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팔 가득한 자해의 흔적...."난 왜 태어났을까요"

윤태흠 작성일 10.04.27 14: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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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 가득한 자해의 흔적…"난 왜 태어났을까요"

[한국의 워킹푸어] 가정해체-학업중단-대물림되는 빈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문제는 주로 '인권'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강제로 머리를 자르고, 강제로 시험을 보게 하고,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어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때리는 학교의 행태가 중심이었다.

그런 학교를 벗어나서도 또 다른 전쟁을 치르며 하루하루를 사는 아이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싸워야했던 청소년들이다. 가난은 단지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불편함'의 수준을 넘어 때로 그 청소년의 가정을 통째로 부숴버리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세상의 잔인함과 마주치게 하기도 한다.

지난해 5월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아동·청소년 가운데 최저 생계비 이하의 절대 빈곤층은 7.8%였고 상대빈곤층은 11.5%였다. 전체 청소년의 87%가 부모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데 반해, 빈곤 아동·청소년 가운데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비율은 절반도 안 됐다.

당연히 그들 중 많은 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다. 학교를 다니더라도, 그들은 용돈이 아닌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한다. 우리 주변 곳곳에 있지만, 세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빈곤 청소년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흉터 가득한 두 팔…"이 세상의 모든 신에게 따져보고 싶었어요"

스물한 살 지은(가명, 21)이의 양 팔에는 가느다란 흉터가 가득했다. 사는 것이 힘에 겨울 때마다 스스로 만든 상처였다. 지은이는 양 팔 가득 빼곡하게 들어찬 그 흉터들을 보여주며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또 언제 나를 버릴까. 내가 또 버려지면 어떻게 하나. 불안하고 초조할 때면 자살 시도를 했어요."

육체의 고통을 느끼며 지은이는 마음의 아픔을 잊었다고 털어놨다. 살기 위해 지은이는 스스로의 몸에 손을 댔던 셈이다. 그때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도록 만든 세상을 정말 많이 원망"하면서. 지은이의 그런 몸부림은 세상에 대한 원망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아빠에 대한 앙갚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에게 하나하나 따져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왜 이런 부모 밑에 태어나 이런 핍박을 받고 자라나게 했는지. 나는 왜 저런 부모 밑에 태어나지 못한 건지. 엄마한테도 '이렇게 괴롭힐 거면 나를 왜 낳았냐'고 독한 말도 많이 했어요. 사실 그 얘기는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 학대했던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해서 엄마한테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럴 때면 엄마는 늘 '미안하다'고만 했지만."

그러면서 지은은 웃었다. 지은이 또래의 아이들이 모두 가진 맑은 웃음을 비로소 되찾은 것은 부모로부터 떨어진 후였다. 아니 정확히는 열네 살에 집을 나와 열여섯에 공동체가정, 그룹 홈(group home)을 만나면서 웃을 줄 알게 되었다. 가난으로 인한 불편함,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받는 스트레스는 여전했지만 적어도 부모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무교육인 중학교마저 끝까지 다니지 못했던 지은은 공동체가정을 만나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지금은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친구들보다는 다소 늦었지만 어느덧 3학년 최고참이다. 50~60대의 나이 많은 '반 친구'들에게는 귀여운 재롱둥이 막내기도 하다. 지은이 곧잘 "명자 씨, 옥순 씨"하고 부른다는 '늙은' 반 친구들은 부탁하지도 않은 '대출(대리출석)'까지 알아서 챙겨주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공동체가정을 통해 배우고 싶던 것들도 많이 배웠고, 요즘은 대안학교 하자센터 내의 사회적 기업이 지원하는 '영 셰프 요리학교'도 다니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할 때면 눈이 반짝이고, 좋아했던 사람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촉촉해지는 것은 여느 20대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사람에게 받았던, 미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상처는 여전히 지은을 괴롭히고 있다.

▲ 의무교육인 중학교마저 끝까지 다니지 못했던 지은은 공동체가정을 만나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지금은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연관 없습니다) ⓒ연합뉴스
"아빠와 양오빠의 폭력…그곳에선 살 수가 없었다"

지은이 중학교 2학년 때 다니던 학교를 뛰쳐나온 것은 아빠 때문이었다. 물론 속해 있던 필드하키팀이 갑자기 해체되면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유도 컸다. 하지만 결정적 계기는 아빠였단다.

