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에 대한 성찰 2편

최강메탈리카 작성일 10.07.11 16:04:24
댓글 13조회 643추천 3

...그와 반대로 나는 사형에 대해 내놓고 이야기할 작정이다. 이것은 내게 악취미가 있서도 아니요.

 

천성적으로 병적인 면이 있어서도 아니다. 작가로서 나는 언제나 모종의 안이한 자기만족을 혐오해왔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나는 우리가 처한 조건이 비록 거부감을 자아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저 조용히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침묵이나 언어상의 잔꾀가, 마땅히 고쳐져야 할 부당한 행위나

 

해소될 수도 있는 불행을 계속 지탱시키는 데에 쓰일 경우, 언어라는 외투 속에 은폐되어 있는 추악성을 분명하게

 

말하여 드러내 보이는 길 밖에는 다른 해결 방안이 없는 것이다. 프랑스는 불명예스럽게도 철의 장막 이쪽 편에 있는 나라들

 

중 스페인, 영국과 더불어 탄압의 도구로서 사형 제도를 지속시키고 있는 마지막 국가들 중 하나이다.

 

이 야만적인 제도가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여론의 무심 혹은 무지 때문이다.

 

여론이라는 것은 주입받은 판에 박은 말로써 반응하는 것이 고작이다.

 

상상력이 잠을 자게 되면 언어는 의미를 상실한다. 귀먹은 국민이 한 인간의 처형을 무심히 확인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처형에 사용되는 기계를 보여주고 기계의 나무판과 쇳조각을 만져보게 하고 머리통이 잘려서 떨어지는 소리를

 

듣게 해보라. 그러면 문득 대중의 상상력은 깨어나서 그런 안이한 말과 동시에 그 같은 처형제도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중략)...우리나라에서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사람이 비단 범죄자들뿐만이 아니며, 게다가 방법도 전혀 다르지 않다.

 

사실이 어떠한지를 검토해보기 전에는 그 정당성 여부를 단정 할 수 없는 형벌의 문제를 우리는 조심스러운 말로써

 

은근슬쩍 얼버무리고 있다.

 

사형제도는 꼭 필요하다고 먼저 말한 다음에 그것에 대해 왈가 왈부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형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것인지를 말하고 나서 그러한 제도가 꼭 필요한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사형제도가 무용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해롭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 문제 자체를 언급하기에 앞서 나의

 

이런 확신을 여기서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다. 내가 이 문제에 관하여 고작 몇 주일 동안 조사와 연구를 해보고 나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옳지 못하다. 한편 나의 이러한 확신을 그저 과장된 감상벽 탓으로 돌린다면

 

그 역시 옳지 못하다. 오히려 나는 박애주의자들이 안이하게 빠져 드는 저 나약한 동정심과는 누구보다도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

 

동정심에 휩쓸리다 보면 가치와 책임이 혼동되고 모든 범죄가 비슷비슷한 것으로

 

평준화되어 결국은 무고한 사람이권익을 잃게 된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저명 인사들과는 반대로 나는 인간이 천성적인 사회적 동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반대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인간은 이제 사회의 테두리 밖에서는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의 법이 불가결 하다. 따라서 온당하고 효율적인 척도에 따라 사회 자체에 의하여

 

책임의 체계가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그 법은 그것이 어떤 주어진 장소와 시간의 사회에 끼치는 선(善)에서 최종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다. 수년 동안 나는 사형제도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과 내 이성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우둔한

 

무질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상상력 때문에 내 판단력이 흐려졌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몇주일 동안 나의 신념은 굳어졌을 뿐 아무것도 내 생각을 바꾸어 놓지 못했다.

 

 

사형제도는 우리 사회를 더럽히고 있으며 사형 지지론자들은 이성으로써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아서 케스틀러의 신념에 나는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나는 케스틀러의 결정적 변론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

 

다만 케스틀러의 논리를 연장하여 그의 논리를, 그리고 사형제도의 즉각적인 폐지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논리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사형 지지론자들이 내세우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바로 일벌백계라는 본보기적 성격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죄인의 목을 자르는 것은 그를 벌하는 것뿐만 아니라, 죄인을 본떠 유사한 범죄를 저지르려는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겁을 주는 것에도 목적이 있다.

 

사회는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방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회는 잘린 목을 쳐들어 보임으로써

 

살인할 소지가 있는 자들이 거기서 그들의 미래를 읽고 멈칫하여 물러서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깊은 감명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사실들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1. 사회는 스스로가 내세우고 있는 본보기적 성격을 믿지 않는다.

