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모(조선일보) 집안족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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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 방일영, 방우영, 방상훈과 그들이 운영하는 조선일보는 너무나도 악명이 높아
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조선일보의 100대 죄악이라는 것을 정리해 놓은 사람들조차 있었다.
그 걸작을 한번 살펴보면 조선일보의 죄악은 크게 10가지로 분류가 된다.
◆ 우선 민족의 정기를 짓밟은 친일행각이 조선일보의 10대 죄목 가운데 하나다.
윤봉길의사를 범인이라고 지칭하고 일본군을 아군, 황군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스스로를 민족 정론지라고 칭하고 있다.
◆ 두 번째 죄악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독재정권 찬양이다.
전두환 신군부와 결탁하여 급속하게 성장한 조선일보는 지금도 전사적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찬양에 열을 올린다.
◆ 세 번째 죄악은 최대부수의 신문권력을 악용하여 민주화인사를 탄압하고 얼토당토한
사상검증을 하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김정남, 한완상, 최장집
등을 황당한 빨갱이 여론몰이로 낙마시켰다.
◆ 네 번째 죄악은 국가안보를 상품으로 팔아먹는 반민족적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는 점
이다. 전쟁위협, 공포감 조장, 적대감, 긴장감을 유발시켜 여기에 편승해 신문장사
를 한다.
◆ 다섯 번째 죄악은 악랄한 지역감정 조장이다. 특히 호남인에 대한 차별이 극단적이
다. 그래서 민주개혁세력은 조선일보를 반호남의 소굴이자 영남패권주의의 본산이라
고 본다.
◆ 여섯 번째 죄악은 반통일적인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대한 상식이하의 딴지걸기다.
◆ 일곱 번째 죄악은 잦은 오보와 상습적인 곡필로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어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이다. 86년 김일성 사망설이 대표적이다. 물론 김일성
사망설 그 자체보다는 타이밍이 문제다. 정권이 존립의 위기에 있을 때 대중의 관심
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드는 교묘한 공작을 조선일보는 밥먹듯이 해 왔다.
금강산 댐도 마찬가지... 서울 불바다 뻥 튀기 보도도 마찬가지...
◆ 여덟 번째 죄악은 인권유린 사건에 대한 왜곡보도와 imf 국가부도를 불러들인 책임
이다. 부천서 * 사건에 대한 왜곡보도가 대표적이다. 또 imf사태 "이틀"전까지
"외환위기 없다"며 되풀이 호언장담하면서 대한민국 일등신문이라는 것이 한가하게
사상논쟁이나 했다.
◆ 아홉 번째 죄악은 제왕적인 족벌세습경영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공공재인 신문을 사
유물로 전락시키면서 편집권을 강력하게 행사한다.
◆ 열 번째 죄악은 "나는 너를 비판해도 너는 나를 비판할 수 없다"는 오만과 독선으로
한국 사회의 최후의 성역으로 언론독재체제를 유지해 온 것이다. 이런 특권적 발상
이 오만방자한 권력을 행사하고 불법을 자행하게 하는 근원적 요인이다.
이상 조선일보의 큼직큼직한 죄악을 열 가지로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그들의 무책임한
반민주적, 반민족적 행태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우선 신문재벌 방씨일가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계초 방응모에 대해 알아보자.
본래 방응모는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거의 맨손으로 광산사업을 시작했다. 운 좋게 금맥을 발견, 떼돈을 벌었다.
1932년에 방응모가 거머쥔 돈이 135만원. 지금 돈으로 치면 1350억원이다.
△ 계초 방응모
1350억원을 거머쥔 방응모는 광산사업을 그만두고, 20만원, 지금 돈 200억원을 투자하
여 조선일보를 인수한다. 또 12만원, 지금 돈 120억원을 투자하여 태평로 일대에 1400
평의 땅을 사서 당시 초고층 빌딩인 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방응모는 사업가다운 면모가 있었나보다. 그 후 50만원, 지금 돈 500억원을 투입하여
새로운 윤전기를 도입하는 등 시설투자를 했다. 또 50만원을 투입하여 경기도 수원에
97만평 규모의 간척사업을 전개하였다.