"그날 학교를 안 갔는데 친구들이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난 거예요. '너희 아빠 때문에 선생님이 오열하고 난리가 났다'면서. 아빠가 학교에 찾아가서 담임 선생님하고 교장 선생님 멱살을 잡고 난리를 쳤대요. 필드하키부 없어지고 나서였어요. 선생님들한테 '너희가 뭔 상관이냐'고 막 소리쳤다대요. 다음날 학교 가니까 소문이 쫙 퍼졌더라고요. '쟤네 아빠 조폭이라더라. 새 아빠라더라.' 하루 사이에 걷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지은은 그날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교를 그만뒀다. 그리고 집을 뛰쳐나왔다. 자궁암에 걸린 엄마의 치료비와 약값 때문에 어차피 돈도 벌어야했다. 이미 그 전부터 학교가 끝난 4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던 참이었다. 본격적으로 지은은 '알바 전선'에 뛰어들었다. 핸드폰 고리를 만드는 공장 등 숙식이 제공되는 곳이라면 거의 전국을 가리지 않고 다녔다. 학교는 그만뒀지만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는 지은이 어릴 때부터 수시로 가정 폭력을 행사했다. 엄마 뿐 아니라 어린 지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는 생활비도 벌어다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한의사였지만,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아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지은은 "아빠는 돈을 벌어도 늘 자기 혼자 썼지 집에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심지어 자궁암 진단을 받은 엄마의 수술비도 아빠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아니, 엄마에게 돈을 오히려 달라고 하고 "돈 없다"고 하면 또 때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빠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이긴 엄마나 지은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은은 "엄마에게도 애정이 별로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외갓집에서 자라서 더 그런지도 몰라요. 어릴 때 엄마 젖을 빨아 본 적이 없어요. 만져본 적도 없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계셨지만 눈치도 보이고 늘 외롭게 자랐죠. 유일한 친구가 외갓집에서 키운 삽살개였어요."

"기숙사에 살기 위해 들어간 필드하키부"

복잡한 집안 사정 탓에 지은에게는 큰 아버지의 아들이 호적상 오빠로 올라 있다. 지은은 "엄마는 걔를 키우느라고 사실상 나를 버렸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딸을 낳고 돌아온 며느리를 마당에서 걷어찼대요. 그래서 엄마가 더 걔한테 집착했는지도 모르죠. 엄마가 얼마나 나한테 관심이 없었냐면 내가 자해하는 것도 몰랐어요, 엄마는."

지은의 학교 준비물은 돈이 없다며 안 사줬던 엄마는 '오빠'의 생일날 친구들을 불러 피자치킨을 한 상 대접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오빠'는 지은에게 '아빠'와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걔는 너무 싫어요. 어떻게 보면 나랑 엄마를 매일 때리고 학대했던 아빠보다 더요. 아빠 엄마가 집에 없으면 걔가 나를 때렸거든요. 걔가 컴퓨터 중독인데 게임하다가 자기 캐릭터가 죽거나 그러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나한테 와서 나를 발로 차고 때려요. 화장실 변기에 내 머리를 집어넣기도 했고."

지은의 자리는 그 집안에 없었다. 지은은 "네 식구 가운데 아빠도 나를 때리고, 엄마는 아빠한테 맞은 화풀이를 나한테 하고, 오빠란 사람도 나를 때렸다. 이 집안에서 나는 살 수가 없었다"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즈음에 지은이 필드하키라는 여자에게는 힘겨운 운동부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운동을 하면 합숙을 하면서 기숙사에서 살거든요. 집에 갈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했어요. 아, 또 하나 있다. 필드하키를 하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고기를 먹을 수 있었거든요. 고기가 먹고 싶어서 들어간 것도 있어요. 이런 얘기는 창피해서 처음 하는 거예요."

물론 필드하키부 역시 쉬운 곳은 아니었다. '군기'라는 이름으로 선배들도 코치도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곳이 지은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랬던 필드하키부는 지은이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해체됐다. 지원을 받기 힘든 비인기종목인 탓이 컸다.

지은에게는 부상으로 십자인대가 파열된 다리만 남았다. 다친 무릎은 "돈이 없어" 고치지 못했다. "그때는 엄마 병원비 대기도 힘들었는데 내 다리를 어떻게 고치냐"며 지은은 여전히 불편한 무릎을 만졌다. 지금 있는 공동체가정에 들어온 뒤에야 여러 사람의 지원을 받아 4년 만에 무릎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세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병원에서는 이미 너무 많이 망가져 있어 원래의 다리로 돌아오기는 힘들다고 했다. 한때 하키 채를 들고 몸싸움을 하던 지은은 지금 전혀 뛰지 못한다.

87세 외할머니와 사는 은서네 수입은 한 달에 50만 원

하늘이 '평범한' 가정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은서(가명, 17)도 마찬가지다. 은서는 태어난 후부터 지금까지 외할머니와 살았다. 엄마 아빠가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은서가 태어나자마자, 엄마와는 네 살 때 헤어졌다. 그 후로 은서는 엄마를 보지 못했다. 은서가 중학생일 때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것이 전부였다. 은서는 "돌아보면 내 인생이 너무 드라마 여주인공 같다"고 했다.

