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은 과연 친일파인가?

폴더짱 작성일 12.10.19 20: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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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유포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다룬 글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들임을 먼저 밝힙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박대통령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차기 대선에 따른 정략적 관점(박근혜대표의 아버지)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진보좌익과 보수우익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요?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입니다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이나 지하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 뿐만 아니라 경찰이나 공무원 및 그시대 언론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 학자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태어나고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전부 일제 식민지 지배에 큰건 작건 협력한 게 아니냐? (일제가 철도를 통해 조선에서 수탈을 많이 해갔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인데 그럼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인가요?)

그당시 반체제 지하활동을 빼고 식민지 지배 권력에 대한 대립과 반목으로 그어떤 사회생활을 조선땅에서 공식적으로 할수가 있을까요

아예 시골에서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는가?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부의 축적 자기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 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객관적 증거에 근거해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독립투사의 모델들을 제시하고 "보라 박정희는 이렇게 살지 않고 만주군이 됐으니깐 '친일파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렇게 비난하는 당사자들이 그때 박정희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으면 모두 목숨을 당연히 내걸고 독립투사로 나서 일제와 싸웠을까?하는 의문을 낳을 뿐입니다.
진짜 나쁜 놈은 저렇게 훌륭한 삶을 산 위인을 두고 나보다 훌륭한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업적을 숨기고 악의적으로 모함하고 음해를 하는 세력들입니다.


박 대통령은 위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모셨고 후세가 마땅히 본 받아야 된다며 사당을 짓고 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언제 그런 분들을 홀대하고 푸대접한 적이 있습니까?

또한 최고 권력자로서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자신의 과거경력을 미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김승곤(92)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비밀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세계일보-]

그당시에 군인이 된 표면적 형상에 집착하여 무조건 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데요.
우선 청년 박정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린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합니다.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 박정희는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청소년시절부터 군사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본다면 당시에 일선 소학교 교사로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가며 어린 제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소 일본에 대해 자꾸 반항적인 성향을 보이는 요주의 인물 박정희에 대하여 경찰,행정,학교를 장악한 일본인들의 집요한 괴롭힘과 억압이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군도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여제자 이순희씨 증언

박정희에게 배운 이영태는 이낙선(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

[ 교사시절 제자들의 증언 자료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 ]

이영태씨의 증언입니다.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평소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순사가 박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선생님이 오가와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정순옥씨의 증언입니다.
-"어느 일요일,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 집을 찾아갔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벌주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하여 살렸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어요.
그리고 언젠가 박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 들어라.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

주영배씨의 증언입니다.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를 가르치며 박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때는 문경에서 12키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

전경숙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은 우리집으로 하숙집을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습니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셨습니다. 5학년 20명과 2학년 40명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습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천정의 거미줄,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왼비하여 가지런히 정리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 한 것을 매우 싫어 하셨습니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해 주시고´너희들도 이와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을 소풍때 문경새재에 갔을 때는 제 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 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 오시던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전도인씨의 증언입니다.
-"하루는 박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해도 무례하기 그지 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어서 나가봐 !"라고 내몰았습니다."-

황광실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

[(제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박정희는 일본인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와 배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성향은 대구사범 학생,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일제의 지나친 황민화 정책에 대한 반발심과 연결된다. 교사 박정희가 황민화 정책에 반발하며 조선인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제자들 증언에서 확인된다. -세계일보 "만주군 박정희를 보는 시각" 발췌-]

