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이완용

순강도 작성일 12.04.26 17:22:46
댓글 51조회 2,968추천 5

위키펌

성명이완용(李完用)출생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사망1926년 2월 12일, 일제강점기 조선(67세 7개월 5일)분야장사꾼정치주요활동일제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에 적극 기여함평가매국노, 팔 수 없는 것을 팔아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린 자비고친일인명사전 등재
20090207.01100119000002.01M.jpg
젊은 시절
01.jpg
늙은 모습(1916년)여러분은 인간이 원숭이로 진화한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이제부터는 천벌을 영원히 받아야지.[1]
- 동아일보, 이완용의 사망 직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 친미, 친러, 친일 코스를 차례로 밟다가 결국 친일파로 진로를 결정해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주도한 매국노의 필두.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이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매국노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앞장서서 팔아 넘긴 매국노의 수장이다.[2]
악명이 너무나 자자하여 을사오적이라고 하는데 웬만한 사람은 이완용 빼고 다른 인간들은 이름이 생각이 안 날 정도이다. 심지어 근현대사, 국사를 배울 때 을사오적 이야기가 나오면 거진 모든 아이들이 이완용 빼고 나머지를 잊는다.[3] 덕분에 자기 혼자 주야장천 까이느라 다른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가루가 되도록 까도 시원찮은 자들의 방어막이 되고 있다(프렌드 실드?).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된 우봉 이씨 족보를 보면 족보에 이완용의 이름은 의도적으로 삭제한 듯 빈칸으로 남아있고 연필로 간단히 적혀있을 뿐 사실상 족보에 이름이 파였다.

위의 설명이 너무 길어 보이면 그냥 '쳐죽일 존재'나 '인간말종', '인간 쓰레기', '천하의 개쌍놈', '나라를 판 만고의 역적 쉐키',[4] 당장 전차를 몰고 가서 머리통을 날려버려야 할 새퀴, '견공자제분', '한국 역사상 최대최악의 간신' 등등으로 줄여서 말해도 문제 없으며 대놓고 깐다 해도 누구 하나 말릴 사람 없는 몇 안 되는 작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가루가 되도록 까도 시원찮은 인간.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5]"○○○ 개.새.끼해봐의 가장 올바른 예

Contents

1 이완용의 생애1.1 을사조약 이전까지의 삶과 매국노로 까이는 이유1.2고종 폐위, 군대 해산에 참여하여 총리직을 얻다1.3 다시 살아난 후 합병 전야까지1.4 강제 병탄 후, 그리고 그 말로2 이완용의 성품3 이완용에 대한 떡밥4 변명은 아닌(?) 이야기5 관련 어록6 기타

1 이완용의 생애 ¶

1.1 을사조약 이전까지의 삶과 매국노로 까이는 이유 ¶

이완용은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시 낙성면#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부친은 우봉 이씨 이석준(李奭俊, 다른 이름은 이호석(李鎬奭))이고 생모(어머니)는 신씨였다.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의 잠성부원군 이공정의 후손이었다. 이공정의 아들 이자의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조선조로 와서도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고관을 역임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완용의 생가 15대조인 이길배가 태종 때 도관찰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문과 급제자 40명, 우의정 1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한 대표적 양반 씨족 가운데 하나이다.[6] 16대조 이교(李喬)는 판서, 15대조 이방년(李芳年)은 밀직이며 14대조 이순(李淳)은 과거에 급제해 감사를 역임했으며, 조선 성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였다. 생가의 11대조 이세명(李世銘)은 을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10대조 이간(李人+間)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李義元)이 동지중추부사였고 8대조 이우(李寓)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관직을 배출하지 못해 몰락한 양반으로 가난하였다. 이완용의 생가 직계 가문은 9대조 이래로 이렇다할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없어 우봉 이씨 가문 중에서도 가세가 가장 빈한한 편에 속했다. 따라서 그의 생부 이호석은 겨우 선비의 체면을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몰락양반가문이었지만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양자여서 출세욕이 강하였다.

