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명성황후에 대해서...

눈물안새 작성일 09.12.24 21:5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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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개봉된 '불꽃처럼 나비처럼' 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시간이 남아 dvd를 보던중에 영화가 재미있건 재미없건 간에 나라에 국모

 

이셨던 명성왕후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됬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사실과는.. 사실 같은 부분이 많

 

을 겁니다. 그만큼 보편적이면서 단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이죠.

 

저는 역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전공을 가졌을 뿐더러 현재의 정치와 근대 역사에 많은 분개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입니다만,

 

고조선부터 이어오는 깊은 과거 역사만큼은 사랑합니다. 경복궁이나 해인사 등등 이런 건축, 문학이나 시대정신 등은 남들이 가지

 

지 못한 나라의 긍지를 갖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각설하고 인터넷에 감명깊은 길을 읽게 되서 공유하고자 퍼왔습니다. 원작자님에게 허락은 나름(응?) 받았다고는 생각하지만, 기

 

분 나쁘실수 있으니 불시에 지워질수 있음을 깊은 사과말씀드립니다.

 

다음은 본문입니다.(내용이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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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전부터 인터넷을 중심으로 명성황후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낭설이 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것 몇가지를 들어 바로잡겠습니다.

 

먼저, 전체적으로 일본은 지금 이순간에도 공식 역사교육은 물론, 일본인들 대다수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우습게 여기고 있으며, 명성황후 시해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잡기 전에는,고종황제나 명성황후에 대한 비난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의 역사왜곡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임을 분명히 합니다.

 

아래의 내용은 명성황후를 폄훼할때 인용되는 사학계의 특정입장이나, 낭설, 야사가 아닌, 정설로 정리되고 교과서 등을 편찬할때 공인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1. 명성황후는 민비가 아닙니다.

명성황후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민비로 격하시킵니다. 또한, 고종황제를 고종으로 격하시킵니다.

황제와 황후가 없는 제국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우리역사에서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분명히 존재했던 대한제국을 부정하고 격하시키는 반민족 행위입니다. 또한 대한민국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 국가이므로, 국가를 부정하는 이적행위 입니다.

민비라는 호칭은 일제가 조선왕조를 이씨왕가로 격하하면서 명성황후를 민비로 격하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명성황후를 민비로 격하시키는 것은 이런 일제의 입장을 거드는 친일행위 입니다.

 

은연중에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부르는 것, 고종황제를 고종으로 부르는 것을 인터넷에서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2. 임오군란에 대해 억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핵심원인은 명성황후가 백성을 수탈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명성황후가 별기군이라는 근대화된 군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근대화된 군대는 당시 우리민족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별기군이 성공했다면, 일제강점도 없었고, 명성황후가 우리 민족에게 남긴 큰 업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재정과 여러 상황은 근대화된 군대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무리를 무릎쓰고 자위권을 최소한이라도 행사하기 위해 만든것이 별기군입니다.

무리를 해서 만든 절차와 과정에서 이전 군인들이 피해를 입었고, 이것에 반발한 것이 임오군란입니다.

또한, 추후에 농민들이 합세한 것 역시, 명성황후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일본세력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내용추가: 일본세력과 그들의 쌀 수탈을 돕다시피한 민씨척신들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명성황후와 민씨척신들의 관계는 생각하는 것처럼 가깝지 않았고, 명성황후가 민씨 척신들의 수장이라는 잘못된 오해도 있었습니다.)

 

3. 명성황후의 외교는 당시 우리나라에게 유일한 현실적 희망

김옥균이라는 인물에 대해 저는 상당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더 늦추면 근대화는 물건너가고, 나라가 송두리째 망하게 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는 것은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외세의 압박이 도를 넘고 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일본군을 끌어들인 갑신정변이 모든 재앙의 결정적인 발화점이라는데는 역사학계에서 이의가 없습니다.

 

이후,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해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일본에 대항하여 자위권을 행사할 힘이없는 상황에서, 대원군처럼 무모한 정책을 펴거나

손놓고 당했다면,

일제강점은 훨씬 빨리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일본의 침탈을 막을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외교사에서 등거리외교라는 것은 고난이도의 정책입니다.

명성황후는 등거리 외교라는 목표와 일본을 막을 현실적 방법으로 러시아와 청.. 그리고, 구미 각국에서 우리나라에 와있던 인사들을 활용한 것입니다.

 

이것 말고 더 현명한 방법은... 오늘날 21세기의 사람들이 연구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청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다가 시해를 당한 것입니다.