 

2. 사형 제도는 수많은 범죄자들에게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것 외에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음이 분명함에 비해, 살인을 결심했다가

 

   사형 제도 때문에 포기했다는 사례는 단 한 건도 입증된 바 없다.

 

3. 사형 제도는 다른 여러 측면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본보기가 된다.

 

사회는 우선 사회자체가 내세우는 주장을 스스로 믿지 않는다. 진정으로 그런 주장을 믿는다면 사회는

 

사형당한 자의 잘린 머리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사회는 선전이나 광고를 국채나 새로 나온 상품선전에만

 

동원할 것이 아니라 사형집행에도 십분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사형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집행되지 않고, 형무소 안마당에서 제한된 몇몇 전문가들을

 

앞에 둔채 행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반면에 왜, 그리고 언제부터 그렇게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비교적 근래에 취해진 조처다. 가장 최근의 공개 집행은 여러 사람을

 

살해하여 그 수법이 유행처럼 번지게 한 베드만의 처형으로 1939년의 일이었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아침에 엄청난 군중이 베르사유로 몰려 들었고, 그중에는 상당수의 사진 기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베드만의 모습이 군중에게 노출된 순간부터 그의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여러장의 사진이 찍혔다.

 

몇 시간 후에 <파리 수아르> 신문은 한 면 전체에 이 흥미진진한 사건에 관한 사진을 실어 보도했다.

 

이렇게 해서 파리 시민들은, 재규어가 우리 구식 디옹 부퉁 자동차와 다르듯이 사형 집행인이 사용하는 정밀하고도

 

가벼운 그 기계는 역사책에서 보던 단두대와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반대로

 

행정 관서와 정부는 이 훌륭한 선전 광고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신문이 독자들의 잔혹한 본능을 자극한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사형을 더 이상 공개적으로 집행하지 않기로 결정이 났다. 이러한 조처 덕분에 그때부터는 이 일에 종사하는

 

정부 당국자들의 작업이 보다 더 용이해졌다.

 

이 사건에 있어서 입법부는 논리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파리 수아르> 신문사 사장에게 추가로 훈장을 수여하여

 

다음번에는 그 보다 더 잘해보라고 격려해주었어야 옳았다.

 

사실 사형이 본보기가 되기를 원한다면 더 많은 사진을 찍어서

 

보여야 할 뿐만 아니라, 대낮인 오후 2시쯤 콩코드 광장의 처형대 위에

 

단두대를 설치하여 온 국민을 초대해야 하며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사형 집행 광경을 TV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든지 아니면 본보기 운운하는 말은 그만두든지 양자택일해야 한다.

 

야밤에 형무소 안마당에서 슬그머니 범하는 살인 행위(사형집행)가

 

어찌 본보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기껏해야, 만약 시민들이 살인을 저지른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가끔씩 경고하는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런 미래라면 살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약속할 수 있다.

 

사형이 진정으로 본보기가 되려면 소름이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것이어야 한다.

 

1791년 국민 대표였으며 공개 처형 지지자였던 '튀오 드라 부브리'는 국민의회에서

 

"민중을 제지하려면 참혹한 광경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라고 선언했는데

 

차라리 그가 더 논리적이었다.

 

 

오늘날에는 처형 광경을 아예 볼 수 없게 되었고, 형의 집행에 대해서는 모두들 간접적으로만 들어서 알게 된다.

 

그리고 간혹 사형집행 소식은 부드러운 표현으로(사회적 정의가 실현되었다는식으로) 분장되어 들려온다.

 

이렇듯

 

형벌의 내용을 점점 더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 궁리만 하고 있는데

 

어떻게 미래의 범죄자가 범행 순간에

 

그 장면(자신이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처형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 수 있겠는가?

 

범인으로 하여금 형벌을 언제나 싶이 머릿속에 담아 기억하게 함으로써 걷잡을수 없는 마음을 바로잡고,

 

 이어서 그 광적인 결심을 돌이키게 하려면 영상과 언어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징벌과 무서운 실상을 잠재적 살인자(결국 모든 일반인)의 모든 감각 속에 깊이 새겨놓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오늘 아침에 아무개가 사회에 진 빋을 갚았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암시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좋은 기회를

 

활용해서 그가 맞이하게 될 일의 상세한 내용을 개개의 국민ㅇ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좀더 효과적인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본보기가 목적이라면

 

"살인을 하면 당신도 처형대 위에서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

 

글이 너무 길어 여기까지로 줄입니다. 다음편도 올려드릴게요.

 

1편 서문은 검색창에 "단두대"로 검색하시면 나옵니다.

 

 

최강메탈리카의 최근 게시물

정치·경제·사회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