1882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고종이 축하연주를 하라고 하였다.[7] 세자를 가르치면서 순종과는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탄탄대로를 달리던 이완용은 또다시 변신할 기회를 맞이하는데 국제업무를 담당할 신진관료를 교육하기 위해 고종이 육영공원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헐버트를 만나게 되었고 이때 영어를 배웠다.
미국은 조선과 거리를 멀어 침입할 우려가 적고, 부국이니 덕을 볼 것이고, 종교지상주의 국가이니 야심이 적을거라 판단, 미국은 부강함이 천하제일이라는 당시 조선 분위기에 미국주재 공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는 청의 극심한 반대에도 무릅쓴 고종의 결단이었다. 미국에서 2년 5개월간 주미 외교관으로 근무한 기간은, 그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의 현실과 근대화된 서구열강의 모습을 보면서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을 피해 미국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한다(춘생문 사건).[8][9] 이후 참찬관으로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가 재차 트러블을 일으켜 미국 정권에 달라붙어 있기 어려워지자 미국의 반대세력인 친러파로 변신, 국내의 친미파 세력을 견제한다.
하지만 친러파 내에서도 트러블을 내고 찍혀 활동이 어려워졌고, 1898년 3월 11일, 이완용은 전북관찰사로 발령을 받고 좌천되었다.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국내 이권을 노리는 러시아에 대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반러여론이 커지자 독립협회에 속해있던 이완용도 정치적으로 힘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관찰사로 부임한지 닷세만에 직무태만으로 감봉, 공금횡령으로 파직위기를 맞고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되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독립협회 존속기간의 3분의 2 이상을 이끌었다(회비도 가장 많이 냈다고 한다). 독립문 현판도 이완용이 썼으며 의무교육을 처음 정착시킨 사람이기도 했으니..[8] 나름대로는 친일 이전의 경력을 보자면 전형적인 엘리트의 삶을 살았고는 할 수 있는데... 이후의 행적으로 말짱 부질없는 약력이 되고 말았다.
일부 이완용을 옹호하는 시각에서는 그가 초창기 애국계몽운동가로서 활동하면서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추진하던 중, 초반에는 일본이 조선을 둘러싼 열강 중 가장 힘이 없어서 일본과 친했다가,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비롯한 일련의 미국이 조선을 버리는 스탠스를 보이며 미국을 신뢰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자포자기, 매국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시각도 있다. 사람들이 이완용을 특히 매국노로 기억하는 것은 초반의 애국 개화사상가 이미지에서 돌연 변신을 한 데 대한 배신감이 커서 그렇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어쨌거나, 인생의 말로를 천하의 매국노로 보내기로 한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일이며, 그 이전 활동이야 어쨌건, 결국 그는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일 뿐이다.

1.2 고종 폐위, 군대 해산에 참여하여 총리직을 얻다 ¶

본격적인 나라 팔아먹기의 서막
새로운 힘을 찾던 이완용은 이번엔 친일파로 변신해[10] 일제의 무력을 등에 업고 고종을 협박, 을사조약을 체결시켜 을사오적의 수뇌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웃긴 건 이때 이완용의 대사가 "나라를 위해서 이 조약을 체결한다"였다. 물론 개뿔, 아주 뻔뻔함의 극치다.[11]
을사조약을 체결시킨 실적 덕분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으며 헤이그 특사 사건이 대외적으로 공표되자 이를 빌미로 고종의 양위[12]를 강요, 사실상 한 국가의 왕을 갈아치웠다. 역적 놈의 새퀴.
이미 그 전부터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오적 일원인 박제순[13]에게 넌지시 고종 퇴위를 제의하나, 의외로 별로 동조하지 않자 그를 물러나게 하고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앉힌 것이었다.
여하간 고종은 황제 대리를 주장하며 끝까지 버텼다. 궁내부 대신 박영효마저도 그 꼴을 보기 싫어서 그 자리를 피했으나 이완용은 스스로를 궁내부 대신 서리에 임명하고(;;) 그 일을 행했다. 그 직후 (20일) 메이지 일왕의 "순종 즉위" 축하 메시지가 오자 즉각 반응, (22일) 대리청정을 황제로 바꾸어버렸다. 그리고는 24일 정미7조약(한일 신협약)으로 내정까지 통감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안을 하나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황실보호 따윈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8월 1일에는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정미의병이 한창 일어났을 때 이완용은 일본군 대장 하세가와를 매일 찾아가 의병토벌에 대해 논의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거기서 '조선인 현병보조원 제도'를 계획하는 데 크게 일조했고, 의병장 허위가 체포되었을 때, 허위를 처벌할 것을 순종한테 상소를 올린 것도 이완용이었다.[14]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자꾸 요구를 하고, 결국 고종은 넘겨주면서 백성들과 의논한다고 했지만 이토는 폐하가 언제 백성들과 정사를 의논했습니까?라는 말에 데꿀멍.
이 시기에도 총리대신을 해먹으면서 형 이윤용을 궁내부 대신으로, 사돈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 승녕부 총관(고종의 비서실장)은 처남 조민희, 아들 이항구는 승녕부의 시종을 시키는 등 인척 내각을 이룩했고, 황태자 책봉 문제에도 참여하여 콩고물을 챙겼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서 물러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사법권을 넘기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돈까지 반대하면서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 내각내에서도 반대가 빗발치고 내각 총사퇴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자 그는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와 자기 멋대로 조약에 서명하고는 회의는 없다고 통보해 버린다. 이건 무슨.....
어차피 이 시기 일본 내각에서는 한일 강제합병 계획이 통과된 상태이긴 했다.