가까운 거리에서 박대통령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김종신씨의 말에 의하면 박대통령이 교사직을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서 묻자 간단하게 "왜놈들 하도 심하게 굴어 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라고 답했습니다.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청소년시절부터 가졌던 나폴레옹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군사학에 대한 공부욕구와 말단 교사로서 현장에서 당하는 일본인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과 위협이 문경에서 계속 교사직을 갖고 일하기가 힘들어서 무상 대학급 교육기관인 만주군관학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교사로서 의무복무를 마치고 만주군관학교 2기로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도 식민지 민족으로써 민족주의 신념을 키워 나갔다. 만주군관학교 역시 사범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차별이 심해서 박정희의 민족감정은 부추겨질 수 밖에 없었다. 만주군관학교시절1기생 이기건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발췌: 권장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독립군 색출 만주특무경찰,독립운동가들 검거해 고문한 헌병 오장,식민지 착취 상징 식산은행의 금융조합 서기,황국신민 의식화 및 수탈의 선봉 훈도야말로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일제의 주구들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먼저 인터넷상에 유포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혈서작성?
- 박정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지만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근거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입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됩니다. 실제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반박정희세력들은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과 문헌 사료를 북한 김정일과 남한의 친북세력 특히 방송과 언론들이 샅샅히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하였다?
③ 완전한 일본인이였다?
- 이런 글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개입된 평가들로 객관적인 평가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아전인수격 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직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판과 비난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요?.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이런 글에서는 박정희가 "요시"하며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주군으로 근무할 그당시 소속부대의 작전지역에는 독립군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 요즈음의 이름은 청더 (承德,승덕)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정희가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없었습니다.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의 기회주의자 청년 박정희란 글을 보면...


........ 중략 .............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 ‘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국내외 현재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해 항일세력 및 항일군대 운운하며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마치 조선의 독립투쟁과 관계있는 세력처럼 교묘히 속이는 조작에 관한 설명을 드립니다.

박정희가 만주군에서 근무할 1944년 당시에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같은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이 그들로썬 참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팔로군을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군대처럼 교묘히 속이기 시작합니다.

표면적으로 연변학계의 항일사료를 어쩌구하면서 내세우지만 말이 학계이지 그쪽은 완전 친북학계입니다. 북한 김일성,김정일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 역사왜곡의 동반자들입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했다 - 간도특설대 활동?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현재 박정희는 간도특설대 출신이란 저서에 대해 박대통령 유족이 고인에 대한 명예홰손으로 고소하여 재판중입니다.)

[간도특설대 1기생 이용씨 증언 "박정희는 간도특설대가 아니다"[세계일보 2006-08-08 07:12] go_newspaper.gif<!-- 끼워넣기 --><!-- 끼워넣기 --> aoo0808-01-2.jpg
그런 인물이 강원도 정선의 외진 곳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육군 소장, 강원도지사, 교통부 차관, 철도청장, 인천제철 사장….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그는 산골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은둔’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용(李龍·85),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이방인의 방문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그였지만, 서울에서 네 시간 남짓 자동차를 몰고온 취재팀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이렇게 6월 중순과 하순 취재팀은 두 차례 그를 방문했고, 다시 두 차례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와의 대화는 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이자 ‘역사 탐사’였다.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이력’이 있었다. 해방 전 이력, 구체적으로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1932∼45년)에서의 행적이었다. ‘간도특설대’(1938∼45년). 바로 일제가 만주에서 “조선인 항일세력은 조선인의 손으로 잡는다”는 목표 아래 친일파를 앞세워 만든 조선인 부대로,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부대 1기생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1938년 지원 당시 그의 나이 17세. 그는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조선인 부대라고 하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동기는 ‘순수’했는지 몰라도 군인이 된 그는 항일독립군과 싸우며 일제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됐다. 그렇게 만주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틀 속에서 출세를 도모했던 이들은 많다. 육참총장, 합참의장, 교통장관을 지낸 백선엽(87·간도특설대 출신)씨도 그 중 한 명이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휩싸여 있다.

대다수는 ‘옛일’을 속이거나 끝내 덮어둔 채 이미 세상을 떴다. 몇 안 되는 산 자들도 열이면 열 입을 다무는 현실이다. 그 시절의 선택과 행동이 떳떳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일까. 백씨도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 “골치 아프게 왜 옛날 일 갖고 그러느냐”며 끝내 만남을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이씨는 달랐다. 그 시절의 기억을 숨기지 않았다.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했다”(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제2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석범 회고·1987년 ‘만주국군지’)는 따위의 모순된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 시절을 고백했다. 그는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를 평가해 달라”는 요청에 그는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라”며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공은 공대로 평가하고 과는 과대로 밝히는 것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느냐”는 말에 “사실대로 밝히고 후세에 전해야지”라고 답했다. 이 같은 관점이 고백의 배경인 듯했다.