놀라운 것은 함경남도 일대에 무려 3천 2백만평 규모의 조림사업을 진행하였다는 거다.
장차 신문용지를 확보하려는 계산이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케팅기법을 도입하고, 중량급의 인사들을 주필로 영입하고,
조선일보 이외에 월간지, 여성지, 소년지를 또 창간하였다.
물론 친일행각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일보라는 신문 자체
가 친일실업인 단체인 대정친목회 명의로 발행허가가 나고, 친일악덕지주 예종석을 발
행인으로 하고, 친일상공인 조진태를 초대사장으로 창간되었으며(1920년), 이후 대표적
인 친일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경영했던 수치스런 과거를 가지고 있는 신문이다.
이것을 방응모가 사들여 운영한 것이다.
예종석과 조진태는 일본에 빌붙어 이권을 챙기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적용하여 고혈을 짜낸 악질적인 인간들이다. 또한 송병준이 누구냐? 이완용과 더불어
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진회의 중심멤버요 최고의 매국노다.
이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방응모 또한 부끄러운 친일행각에 나서게 된다. 1934년 당시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신문사 사장의 하루 - 방응모씨"라는 글에는 "저녁이면 사교
관계로 명월관, 식도원으로 돌아다니면서 재벌과 대관 집을 찾기도 하고... 가와시마
군사령관의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고..."라는 대목이 나
온다.
자신이 운영하는 월간지에 발행인 방응모의 이름으로 스스로 기고한 글을 봐도 친일파
방응모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대일본제국 2천 6백년의 빛나는 역사에 청렴강직한 대화정신과 팔굉일우의 이상으로써
닦아놓은 성업은 일계직통의 천황어능위를 봉하여 우리 국민은 이 성은 속에 만폭적 희
열을 느끼고 있다.... 천황, 황후 양 폐하의 성수무강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방응모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일종의 장사꾼이다. 언론사를
경영하면서도 장사꾼적인 기질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기적인 변화에 편승하였던 것이다.
반도 최고 갑부에 해당되는 방응모가 먹고 살기 위한 친일을 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
에 적극적인 친일행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인간적으로 좀 가엾기는 하다. 방응모가 해방이 된 이후 조선일보를 속간하면서 쓴 속
간사를 보면 "우리는 입을 가졌으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였으며 할 말은 많았으
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우리는 죽으라면 말없이 죽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될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써 있다. 물론 변명과는 달리 방응모의 친일은 자기방어의 한계를 넘
는 행위였다.
부패와 타락이 그 본질인 사회에서 깨끗한 사람은 좀 거만하게 굴어도 된다는 김남주
시인의 시도 있지만 어쨌든 방응모가 겪었던 시대적 상황에 내가 처해보지 않았으니 그
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못된다. 그러나 설령 그런 실수를 했더라
도 방응모 자신과 그 일가 그리고 조선일보가 보다 통렬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정도를 걸어야 할 사회적 양식의 표상인 언론의 이름
으로 행했던 자신들의 비겁함과 한계를 보다 확실하게 드러내고 그 잘못된 과거를 부끄
러워하면서 철저하게 반성적 고민을 하는 모습을 조선일보가 보여주었더라면 지금처럼
시민들에게 조롱과 불신을 당하는 조선일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조선일보가 그 잘못된 역사를 어떻게든 변명하고, 미화하고, 굴절시키고, 은폐
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방응모의 친일행각보다도 더한 퇴영적인 결과를 유발하기에 더욱
그렇다.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6.25가 발발하여 북한 인민군들에게 납북되는 불행한 결과로 끝을
맺었다.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이라는 책에 의하면 방응모는 납북 도
중 이회창의 고향으로 유명한 황해도 서흥군 부근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고 사망하였다.
미군 전투기 4대가 날아들어 닥치는대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사격을 하는 바람에 노
근리의 유족처럼 민간인인 방응모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조선일보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1991년에 북한 정무원 부부장까지 지낸 신경완이라는 사람의 구술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자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을 지낸 이태호씨가 쓴 매우 신뢰성이 높고,
자료가치가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책인데, 조선일보는 사주가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역사는 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한홍구 교수에 의하면 조선일보가
펴낸 방응모의 전기도 납북장면에서 그냥 끝나고 만다고 한다. 한홍구 교수는 그 이유
를 궁금해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납북해 간 인민군만 죽일 놈이고 정작 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전쟁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기 때
문일까?"