12월 4일에는 일진회의 한일합방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양심은 있었는지 아니면 합방의 공을 빼앗기기 싫었는지, 그도 아니면 명목상이라도 총리 자리를 계속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반대성명을 내고 열을 내고 반대한다. 그가 그나마 변호 될 수 있는 것은 이 부분이지만,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은 일진회의 계획보다도 한국에게 훨씬 불리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이완용의 집은 민중들에 의해 불타버렸고 자신 또한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 열사[15]의 습격을 받는다. 그러나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불행히도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절명하고 만다. 이재명 열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 하고 체포된다. 이재명 열사는 합병 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담이지만 당시 이뤄졌던 외과 수술에 대한 기록은 몇 남아 있지 않은 중요한 의학사 자료로 인정된다. 동 시기의 다른 외과 수술 기록이 전부 파기된 데 비해 재판의 증거로 사용되었기에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수술은 대한민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 의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분들이 "한국 의학의 발전이 5년만 늦었어도......"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모 의대의 흉부외과 총론 시간 첫 수업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의업에 충실한 것이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게도 한다."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흠좀무? #
또한 맹꽁이 서당에서도 경술국치 당시 이용직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나는 너님처럼 길거리에서 칼빵맞기 싫다며 디스한 장면도 나온다.

1.3 다시 살아난 후 합병 전야까지 ¶

5월 30일 부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에 오른다. 군부 출신으로 강경파였던 그는 일방적으로 경찰권 회수를 통보했고, 내각은 데라우치가 한국에 입국하기도 전에 무기력하게 통과시켜버렸다. 7월 23일, 한국 합병에 대한 세부사항 논의까지 마치고 데라우치는 입국했다. 이즈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는지 이완용도 요양을 마치고 상경했다.
이완용은 8월 4일부로 비서 이인직("혈의 누" 작가)을 통해 합병을 먼저 제의했다. 아마도 송병준의 일진회 등에게 선수를 뺏기기 싫었던 모양. 통감부마저도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라는 반응을 보냈다. 합병 조약문에서 이완용은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 칭호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라면서 추가를 요구했는데, 황실 보호가 아닌 어디까지나 황실의 지지를 통한 자기 입지 강화를 위해서였다. 일본 입장에서도 황실이 고분고분한 것은 결코 나쁘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주저하는 이들을 데라우치에게 일러바쳐 압력을 행사하고,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직을 일본 수해 위문 사절단으로 동경으로 보내는 등 (이용직은 이를 간파하고 가지는 않았다.) 갖은 수단을 써서 순종의 윤허를 받았다. 고종에게는 "신이 하지 않아도 송병준과 일진회가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이완용이 물러 난 후 고종은 "'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매국의 거사는 하지 않겠다.'고 한 자는 바로 이완용 아니던가! 그가 무슨 낯으로 짐을 본단 말인가!"라고 통곡했다.

그리고 8월 22일, 이완용은 이용직에게는 통보도 하지 않고 최후의 내각 회의를 열고는 한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켜버렸다. 이후 1주일 동안은 숨겼다가 8월 29일자로 순종의 이름으로 발표 된다.

그의 나이 52세, 그는 그렇게 나라를 팔아먹었다.

1.4 강제 병탄 후, 그리고 그 말로 ¶

280px-%EB%A7%A4%EC%9D%BC%EC%8B%A0%EB%B3%B4_%EC%9D%B4%EC%99%84%EC%9A%A9.jpg
1916년 8월 4일자 매일신보. 이완용이 기고한 글로 순종의 장남, 왕세자 영친왕(이은)과 일본 귀족과의 강제결혼 결정을 '내선융화'로 미화한 내용의 글이다.(이 문서의 이전 버전에 '이왕가'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을 하대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다. 이왕가, 이왕직,등은 모두 황실을 격하시켜서 낮춰 표현한 것. 단 이조는 좀 다르다. 일본에서는 한반도를 모두 조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지리적 위치와 국가의 호칭을 구별하는 것이다. 일본인 입장에서 조선 백자라고 하면 그게 한반도에서 나온 것을 말할 뿐 삼국시대인지 고려인지 조선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쓰지 말자. 사실 합방 이후의 '조선' 표현 자체도 멸칭이다. 합방 직후에 일본은 '대한'을 모조리 '조선'으로 바꾸는 작업부터 했다)
강제 병탄이 이루어지자,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감시하는 "조선인 헌병제"도 이 자의 아이디어였으니, 1910~1919년 사이의 헌병 경찰 제도는 사실상 이자가 만든 것이었다.[16]
명목상의 총독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과 부의장을 지냈다. 3.1 운동 직전에 민족대표가 가담을 요청했다는 떡밥이 있으나 그것은 뒤로 미루도록 한다.