그는 다만 재중동포(조선족) 사회에서 간도특설대의 만행으로 전해지는 부녀자 성폭행,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군기가 엄한 부대로, 민폐는커녕 오히려 도와준 일이 많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분은 만주 보병 8단(團)”이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비밀광복군 활동설에 대해서도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간도특설대에 있었나.

“아니다. 없었다.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1944년쯤 베이징 부근에서다. 각각 팔로군 토벌작전 중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시 안투 명월구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자주 왔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분은 만주군 제8단 소속으로 활동영역이 달랐다. 간도특설대는 열하로 옮기기 전 백두산 밑 안투현에서 토벌을 했다. 토벌 대상은 김일성 부대였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건 거짓말이다.”

―그걸 어떻게 아나.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때 내가 그 부근(베이징)에 있었으니까.”

―간도특설대 창설 목적은 알았나.

“몰랐다. 한국 사람들로 이뤄진 군대라고 해서 갔다.”

―간도특설대에 죽 있었나.

“1938년 이등병으로 들어갔다가 42년 봉천(지금의 선양) 육군훈련학교에 들어가 44년 졸업하고 소대장(소위)으로 진급했다.”

―육군훈련학교에 다니는 동안 간도특설대를 떠나 있었던건데, 그 기간에 박정희가 왔으면 몰랐을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분은 8단에 있었다.”

―해방 후 행로는.

“해방되자마자 남한으로 왔다가 46년 4월쯤 다시 만주로 갔다. (왜 돌아갔나) 뭐, 고향이 거기니까. 모친도 거기 있었다. 그러다 남한 갔다 왔다고 해서 붙잡혀 옌지감옥에 갇혔다. 4개월쯤 살다가 노역장에 장작 패러 불려나갔을 때 탈출했다. 튀어본 사람이나 알지, 담을 넘어서 한 100m까지가 아주 무섭다.” -기사끝-]

⑥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 대통령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을 운운하는데 어쨌든 창씨개명으로는 친일파의 기준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⑦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박정희의 향수?
이것 역시 ② ③번과 같이 완전 아전인수격 입니다. 첨언하자면 박정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창군 멤버들이 만주군이나 일본군에서의 군 경력이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군대지휘관 이라 함은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이 없다면 임무를 잘 수행해 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가진 모둔 나라는 군지휘관 양성 전문 군사학교를 건립 운영하는 겁니다.

전쟁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선 지휘관의 판단 하나가 전 부대원의 생명을 좌지우지 합니다.
광복후 일본군대나 만주군대출신들이 국군에 들어간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수 없습니다.

독립군 출신들이 그자리를 전부 채울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당시 현실은 제대로 배운 사람들을 구하기 힘든 어려운 시절이였습니다.
간과해선 안될 것은 6.25때 다름아닌 그들이 북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싸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낸 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일파 숙청을 자랑하는 북한도 만찬가지 입니다 일본군 고급장교 출신들이 고위층 장성중에 여럿 있고 특히 공군의 태반이 일본군대출신입니다.

북괴가 민족정기를 위해 친일파를 다 숙청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관동군의 밀정이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한 때 김일성의 후계자로까지 부각되었던 사실과 김일성과 치정관계 내연녀였던 무용수 최승희가 일본군 위문공연을 숱하게 다녔으면서도 그의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요직에 중용되었던 사실, 그리고 6.25 때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논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하지 않고 납북해 간 일 등은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김일성한테 꺼림칙하면 친일파라 숙청하고 필요하면 넘어가고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친일파숙청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친일파 청산 작업은 공작이며 음모였다