하여튼 방응모의 납북 이후 방일영의 시대가 도래한다.
△ 우초 방일영
방일영은 방응모의 손자다. 그 사이에는 방재윤이 있다. 방재윤은 방응모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사실은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본래 방일영의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모의 조카다. 그러나 방응모가 아들이 없어서 조카를 양아들로 삼은 것이
다.
방응모가 양자로 들인 방재윤이 방일영, 방우영 형제를 낳고 1940년에 사망하였다. 그
런데 1943년, 골 때리게 방응모가 환갑의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생물학적 순리를 거역
하면 불가피하게 심각한 투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방응모가 환갑에 아들을 낳았을 때 이미 손자 방일영은 스무살이 되어 경기중학교를 졸
업하고 일본 중앙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또 그 이후에는 조선일보에 근무하게 되었
다. 방응모가 낳은 아들 방재선이 일곱 살이 되던 시점에서 방응모가 납북되었다. 당시
방재선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방일영, 방우영 형제가 할아버지의 조선일보를 이어받아
운영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이 조선일보의 경영권 분쟁을 촉발한 것이다. 글쎄,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쉽게 판단이 안 선다. 그냥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조선일보를 방씨 일가 모두
가 포기하고 시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면 싶다.^^
방응모에 이어 조선일보를 승계한 방일영은 호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술도 꽤 잘
마시는 모양이다. 방일영의 회고록을 보면 3748평의 흑석동 대저택에 박정희가 쿠데타
에 성공한 후 자주 놀러 왔다고 한다. 거기서 기생들을 불러놓고 질펀하게 놀았나보다.
그래서 육영수여사가 방일영을 무지 싫어했다고 한다. 자기 남편을 망치는 인간으로 본
것이다.
왜 박정희는 대통령 체면을 벗어던지고 방일영의 집에 가서 신나게 놀았을까?
당시 박정희를 따라다니던 전 mbc 사장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오직 "천하의 주도 방
일영"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일영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주당이었다는 소리다.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태평로 1가>에 쓴 ‘지극하고 따스하고 멋진 방 형님’이란 제
목의 헌사에서 방일영 사장을 가리켜 “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이라고 칭송을 했다. "머리를 얹어준다"는 의미는 다들 아실 것이다.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 또한 술자리에서 박정희와 대면하게 된다.
어쨌든 간에 방일영은 박정희를 비롯해 서정귀, 이후락 등과도 상당히 어울리면서 신나
게 놀았던 모양이다. 방우영의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왼쪽) 부부와
그의 아들 방성훈 조선일보 기자의 97년 모습.
ⓒ 2005 <조선일보와 45년>
“내가 처음 박정희 대통령을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
귀씨(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동창) 등을 데리고 방일영사장과 함께 한 어느 술자리에
서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붙잡고 밴드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광란의 도가니가 펼쳐졌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술로써 맺어진 의리가 가장 끈끈하다.
명문가문 이후락 편에서 언급했듯이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 등은 이런 배경으로 이후락 5인방으로
불려졌고, 물론 그 주변에는 방일영이 있었다.
여기에 방일영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sk 창업자 최종건이 빠지면 안된다.
수원지방의 별 볼 일 없는 직물회사였던 선경이 급성장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종건은 죽는 순간까지 조선일보 사외이사였다.
방일영은 박정희대통령을 "대통령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의 삼촌인
방재선의 증언이다.
“대통령 형님, 한잔 쭈∼욱 드십시오.”
“내가 좀 과한 것 같은데….”
“아니, 제가 대통령 형님 술 실력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이런 대화가 바깥에까지 들려서 당시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의 심
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도 사실 박정희가 방일영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 속뜻은 요정정치
에 데뷔해보니 항상 엄청난 화술과 주량으로 밤 문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방일영이라는 말이다. 박정희는 "이 세상에서 팔자 제일 좋은 사람이 방일영이
다."라면서 부러워했다고 한다.