3.1 운동 직후엔 "어리석은 조선인들"이란 내용으로 시작되는 뻘글을 3번이나 발표했다가[17] 다시 집이 불탔다. 이 뻘글 발표로 다음 해 후작으로 승급하였고 팔아 먹을 나라도, 국민도 없어지자 조용히 살다가 1926년, 68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뒈진다뻗는다.
진작 좀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시망했다니 분통 터지는 것은 당연한 일. 다만 사망원인을 보듯이 이재명이 찌른 칼날이 평생 그를 옥죄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320px-%EC%9D%B4%EC%99%84%EC%9A%A9_%EC%82%AC%EB%A7%9D_%EB%8B%B9%EC%8B%9C_%EB%A7%A4%EC%9D%BC%EC%8B%A0%EB%B3%B4.jpg
(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 기사. 신문 1면에 이완용 사망소식을 대서특필로 다뤘다.)
사후는 생전보다 더 화려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정2위대훈위후작이공지구란 휘황찬란한 깃발을 들고 장례가 치뤄젔다. 그의 장례 행렬은 그의 3천평짜리 집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고종 사후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한편 그때까지 명맥만 존속하던 대한제국 황실은 그에게 훈 1등 이화 대수장과 금척 대수장을 수여했다. 에라이...
하지만 당시에도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으니...
280px-%EB%8F%99%EC%95%84%EC%9D%BC%EB%B3%B4_%EC%9D%B4%EC%99%84%EC%9A%A9_%EC%82%AC%EB%A7%9D_%EB%B3%B4%EB%8F%84.jpg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사설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으로 이완용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 동아일보는 "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가면 어찌된 일인지 해당 기사 부분만 기사가 지워져서 볼 수 없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 가면 원문 이미지를 볼 수 있으니 참조하자. 옛날 신문이라 한자가 좀 많다.
그밖에도 동아일보 "횡설수설" 란에는 이틀 연속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짤막한 촌평을 달아두고 있다. 이건 네이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요즘말로 고인드립 수준이지만, 그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이 자한테는 그래도 된다.
  • 2월 12일 : 구문(口文 :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후작 이완용은, 작일(作日 : 어제) 황천객이 되엿다고, 지옥행하노라고 무던이 고달풀걸
  • 2월 13일 : 구문 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엿스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18]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 낭산면에 있었는데, 매국노다 보니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이 일어났고, 해방 이후에는 당연히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1978년에 이완용 후손(정확히 말하면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를 하였다. 오늘날, 이완용의 묘가 있었던 곳은 채석장으로 바뀌었다. 파묘할 때 지속적으로 훼손된 묘였지만 붉은 명정에 쓰인 '조선 총독부 부의장'이란 글은 상하지도 않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이 관은 박물관에 있다가 이완용의 손자뻘 친척이라고 상당 기간 오해받던[19] 국사학자 이병도가 사비로 구입해 자택에서 불태워 버렸다.[20]
직함도 참 여러가지로 받아서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 조선사편찬위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 선만노몽(조선, 만주, 러시아, 몽골)연구협회고문 등을 지냈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그의 손자인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하여 환수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2009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완용의 이름이 당연히 그리고 당당히 들어가 있다. 안 들어가 있었으면 높으신 분들은 암살당할 뻔했다.