-북한 고위간부 중요 명단 -

부주석 김영주 -만주군 통역 (김일성 동생, 김정일 작은아버지)
북조선 공군 총사령관 이활 - 나고야 항공병학교출신
-허민군 9사단장

-강치우 기술부사단장

-김기옥 제1연대장
-김한욱 제2연대장
-북한공군간부 20명은대부분 일본제국군출신, 10명 만군(만주군) 출신

-장헌근 사법부장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남로당 2인자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군은 문화선정성 부부상 :일본군 밀정

-김정제 보위성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북한이 처단한 친일파 명단

1)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및 그 추종자들: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의 간디 조만식> 선생을 처형시킨 죄목은 [친일 반민족주의자] 이다.
2)현준혁 ;
일제에 저항하던 사회주의 문학자, 김일성 보다 월등 뛰어난 지식으로 자신을 압도하자 [친일 분자] 로 몰아 처형

3)오산학교 출신들; 오산학교는 3.1 운동때 기독교 대표이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하신 학교다.
남강 이승훈선생 역시 말이 필요 없는 항일운동가.
항시 학생들에게 "공부열심히 해서 일본놈을 앞지르라 그래서 독립을 쟁취하라"하신 애국자 이시고, 수차례 옥고를 치루신 분이다. 김일성이 붙인 죄명은 [친일파 학교]

4)대성학교 출신들;
평양의 대성학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하신 학교이다.
이학교 출신들이 김일성 보다 명망이 크자 모조리 처형하면서 붙인 이름이 역시 [반민족주의 학교]

5)숭실학교 출신들;
오산학교나 대성학교와 같이 이학교 출신들을 무수히 사형시키고. 뒤집어 씌운 죄가 [반민족 친미주의]

6)박헌영, 이강국, 임화 등;
잘알다 싶이 남로당 이다. 모두 사형시키면서 뒤집어 씌운죄가 [친일파. 섹터주의자. 회색분자.]

7)허가이 일파; 김일성보다 좀 유식하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한 정통 이론가 이다. 하여간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 꼴을 못보는 김일성이 사형시키면서 씌운 죄가 가당치 않게스리 [미국 간첩] 모스크바 유학간놈이 미국 간첩이라니 김일성도 참 ...

8)윤공흠 일파:
사건이 크다. "당은 인민을 위해 한것이 무엇인가?" 하고 과감하게 김일성에게 대든 당시 "경공업 상(장관)"이다. 사형시키면서 뒤집어 씌운 죄가 [친일파]

9)김무정 일파.
중국 팔로군 포병 사령관이었던 무정을 죽이면서 뒤집어 씌운 죄가 [미국 간첩, 친일파] 일본군과 만주에서 죽어라고 전투한 사람에게 붙인 죄가 친일파입니다

김일성, 친일 인텔리도 간부로 등용했다
北 에 기록,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통역경력"
[2005-09-16 12:48]

▲ 중강지질탐사대 노동자들을 지도하는 김일성
1948년 북한 정권수립 이후 친일 경력자와 인텔리, 일본인 상당수가 정권기관과 경제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북한 역사서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지면서 남한 일부에서 제기해온 '북한은 완전한 친일청산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됐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조선전사』 현대편(23편) '민주건설사 1'에 의하면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중략),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주시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전사』는 김일성이 당시 과학자, 기술자, 문화예술인 등의 인텔리들을 인민정권기관과 중요 산업 기업소들의 책임적 지위와 그리고 교육, 문화, 보건 기관들의 중요 부서에서 일하도록 배치했다고 적고 있다.

또 이 역사서는 “지난날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고 일제기관에 복무한 데로부터 자신들에게 적지 않게 남아있는 부르죠아 사상을 뿌리뽑고, (중략) 맡겨진 혁명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해나갔다”며 인텔리들의 북한 사회에 대한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친일 경력을 가지고도 북한의 정권 중심부에 진출한 인물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권력 핵심을 장악했던 인물로는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 (金英柱)가 대표적이다. 김영주는 만주지역에서 일본 관동군 통역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는 해방 이후부터 70년대까지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로 행세해왔다.