 

물론, 청일전쟁으로 국토는 폐허가 되고, 백성들은 죽음으로 내몰린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차악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차악말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현재의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도 당시에는 이런방식의 대안밖에 없었다고... 가정조차 할 방법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4. 결론

명성황후의 노선과 정책은 뛰어났었고 유일한 현실적 선택이었다고 오늘날에도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 집행과정과 결과가 커다란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 척신인 민씨 일가의 문제도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명성황후의 문제는 그녀 스스로가 아니라, 그녀를 보필하고 정책을 집행할 참모진과 관료의 부재로, 지도자가 뜻한 올바르고 타당한 노선과 목적을 척신과 관료들이 망쳐버린것으로 정리됩니다

 

이 책임에 대해 입안자이고 전결권자인 명성황후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시 어떠한 정치지도자도 그녀만큼의 역량과 비젼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명성황후를 비난한다면 그 백배 이상으로 대원군을 비난하고, 열배 이상으로 김옥균 등을 비난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대한제국 역사는 비난만 받아야할 인물들이 이끌어간 비난받을 역사로...

사실과 전혀 다르게 왜곡됩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명성황후에 대해 여러 오해를 유포시키는 사람들이 스스로가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뉴라이트의 친일적 특성인 교묘하고 음험하게 우리 역사를 야금야금 훼손시키는 행위를 돕고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이런 우려를 드리면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5. 내용추가.

위의 본문은 개괄적인 큰 줄기와 몇가지 주요쟁점만을 기록한 글입니다. 제가 댓글을 통해 여러가지 의문점과 지적에 대해 정리를 해 드렸지만, 댓글을 다 읽으시려면 여러가지로 불편하실 거라 생각되어 몇가지 내용을 첨가하여 드립니다.

 

1) 명성황후는 일제강점을 현실적으로 막고있던 유일한 인물 이었습니다.

명성황후 사후 일제시대까지 일본은 명성황후와 관련한 긍정적인 기록은 최우선적으로 최대한 찾아내어 분서 합니다. 또한, 온갖 사료를 조작하고 낭설을 유포시킵니다.

조선왕조가 끝난 일제 강점기에 조선왕조실록이라며 고종실록을 편찬합니다. 많은분들이 조선왕조실록에 민비라고 되어 있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일제가 편찬한 고종실록입니다. 또한 이병도씨의 조선사 편수회도 명성황후 사료를 왜곡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요.

조선사 편수회가 불태워버린 8만여권의 우리 역사의 유실에서 우리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을 유일하게 위협하거나 시각에 따라서는 귀찮게 하는 존재는 명성황후 였습니다.

많은 선각자나 이론가들이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일본을 막을 수 있었고 막고 있던 인물은 명성황후 뿐 이었습니다.

또한, 매천야록과 같은 남존여비 사상에 철저하게 입각한 야사에 나오는 진령군이나 기타 기록들은 실제 사실이 있었으나, 그것을 과장 왜곡했기 때문에 일제가 남겨둔 것입니다.

 

대원군이나 고종황제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는걸 막아내는데 별 걸림돌조차 되지 않았습니다.즉, 현실적으로 일본침탈을 막아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명성황후 였습니다.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인물은 그 추존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정인보 선생이 납북된 후, 친일세력이 국사편찬위원회를 독점하고, 안중근의사에서부터 여러 열사와 의사의 기념사업회를 독점하던 군사독재가 끝나고 명성황후로 복권되기 시작한지 이제 10여년이 지났습니다. 

대부분의 사료가 일제에 의해 폐기되고 왜곡된 상태에서, 그녀에 대해 극단적으로 매도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비판할 점은 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매도될 사람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 본문의 입장입니다.

 

 2) 민씨척신은 대원군의 처남이고, 명성황후와는 8촌이상의 먼친족입니다.물론,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해를 잘 알기에 이들을 최고권력자로까지 중용하지는 않았지만, 본의아니게 민씨척신들이 권력자로 가는 첫 발판을 제공한 것을 대원군입니다

향후 명성황후에게 아부한 이들이 펼친 여러가지 악행 대부분이 명성황후가 관여하지 않은 일들입니다. 물론, 당시 실권자로 이들을 벌하지 못한 책임은 명성황후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른 악행을 명성황후가 지시하거나 계획했다고 착각하는 것 역시 금물입니다

 

3) 왜 을미의병이 대부분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나.

명성황후의 암살은 단순한 국모암살이 아니었습니다. 유일한 걸림돌이었던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일제는 더이상 거리낌이 없이 국권찬탈을 순서대로 진행합니다. 즉, 일제강점의 마지막 보루가 없어진 것이고, 사실상 일제강점이 시작된 시점입니다

 

물론, 국모 암살에 대한 분개도 있었으나, 일제 강점의 시작을 깨닳은 선각자들이 일어난 것이 을미의병입니다.또한, 김구, 안중근, 신채호 등을 위시로 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명성황후와 개화파, 넓게봐서는 대원군까지 제대로된 근대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같은 뜻이었음에도, 그토록 대립하고 갈등했던 현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직간접적으로 을미의병에서 그 출발점을 두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의견과 댓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명성황후는 어떤 몇몇 사실들 만으로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비판은 할 수 있으나 비난은 용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참고> 이병도 관련 내용은 사학계의 특정입장이 아니라, 이미 공식적으로 친일 인명부사전 및 위키백과사전에 등록된 것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밝힙니다.

 

 

출처.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nid=1938229&code=57865(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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