2이완용의 성품 ¶

처세엔 뛰어나고 영민한 인물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초기에는 그의 영민함을 감탄했던 선교사 겸 의사인 앨런(알렌)도 후에 이런 평을 남겼다.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즉, 머리는 잘 돌아갈지 몰라도 줏대라는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는 인물이란 평.[21 참고로 알렌은 고종을 어떻게 평가했냐 하면, 매천야록에는 "내가 구만 리에 사천 년의 역사를 봤지만 조선 황제 같은 인종은 처음 보는 인종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알렌은 조선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
개인으로 보기에는 '매국노'의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긴 하다. 집에서는 항상 한복을 입고, 치부에는 애썼지만 첩 하나 거느리지 않는 면모를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도덕성 등이 그를 결코 정당화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알아두자. 단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이미지와 조금 다르다는 것.
그러나 그 치부에 애쓴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민영휘[22] 다음 가는 조선에서 두번째 부자가 그였다.[23] 그것도 물려 받은 것은 거의 없이 그의 대에 나라 팔아먹어 대부분을 벌어들인 것이다. 땅으로는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 2배 면적을 보유했으며,[24] 집을 여러번 옮긴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한일 신협약 때 10만원, 합병 때 15만원의 은사금을 일본에게서 받았다.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은 그를 가리켜 '마음이 바르고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정치가', '대한(大韓)의 몇 째 안 가는 재상',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한 인물'로 평했다고 하지만...... 앞에도 밝혔지만 이완용은 당시 독립협회의 중심 간부였다. 더구나 당시엔 친러/친미파로 그다지 매국노 티를 내지 않았었다.

3 이완용에 대한 떡밥 ¶

  • 이완용의 행적에 대해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꾀한 인물이란 평가를 하는 자들이 있으나 한 마디로 말해서 헛소리이고, 여러 마디로 말해서 근거가 없다.게다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김완섭 같은 작자이다. 뉴라이트같은 자들조차도 이완용 미화는 좀 자제하는 편. 그러나 일제 강점지가 축복의 시대라고 열광하는 자들이잖아? 아마도 환호하고 위대한 인물로 찬양할거야

    그 같은 주장의 증거로 자주 제시하는 것이, 당시 독립협회와 얽혔던 일인데, 이는 당시 조선 지식계층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지 이완용의 위치를 말해주는 대목은 아니다. 게다가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이완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보신에 신경 썼던 사람이므로, 그가 민족이나 대의를 위해 행동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 가끔씩은 "황실을 보호했다"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데, 위에서 보았듯이 결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단지 황실에게 조금이라도 환심을 사고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였다. 이 떡밥 때문에 명성황후(드라마)에서도 마치 그 시절에는 조선 왕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처럼 묘사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도리어 그는 고종 독살설의 가장 강력한 용의자이다.
  • 3.1 운동 때엔 민족대표들이 선언에 참여해 달라고 권유했으나, 최소한의 염치가 있었는지 "내가 말아 먹은 것을 다시 민족대표라고 어떻게 얼굴을 들이미냐?"라고 말했다는 주장이 있다. 추측하자면 본심은 일본한테 밉보이기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만, 그래도 그런 사건이 모의되고 있다는 것을 총독부에 고해바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말 마지막 양심은 있었던 것일까…[25]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참여함은 무안한 일이며 알긴 아는구나 이 일이 잘 되면 먼 동네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오. 응? 이번 운동이 성공해서 내가 맞아 죽게 된다면 차라리 다행한 일입니다.뭐라고? ” #
근데 학계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어디까지나 루머이다.[26] 정말 마지막 양심이 있던 측은 이용직 같은 인물이 있다.

  • 이완용의 평판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아들 이승구가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해서 그걸 안 아들이 남 보기 부끄럽다고 자살한 거라는 소문까지 돌았다.[27] 하지만 이승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에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사망 당시 26세였다.
  • 순종때인 1908년, 이완용은 한국 최고의 매국노 답게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했고 결국 받아들여졌다. 순종은 실권이 없었다. 그 때 복권된 대표적인 사람이 윤원형. 다만, 복권자를 자세히 보면, 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이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한 사람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었던 정인홍이 복권되긴 했다.[28] 어쨌거나 당대 간신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임에는 맞다. 다만 그건 당대의 시선이고, 오늘날 정인홍을 간신으로 보거나, 숙종 대의 남인계 대신들이나, 영조 초반의 소론계 대신들까지 간신으로 취급하지는 않으니, 이 부분은 역사의 판단에 맡길 문제인 듯. 애당초 이 취급의 발단은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이었다.
  • 1909년, 이재명 의사가 명동성당에 갔다 온 이완용을 암살하다 실패한 사건 때문에 이완용이 기독교인이라는 루머도 있는데, 이는 안티기독교의 개드립에 불과하다. 암살 시도가 있었던 그 날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서거로 추도식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총리대신 자격으로 추도식에 참석한 것일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일본에게 아부하고 충성했지만 일본의 문화는 불교밖에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29]
  •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성균관 대사성. 어찌되었던 총장급 인물로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적혀있다. 컨트롤 + f키를 이용하여 직접 찾아보자. 덕분에 성대는 훌리건들에게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 ㅋㅋㅋ'라고 억울하게 테러당한다. 정작 성균관대에서도 게재는 할지언정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건만...