▲ 김일성 동생 김영주
독립운동가 이용상 시인은 자신의 회고 글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장교 자격으로 항복한 일본군을 만났을 때 일본군 통역인 김영주를 만났고, 두 사람이 함께 중국군 부대에서 기거했다”고 증언했다.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 등 고위탈북자들은 “김영주가 중국 본토에 갔다가 관동군에 체포된 것은 사실"이라며 “북한 내부에서는 김영주가 어쩔 수 없이 이용당했다는 논리를 쓰면서도 관동군 복무사실은 철저히 숨겼다”고 말했다.

친일경력 김영주, 20년간 북한의 2인자로 군림
그는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일행위는 비밀에 붙여진 채 57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과장을 시작으로 권력 요직을 거치면서 7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에 이어 실질적 2인자 역할을 했다.

북한이 1948년 채택한 헌법에 따라 구성된 초대 내각 사법상에 임명된 이승엽은 전향 친일자 교육을 담당했던 대화숙(大和塾) 출신으로 인천양곡조합 간부를 역임했다.

친일파 건국 관련자료를 집필한 김원률씨는 “여러 사료를 통해 이승엽의 친일행위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승엽은 남로당 2인자로 남로당 중앙위원과 경기도당 위원장을 거쳐 48년 월북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서울시 인민위원장 직책을 가졌다.

이승엽은 1925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서 활동하고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 간부로 활동한 것으로 볼 때 그의 전향과 친일 행적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도 일제 강점기 시절 관료로 일정한 직위에 복무한 것만으로 친일인사로 등록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의 기준에서 보면 친일행위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 1981년 출판된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사전편찬위가 지난달 발표한 친일 인사 3090명의 명단에는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과 이름이 일치하는 경우가 42명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5명은 동일 인물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지만, 나머지는 동일인 여부가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 당시 조작된 남한 출신 대의원 360명이 포함돼 있어 친일 여부에 대한 검증을 확실히 거치지 않은 채 명단이 작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경제관련 인재 등용에서 김일성은 남한보다 더 실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김일성은 일본인과 일본기업에 종사한 기술자들을 우대했다.
남한의 미군정이 일본인 기술자를 대부분 일본으로 추방한 데 반해, 북한에서는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같은 사실은 6,70년대 남한 경제개발의 주역이었던 오원철 전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의 증언과 관련자료에서도 나타난다. 청와대 제2경제수석이었던 그는 북한의 경제건설과 관련, 매주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보고와 중요자료를 받았다.

오 전수석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일본인 기술자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당시 868명이었다. 이들 가족까지 합하면 2,095명이다.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4,000원,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에게는 생명과 재산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장한다는 신분증을 발부하고, 생필품과 주택을 포함해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

(오원철 저 제7권)
일본인 기술자에게 '노동영웅' 칭호, 특별대우
오 전수석은 "북한 당국은 1946년 흥남 비료공장에서 근무한 일본인 기술자 코 지치로(昆吉郞)씨를 '노동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 이후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도 울산석유화학의 폴리프로필렌 공장건설 때 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고 말했다.

북한은 1949년 실시한 ‘2개년 계획’의 경제 목표를 1944년도의 생산 수준까지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상황이어서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했다는 지적이다.

오 전수석은 “미군정은 일본의 기술을 무시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소련은 일본인이 운영한 공장과 기술진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면서 “김일성도 일본인과 이에 협력한 기술자들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 기관이 완비되기 이전, 해방 직후에는 상황이 달랐다. 1945년부터 1946년 초까지 해방 이후 소련 군정이 들어선 기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계급투쟁이 급진적으로 진행됐다. 일제 시대 지주, 공직자, 공장 간부, 친일 부역자뿐 아니라 재산을 소유하거나 일정한 직위를 가진 인사, 인텔리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탄압을 받았다.

이후 1946년 3월 토지 개혁과 국유화, 선거를 거치면서 일제 강점기 토지와 재산, 공직을 가졌던 인사 대부분이 각종 권리와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 과정에서 절대 다수가 남한으로 내려왔다.