길지 않은 세상에서의 삶이 "현실과 드라마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너무 막막하고 잔인했다"는 은서는 부모의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은서에게 말로 못할 소중한 존재인 할머니는 올해로 여든 일곱. 은서가 태어났을 때도 할머니는 70세 노인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어디도 없었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 두 사람은 매달 나오는 50만 원으로 먹고 살아야했다. 은서의 학비야 국가 보조가 됐다지만, 50만 원은 넉넉한 생활비가 아니다.

지난 2008년 이모들과 가까이 살기 위해 부산에서 남양주로 이사를 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은서와 할머니의 집은 월세 10만 원 짜리 방 한 칸이다. 겨울에는 전기세를 포함해 난방비만 30만 원 가까이 든다. 은서는 "그 돈으로 먹고 사는 것 외에 다른 건 아무 것도 못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게 있거나 먹고 싶은 게 있을 때는?

"그땐 내가 벌어야죠."

"고등학교 그만둔 이유? 어차피 대학을 못 가니까요"

가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간다는 이모들도 자기 삶이 녹록치 않긴 마찬가지다. 은서가 태어날 때 즈음 치암으로 수술을 받아야했던 할머니는 고혈압, 관절염 등 지금도 수많은 약을 달고 사신다. 고등학교 1학년 말, 은서가 자퇴하기까지 가장 걸림돌이 됐던 것도 생활비였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면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에서도 잘릴까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다행히 그건 아니라 하더라고요. (웃음) 물론 내가 스무살이 되면 결국 끊기겠지만요. 내가 스무살이 됐다고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닌데도 나이가 찼으니 그냥 자르는 거예요. 어찌 보면 사회가 손 쉽게 외면해 버리는 거죠. 만약에 내가 스무살이 되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나한테는 한 달에 20만 원밖에 안 나오겠죠. 아무리 혼자여도, 사실 그 돈으로 어떻게 살아요?"

고등학교를 그만둔 이유를 묻자 은서는 "어차피 대학에 못 간다는 걸 알아서"라고 했다.

"돈이 없으니까요.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서 대학을 다니고 싶지는 않았어요. 빚 지는 것도 두렵고. 대학도 못 갈 텐데, 학교에는 내가 왜 다니는 걸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단지 어쩔 수 없어서 다니는 것 같았거든요.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웠어요. 스무 살이 되면 결국 혼자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

은서는 그런 두려움 대신 "내가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결정"했다. "그만두기 전에는 다 무너져 내려 결국 아무 것도 못하게 되진 않을까 싶어 너무 불안했다"지만 지금은 이런 저런 활동을 하며 탐색기를 보내고 있다. 물론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말이다.

빈곤과 학업중단은 '밀접한' 상관관계…실업게 학업중단율 2배

지은이나 은서와 같은 청소년이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지난 2008년 한해 동안 학업을 중단한 고등학생의 숫자는 3만3000명 정도다. 전체 학생 가운데 약 0.02%가 학교의 울타리를 밖으로 나온 것이다.

구체적인 사유는 다양하다. 질병이나 가정사정, 학교 부적응 등으로 스스로 그만둔 경우도 있고, 강제로 학교에서 쫓겨난 경우도 있다.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와 같은 특목고에서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아 일부러 학교를 그만둔 경우도 있고 조기 유학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청소년이 끝까지 학업을 이어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빈곤임은 분명하다. 지난 2009년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내놓은 '학업중단의 조건'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전체 고교생의 학업중단율보다 실업계 학생의 학업중단율이 2배나 높음을 알 수 있다. 실업계생과 특목고생을 비교하면 그 격차는 2008년 4.3배, 2007년에는 3배나 된다.

2008년만 놓고 봤을 때, 학생 1000명을 기준으로 특목고는 9명, 전체 고교에서는 15명이 학교를 그만뒀지만 실업계는 30명이 자의로 타의로 학교를 그만뒀다. 특히 실업계의 학업중단율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06년에는 실업계 학생 1000명 가운데 25명이 중간에 학교를 떠났지만, 그 비중은 30명(2007년), 34명(2008년)으로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다.

▲ ⓒ프레시안
집단에 속한 학생들의 부모 소득 수준과 이 통계를 겹쳐 놓고 보면 이런 확연한 차이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직업이 상위직인 학생의 비중이 특목고는 33.6%인데 반해, 실업계고는 3.7%에 그쳐 특목고가 9배나 높다. 반면 아버지 직업이 하위직인 비중은 특목고가 12%, 실업계고는 32.3%였고, 무직인 아버지를 둔 학생의 비중은 특목고는 0.7%, 실업계고는 7.8%였다. 실업계 학생일수록,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실업계 학생들이 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할 확률 또한 월등히 높은 셈이다.