    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적으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정계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하였다. 고종 때 와서는 그냥 좀 어느정도 실력만 되면 대사성 타이틀만 붙여줬다고 봐야 할 듯. 실제 저 페이지로 들어가보면 고종대의 대사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 80년대 동시대를 다룬 KBS 대하사극 독립문에서는 태조 왕건에서 왕건 큰 장인으로 나온 고 김진해씨가 이완용으로 열연했다. 역시 이 드라마에서는 매국노 시전을 적절히 보여주었다. 후대의 사극 명성황후에서는 충신으로 나오지만. 가문의 보정?

4 변명은 아닌(?) 이야기 ¶

물론, 지나치게 혼자만 대표로 까인다는 평은 있을 수 있다. 그럴 만큼 하도 나라 팔아먹는데 물불 안가리고 나서기도 했지만….

학계에서 보는 이완용은 매국노로서의 위치를 제외하면 '줏대없는 개화파 정치인' 정도이다. 친미파-친러파-친일파로 변한 그의 모습도 주도적으로 변했다기 보다는 아관파천 과정에서 친러파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과정에서 친일파가 되었다. 개화를 하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생각을 유지하는 전개에서는 스윽 밀려나가는 인간형이었다고 보면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영어에 능통하고, 글도 좀 쓰고 평판도 괜찮은 등(물론 을사조약으로 매국노가 되기 이전 이야기) 얼굴마담으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는 모조리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30] 이후에도 훌륭한 얼굴마담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었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도 높은 평가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의외로 멀쩡한 시대에 태어났으면 고만고만한 좋은 관료로 살았을지도 모를 인물. 그랬다고 해도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는 거고......

5 관련 어록 ¶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핀란드 같은 나라가 돼서는 안 된다.
- 1896년 7월, 이완용 <독립협회 강연>중 발언 
해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31]
-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 넣은 글 

6 기타 ¶

웃기는 일이지만, 일본어는 죽을 때까지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과 대화할 때는 반드시 영어로 했다고 한다. 처음 육영공원에서 배운 영어는 형편없는 실력이라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 같이 간 이상재의 자조(반벙어리)를 면치 못했지만, 오랜 미국생활로 인해 그의 영어실력은 일취월장. 총독부의 인간들보다도 한 수 위였다고. 흠좀무.[32] 알고 있는 일본인 인맥도 넓지 않아서,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자가 1906년 학부대신(일종의 교육부/교과부 장관) 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교육시간이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칭찬했다.
근대 문물에 관심은 있었던 것 같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그렇게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절대 임금이 그 많은 음식을 혼자만 먹고 남겨서 버리는 거 아니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정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음식 쓰레기 문제가 아니라 그런 비효율성이 문제였던 것. 그리고 그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 쓰레기도 줄인 그는 효율적으로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이 쓰레기가 되는 위업을 달성한 꼴이 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글씨는 꽤 잘 써서 당대의 명필축에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독립문 현판의 '독립문'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33] 하지만 행적 때문에 글씨의 수준과 관계없이 가격은 바닥을 긴다.
또한 재테크에도 뛰어나 조선 팔도 곳곳에 이완용의 사유지를 늘려갔다. 그가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400억 원이 넘는다고 하며 자기 재산의 3배를 늘렸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 어쩐다 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여담으로 이완용이 같은 친일파의 추천으로 하마터면 종묘에 모셔질(배향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이게 실현됐다면 종묘에서 여러 사람 뒷목을 잡았으리라...
애니메이션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에 나오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행동이 마치 이완용을 떠올린다 하여 스완용이라 불리며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완용은 별로 생각 없이 애니 보는 사람들이 스자쿠보다는 이완용을 까기 위해서 만든 용어일지도...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을 낚아서 코기 팬들을 늘리는데 일조했었는데, 매천야록에서 일본식으로 바꾼 이름이 주작 - 즉 스자쿠라는 떡밥이 돌았다. 그러나 매천야록에는 주작이란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우(李家完用). 그냥 이씨 가문의 완용이라는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이다. 대한제국 최초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건 이완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그의 과오를 덮어줄 수는 없다. 앞 항목에서 본 그의 성품 때문에 그의 행적을 덮어줄 수도 없다. 아돌프 히틀러 항목을 참조하자. 따지고 본다면 모든 후손들이 '의무로' 자기를 욕하게끔 배우도록 한 희대의 병크.
국가가 지정한 100퍼센트 매국노이니 애국열사다 뭐다라고 포장하는 짓을 하면 그 즉시 매국노로 몰린다. 아니 그 전에 포장할 만한 건덕지도 없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하다 보니 다른 동명이인들의 삶도 완전히 망쳐버렸다. 즉 이 인간 때문에 이완용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내에서 언급만 해도 부정타는 단어의 상징이 되버린 셈이다.[34] 어찌보면 이것도 악업에 추가해야 할지도?
여하간, 인간으로서는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갔다.

