협력 혐의가 포착되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소탕한 민병대장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이미 민족반역죄의 공소시효는 지난 뒤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폴 투비에를 체포해 공소시효가 없는 '인간 또는 인류에 반하는 죄'로 기소해 무기징역을 받도록 했다.

2년 후인 1996년에는 파리경찰국장과 예산부장관을 지낸 실력자 모리스 파퐁이 전격 체포되었다. 그는 전쟁 중 괴뢰정부인 비시정권에 부역했으며 유태인을 강제수용소에 보내는 서류에 서명한 것이 폭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87세의 나이임에도 10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가 97세에 죽었을 때 프랑스의 어느 신문은 '질기게도 치졸한 기회주의자'라고 경멸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덴마크는 1만 4000명, 노르웨이는 2만 명, 네덜란드는 4만 명, 벨기에는 5만 명을 과거 청산을 위해 사법처리했다. 이 에 비하면 대한민국은 얼마나 관용적인가? 처벌하자는 것도 아니며 재산을 몰수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공직에서 물러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전에 등재하여 기록으로 남기자는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난리들인가? 그들은 민족문제연구소를 '빨갱이'로 매도하면서 연구소의 해체를 주장하기도 하니 이만 하면 적반하장도 유만부동이 아닐 수가 없다.

다 소 잔혹하긴 하지만 '물에 빠진 개를 건지면 때려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그래야 건져준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 같으면 이미 응징되었어야 할 사람들이, 응징은커녕 오히려 영달하니까 이제는 건져준 사람을 되레 물려는 형국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다. 

오마이블로그 김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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