저소득층 자녀 급식비 지원액과 고등학교 자퇴학생수 사이의 회귀 분석과 국민기초생활수급권수와 실업계고 학생수 간의 회귀 분석을 종합해 봐도 마찬가지 결론이 나온다. 이들 사이의 밀접도를 보여주는 다중상관계수는 각각 2008년 기준 0.694와 0.71이었다. 권영길 의원은 "이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의미로 저소득층 학생일수록 해가 지나면서 자퇴할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것이 통계로 확인된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해도 꿈 크게 가지라'는데 그럴 수 없다"

똑같이 공교육에서 뛰쳐나왔다 하더라도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라 다음 길은 달라진다. 은서는 자신과 같이 학교를 그만뒀지만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친구들을 종종 만난다. 교육공동체 등 탈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는 각종 활동을 하면서다.

"자퇴한 친구들의 대부분은 대안학교를 가요. 사실 내가 처음으로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안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담임 선생님이 대안학교를 알아보라고 했었어요. 하지만 갈 생각은 못 했죠. 이미 모집 기간이 끝나기도 했고, 돈도 없고. 게다가 대안학교는 더 이상 '대안'학교가 아니다 싶거든요. 인가 받은 학교는 일제고사도 보고 시험도 봐요."

미인가 대안학교의 학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정부의 지원 대신 학부모의 돈으로 학교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2009년 현재 교육부가 파악하고 있는 미인가 대안학교는 모두 94곳. 이들 학교의 연간 학비는 수업료와 기숙사비 등을 포함해 최고 2200만 원이다. 또 대부분의 대안학교는 입학할 때 예치금 성격의 '예탁금'을 내는데 이 돈 역시 150만~700만 원(2007년 교육부 <대안교육백서>)에 달한다.

▲ "가난한 학생과 부자 학생을 내놓고 차별하는 학교가 징그럽게 싫었다"지만, 빈곤 청소년이 대안학교에 갈 엄두를 못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빈곤과 학업중단의 상관관계가 높은 한국 사회에서 빈곤 청소년의 학업중단은 '빈곤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의 출발점이 된다. ⓒ연합뉴스

"가난한 학생과 부자 학생을 내놓고 차별하는 학교가 징그럽게 싫었다"지만, 빈곤 청소년이 대안학교에 갈 엄두를 못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빈곤과 학업중단의 상관관계가 높은 한국 사회에서 빈곤 청소년의 학업중단은 '빈곤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의 출발점이 된다.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빈곤 청소년이 고용과 소득이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의 배경내 상임활동가는 "집안 형편이 괜찮은 청소년은 대안학교가 아니더라도 부모의 경제력을 이용해 자영업 등 창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있지만, 가족 해체나 저소득층에 속한 청소년이 학교를 그만두면 당장 생존을 위해 날품팔이 형태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들의 꾸는 꿈 역시 빈곤이라는 현실의 벽에 매번 부딪힌다. 꿈 얘기를 묻자 지은은 "사람들은 꿈이라고 하면 의사나 선생님 같은 직업을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꿈이란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목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꿈은 "항상 목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꿈이야 그렇다지만, 어린 시절 지은이도 되고 싶었던 직업은 수도 없이 바뀌었다. 요리사 뿐 아니라 특수분장사, 가수, 헤어디자이너, 스포츠마사지사,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까지…. 누구라도 어린 시절 꿈이 한결 같았겠냐 마는, 지은의 꿈이 바뀐 이유는 남달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내 꿈이 매번 바뀐 것은 가정형편 때문이었어요. 왜냐면 다 안 되니까요. '엄마, 나 이거 배우고 싶어'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았거든요. '우리 형편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라는. 사람들이 소년소녀 가장이라도 꿈은 크게 가지라고, 꿈은 크게 가져도 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어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빈곤 청소년은 급격한 무력감에 빠진다. '교육공동체 나다'의 변중용 선생은 "빈곤 청소년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무기력증"이라고 말했다. 아직 부족하긴 하나, 이들을 보듬어 안는 유일한 곳인 "청소년보호기관의 대부분은 이런 빈곤 청소년이 사고 치지 않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데만 집중할 뿐이어서 결국 빈곤 청소년은 무기력한 빈곤 어른으로 재생산되고 만다"고 변 선생은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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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때는 하루하루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 너무나도 지겹고 힘들었는데...

 

나이가 좀 든 지금도 물론 평범한 일상에 지루해 하지만 바뀐게 있다면 그러한 평범한 일상조차

 

감사하며 살고 있죠....

 

여러분도 비록 평범한 일상이지만 항상 감사하는 마음갖고 지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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