그런데 얼마전 이완용에 대한 평전이 나왔다.(한겨레 출판사)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하면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
시험문제에서도 신랄하게 까였다. #국사선생님의 분노라고 치면 다 나온다.
3.1 운동에 경고하는 개소리를 하기도 했다. 뒤질수록 깔 거리만 나온다.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그의 사망 다음날인 1926년 2월 13일자에 실린 사설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수록되어 있는 버전은 당시에 검열을 받았던 건지 해당 부분이 훼손되어 있어서 판독할 수 없다.
[2] 역시 대세에 대한 감각은 뛰어났는지,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말이...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 후덜덜. 역시 희대의 매국노답다.
[3] 사실 이 매국노 목록을 외울 필요는 없지만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것 정도는 안 외워도 다 알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 학생들은 다만 이 사실을 배우면서 이완용이 얼마나 악랄한 친일파였나를 배울 뿐이다.
[4] 대한제국의 시각으로 봤을 땐 명백히 역적 맞다.
[5] 이러다보니 후대의 동명이인들은 그저 안습.
[6]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3페이지
[7]고종실록 1882년 11월 2일.
[8] 1895년 11월에 있었던 고종의 경복궁 탈출 미수 사건. 이범진이 주도하였고, 이완용, 이윤용, 윤치호, 민상호 등이 참여하였다. 목표는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력 동원을 위해서 참여시킨 훈련대 대대장 이범래, 이진호가 이를 일본에 밀고해서 실패하였다. 이 사건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후 고종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데, 이는 이완용도 예외가 아니었다.
[9] 작가 송우혜는 이 사건의 주도자를 엄비로 보고 구국의 화신 엄비 운운한다. 그러다 잊혔다. 북한에서는 일단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과 이완용이 침여했다는 점을 들어 미제국주의자 대위 훈련대장 다이와 매국노 이완용, 윤치호가 작당한 고종 납치극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나 후자나 흠좀무.
[10] 이완용은 근본적으로 친미파였고, 1904년까지만 해도 철저한 배일(排日)세력이었다. 1890년대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친러파로 활동했던건 일시적이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권력과 돈에 민감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러일전쟁을 계기로 친미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
[11] 당시 사람들은 이완용을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이완용은 오히려 '시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하는 내용의 X소리만 남발했다.
[12] "고종의 양위를 사죄의 표시로 하여 만족한 일본이 더 이상 보복을 하지 않도록" 하려고 했다나.
[13] 을사조약 시기 외무대신. 이후 참정대신 한규설이 항의표시로 물러나면서 참정대신을 맡게 된다. 을사조약 시기에도 초기엔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그래봐야 매국노지만. 경술국적도 된다.
[14] 의병장 허위는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만다.
[15] 당시 현역 군인이었다. 물론 사병.
[16] 헌병보조원 제도는 사실, 정미의병 때 부터 있었다.
[17]1차는 4월 5일 "황당한 유언에 속지 마라."였고, 4월 7일에 "돌이켜 자신을 구하라."라는 협박성 뻘글을 다시 썼다. 5월 29일, 3.1 운동이 가라앉자 조선은 일본의 통치 아래 복지가 증가했으며, 실력양성에 힘써야 한다는 최종 뻘글을 썼다. 이런데도 그가 민족대표를 할 뻔했다고?
[18] 쉽게 말해서 염라국도 팔아먹을까봐 걱정된다는 이야기(...). 왜 염라대왕도 독살하시게?
[19] 이병도의 조부와 이완용의 항렬이 같아 손자뻘이란 거지 실상은 그냥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머나먼 친척이다. 촌수로 따지면 30여 촌 정도 될 꺼라고 하니.
[20] 이에 대해 정지환 기자는 이병도가 자신의 실증주의를 져버린 행위라고 비판했다.
[21] 그런데 이 부분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즉, 기계처럼 매뉴얼에 따라 딱딱 행동한다는 것이다. 마치 일본처럼 말이다.
[22] 민씨척족 세도가문에서 권세를 누린 수구파 관료. 일제에 합병되고 난 이후에 악질 친일파로 변신했다. 일제시대 동안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중 한 명.
[23] 죽기 직전에 보유한 자산이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450억원 가량 된다.