하여간 술과 여자를 매개로 한 이런 요정정치를 통해서 거대한 이권과 권력이 거래되
고, 정치와 언론이 비정상적으로 유착하는 정점에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이 있었다.
사주가 대통령과 술자리에서 형님, 아우하는 조선일보는 언론사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
가 포함된 유신쿠데타가 일어나자 서슴없이“구국의 영단”( 1 2 월 2 8 일자 사설)이
라고 보도하며 언론사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런 방일영이 얼마 전에 죽었는데 조선일보 사이트에 가봤더니 웃음도 안 나왔다.
무슨 임금님이라도 승하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우초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 대나
뭐래나...
우초의 정신을 이어받아 질펀한 광란의 술자리를 열라는 건가? 껄껄
민족언론의 명맥을 유지시키며 조선일보를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 언론으로 키워낸
거성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전문으로 올라온 문교부장관을 지낸 권이혁이 쓴 방일영 조사를 보면 소름
이 끼친다.
"우초 형의 일생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의 일생은 민족 언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선두주자로서 이름 있는 언론인과 문화인을
길러낸 일생이고, 사회 각 분야에서 값진 활약을 하고 있는 인재들을 양성한 일생입니
다. 그렇기에 이 사람은 이 자리를 슬픔을 뛰어넘어 인간 방일영을 재평가하는 장이라
고 믿는 것입니다. ..........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비록 형의 몸은 갑니다만 방
일영 정신·방일영 인간성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 그리고 이 땅에 영원히 살아 있
는 것이니 계속해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밝혀 줘야 하는 의
무와 소임을 다하셔야 한다는 부탁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무심코 읽다가 까딱 잘못하면 울지도 모르겠다.
박정희는 방일영이 맡았고, 그 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자 전두환의 비위를 맞추는
역할은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이 맡았다. 나치정권 선전상이던 괴벨스와 같이 국민 우민
화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던 전두환의 심복 허문도를 도와 국보위 입법위원으
로 참여하여 희대의 언론통제 악법인 '언론기본법'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살인마 전두환은 조선일보에 의해 민족의 영웅이며, 구국의 지도자로 둔갑하였다.
광주학살이 끝난 후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떠들었다.
"국군이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
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
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리영희선생님의 정리를 끝으로 방씨들의 끝도 없는 비리를 대충 끝내겠다.
손가락이 아프다.
“(역대정권은) 권력의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고, 그들의 범죄를 ‘반공’으로 정당화
하며, 그들의 사리사욕을 ‘애국충정’으로 칭송하는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광주에
서의 양민 대학살을 ‘국가 안보적 합법행위’로 감싸주고,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외
치는 인사들의 목을 조르는 온갖 야만적 탄압행위를 ‘빨갱이 잡기’로 정당화해주는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소위 ‘언론사’와 ‘언론
인’은 그 요구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범죄적 권력의 공범자가 된 것이다. 그 대가로
소위 ‘언론사(주)’는 비대화하고 ‘언론인’을 자처하는 기능인들은 그 직장의 안과
밖에서 화려한 승진과 영달의 사다리를 달려 올라갔다. 그렇게 해서 부정한 정치권력과
타락한 언론권력은 일체화되어갔다.”(리영희, <말> 1996.3)
△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이사
방일영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 방상훈은 조선일보의 대표이사로서 현재 사주
다. 숭문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작은 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호텔 대표이사다.
방일영의 장남 방상훈의 부인은 윤순명이다. 윤순명의 아버지가 윤영구다. 그러니까 방
상훈의 장인이다. 윤영구의 아버지가 윤영선이다. 윤영선은 그 악명높은 윤치호의 아들
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방상훈의 부인 윤순명은 그 악명높은 윤치호의 증손녀다.
이런 부분은 조선일보에 전혀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방상훈의 부인 윤순명의 증조부 윤치호의 친일행위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한민국 한
복판에 99칸짜리 고택을 지어놓고 명문가문 운운하는 바로 그 집안이다. 윤치호의 사촌
형이 중추원 의관을 지낸 친일파 윤치소다. 그 윤치소가 낳은 아들이 바로 윤보선이다.
이 윤씨 명문가문은 앞으로 새로운 장에서 주의깊게 살펴보겠다. 아주 골 때리니까 기
대하시라.
방상훈의 장인 윤영구는 교통부 관광국장, 육운국장을 거쳐 메트로 항공사 회장을 지냈
다. 그의 동생 윤승구는 윤보선 비서를 지낸 뒤 개인사업을 하다가 요즘은 충남 아산의
윤치호 고택을 지키고 있다.
윤영구의 작은아버지 윤광선은 6.25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 물론 아버지 윤치호의 친일
행적때문이다. 이 윤광선의 딸 하나가 시집을 잘 갔다. 서울대 약대 학장, 대한 약학회
회장을 지낸 채동규가 윤광선의 사위다.
채동규는 아들들을 많이 두었는데 거의 의사, 교수로 키웠다. 절반은 미국물을 먹고 있
고, 절반은 한국에 있다. 한국에 있는 채동규의 가지들 가운데 채영문 연대 보건대 교
수, 채기준 이대 전산과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연세대 이사장으로 있는 일민 방우영은 1남 3녀를 두고 있다. 아들 방성훈이 현재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 중이다. 방우영의 아들 방성훈의 장인은 영풍그룹의 주력사인 고
려아연의 부회장 최창근이다.
나는 최창근을 전문경영인으로 보고 싶었다. 그런데 뒷조사를 해보니까 신기하게도 영
풍그룹의 창업자인 장병희와 고향이 똑같다. 똑같이 황해도 봉산 출신이다. 뭐가 있는
게 분명하다. 역시 개천에서 용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껄껄.
각설하고 이 부분에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왜 방우영이 연세대학교 이사장인가?
돈 주고 산 것인가? 무슨 학문적 업적을 남겼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연세대학교 이사장이 된 건가? 거참 희한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의 사연은 연대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본부의 자료를 참조하시길..
어쨌든 이 방우영의 딸 방혜성이 태평양 창업자 서성환의 큰아들 서영배와 결혼하였다.
방우영의 딸이 시집간 이 서씨집안의 혼맥이 화려하다. 서성환의 큰딸 서송숙은 서강대
학교 상경대학장 박내희와 결혼하였다. 그렇다면 소위 서강학파의 정점에 있는 건가?
서성환의 둘째 딸 서혜숙은 김의광과 결혼하였다. 김의광은 현재 태평양 계열사의 회장
이다. 김의광의 아버지는 만주군 대위 출신으로서 국방부 차관, 상공부장관, 내무부장
관, 교통부장관, 한전 사장을 지낸 김일환이다.
김일환은 대한민국에서 군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재향군인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
다. 일본군으로 있다가 한국에서 군생활 5년 남짓하고는, 재향군인회에서 영향력 행사
하는 것은 50년 세월이다. 껄껄. 김일환은 경흥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서성환의 세째 딸 서은숙은 고려대 의대 교수 최상룡과 결혼하였다. 최상룡의 아버지는
박정희정권하에서 국회의원,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다. 부산 동성학원 이사장
이기도 하다.
서성환의 네째 딸 서미숙은 부도난 우성그룹 부회장 최승진과 결혼하였다. 서미숙은 리
베라 호텔의 고문으로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비록 회사가 망했지만
굶지는 않을 것이다. 나보다는 잘 살겠지.
서성환의 둘째 아들 서경배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농심그룹 신춘호 회장의
딸 신윤경과 결혼하였다. 이로서 조선일보는 막강한 롯데패밀리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역시 조선일보 혼맥의 백미는 방상훈의 장남 방준오와 lg 공동 창업자 허정구의 손녀
허유정이 결혼한 것이다. 지난 번에 언급했듯이 이로써 조선일보는 김동조가문과 결합
되면서 방준오는 정몽준의 처조카사위가 된다.
이 gs는 lg와 연결이 되어있고, lg는 한진과 연결이 되고, 한진은 롯데와 연결이 되고,
롯데는 농심과 연결이 되고, 농심은 태평양과, 태평양은 조선일보와 다시 연결이 된다.
이 부분은 훗날 한국의 명문가문 조중훈가, 신격호가를 논할 때 세밀하게 따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