[24] 이중 훗날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평방미터(3천평 남짓), 그의 땅의 1% 밖에 되지 못한다.
[25] 이완용은 일제 경찰로부터 비밀리에 감시당하기도 했었다. 뭐, 본인은 이걸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26] 이 때 민족대표는 마찬가지로 박영효 에게도 같은 권유를 했었고, 이 사건 때문에 제법 까인 감이 있다. 박영효도 그 정도인데 이완용을?
[27] 매천야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28] 이완용이 자기가 찔려서 간신들의 복권을 추진했는데 그 와중에 광해군의 간신으로 취급받고 인조반정때 처형된 정인홍이 복권되었다. 문제는 근현대로 오면서 정인홍은 조선을 구원한 위대한 세 사람 중의 1인으로 까지 취급되었고 인조 는 조선 최악의 암군으로 까이고 있으니 아이러니.
[29] 부연하자면, 레오폴드 2세는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나눠먹기 행사에 동참하여 콩고라는 벨기에 영토의 50여배나 되는 식민지를 넘겨받은 위인이다. 그리고 그 땅을 왕실의 사유지 형식으로 다스렸는데, 고무 등 천연자원을 워낙 악랄하게 수탈하여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유럽에서도 대차게 까였으며 인격도 별로 좋지 않아 독일의 입방정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사후 디스당하기도 하였다.
[30] 그 전에 다른 을사오적들은 정말 평판이 안 좋았다. 이미 을사조약 한참 전부터 노골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로 이완용은 그런 점이 별로였기 때문에. 그래서 을사오적에 포함된 인물 중에서는 이완용이 가장 의외의 인물로 평가받았다. 또한 이완용은 조선 말기에 임금으로부터 신임받았던 근왕주의 엘리트 관료였기에 그는 일개 매국노 정도가 아니다.
[31] 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32] 때문에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그나마 할 줄 아는 일본인과 영어로 대화하며 일했다.
[33] 사실, 독립문 건립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도 이완용이었다.
[34] 이완용이란 이름 가진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이니...... 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건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식의 동명이인들이 까이는데 예를 들자면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저지른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들도 독립전쟁이 끝난 지 200여 년이 넘은 지금도 자국내에서 까이기도 한다. 히틀러의 경우는...... 말 안해도 알 거다. -------------------------------------------------------------------------------------------------------------- 밑에 LOD 보고있냐? 니놈이 말한 이완용이 진정 나라를 위해 나라를 팔았다고 생각하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면 넌 진짜 정신나간 놈이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냐. 맨날 일본애니 보면서 수음 좆나게 치면 그렇게 될 수 있는거냐? 좀 알려줘라 내 주변사람들한테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게.너의 댓글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한국인이 어떻게 이완용이를 두둔할 수 있는지.. 진성 친일파매국노인 그새끼를.. 아직 늦지 않았다. 너의 그 잘못된 생각을 바꿔라. 10.gifLod 12/04/26 13:04:46 [124.xxx.xxx.xxx]추천sep.gif신고sep.gif
  • 아뭐니이거 아주 환상속에 국가를 꿈꾸는 사람이군
    이런걸 매국노라고 하지
    잘나가는 이완용집안이 돈때문에 나라를 판건줄 아나
    조선의 시대발전을 위해 나라를 판거다 현실을 보지못한 우매한결과가 남기 역사적 범죄다.
    일본의 군대부활은 생각도 못하지죠 님은 한반도 미군철수후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게 아닌데요
    일본군대 다시 생기고 중국 러시아 영토분쟁 시작 대한민국 국방력 경제력 딸림 결과 완벽한 패배
    2차대전 독일과 같은 기술적우위도 없고 전략전 우수한 지휘관도 없음
    미군이 대한민국 군대 덜떨어져서 전시작전권 안주는건 아시나요
    그렇다고 전쟁을 치룬 국가에 절대적인 공포감도 못주고 전쟁은 끝남 결과 그냥 호구로 평생살아야함
    그리고 영토분쟁에 동맹은 없는거 아시나요.
    백두산의 반은중국 소유입니다. 러시아는 일본과 영토분쟁이라고 하지만 엄연이 러시아도
    동해에대한 어느정도의 미약할정도의 주장권이 있는게 현실입니다. 그리고6.25 북한동맹군 이였던 나라입니다.
    일본은 독도먹으려고하고 한반도를 노린나라 러시아 중국 일본 동맹을 누가 해줄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때와서 미국찾을 까요ㅋㅋㅋㅋㅋㅋㅋ 이제는 별힘도없는 UN이 뭔가할까요.
순강도의 최근 게시물

정치·경제·사회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