황장엽 전 비서에 따르면 실제 북한은 건국 이후 친일 청산을 할 것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가 1948년 따르면 황해도의 각급 인민위원회의 구성만 보아도 노동자 농민이 83%, 사무원이 7%, 수공업자, 상인이 9%, 중소기업가와 기타가 1%를 차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행된 친일파 청산 작업은 구체적인 사법적 절차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국내 우파 진영에서 북한의 일제 청산 작업을 신뢰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한 친일파 청산, 역사기록으로 안 남겨

나라정책연구원 김광동 박사는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담론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실제 법령과 재판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르주아 계층을 타도해 소비에트화를 완성하기 위해 친일 명분을 내세운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인 조만식도 불순분자, 친일파로 낙인을 찍어 숙청해버린 것처럼 정적(政敵) 제거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친일파 청산은 사실상 구호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따르면 “지방인민위원회들로 하여금 진정한 인민의 정권기관으로서의 자기의 임무를 옳게 수행하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그 안에 기여든 친일파, 민족반역자 등 불순분자들을 적발 숙청하기 위한 투쟁이 힘차게 벌어지게 되었다”고 말해 정권기관에서 친일 행위자를 추방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조만식과 그 일당을 비롯하여 지방정권기관의 일부 책임적 지위에 기여들었던 불순분자들은 사업을 고의적으로 태공(사보타주)하면서 인민정권기관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의 파괴하기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날뛰었다”고 기록했다.

임시인민위원회 20개조 정강 '친일잔재 청산' 천명

1946년 3월 23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에 첫 번째 조항 ‘조선의 정치경제생활에서 과거 일제통치의 온갖 잔재를 철저히 숙청할 것’을 밝히고 있다.
1945년 11월 15일부터 17일 사이에 열린 북조선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김일성은 라는 연설에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하고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각 정당들과 각계 각층 인민의 참다운 대표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연설 기록이 남아있다.

북한 정권 기관이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을 합리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비판의 소지가 크다.
이처럼 남과 북이 모두 일제 하에서 일정한 지위와 부를 누렸다 하더라도 사회발전에 필요한 인재들은 중용한 것을 볼 때, 이번(민족문제연구소) 친일 인명사전에 일정한 직위를 갖거나 일제의 정책에 동조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인사에 포함시킨 것은 사회발전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한 편향된 인식의 결과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

⑨ 박정희 그는 대통령으로써의 친일적 언동했다?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그때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요? 옛날 일제시대 자기를 가르친 일본인 선생을 만나 듣기 좋은 소리 좀 했기로소니 그게 전부 친일입니까?

못 먹고 사는 국민들을 먹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 가난한 나라로서 손을 좀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인데 지도자면 국민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것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공적 사적 외교석상에서 노통처럼 나오는 데로 막말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언행일까요?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습니다. 하물며 반미면 어떻냐?는 노통이 취임후 정작 미국가서는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⑩ 박정희 대통령으로서 친일적이며 굴욕적인 한일협정체결했다~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3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합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의 국고는 14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위 조건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즉 80억달러 주겠다는데 박 대통령이 이렇게 받았겠습니까?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일본이 그렇게 주겠습니까?

더우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승전국의 위치가 아니였습니다.
배상금이라는 것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주는 겁니다. 일본은 협상하는 동안 시종일관 배상금이라는 이름보다는 경제협력금,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수교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미국한텐 패전국이지 어부지리로 독립 얻은 한국에겐 패전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협상의 출발부터 우리나라에게 유리한 협상카드는 별로 없었습니다.

한일협정 성사 배경에는 사실상 미국의 압력이 주효했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통합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서둘렀다는 것이죠 그들은 우리나라한테 일본에서 자꾸만 시비를 거는 독도에 대한 고유영토권을 포기하라고까지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다 대노할 정도로 미국의 조속한 한일수교협정체결 압력이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참고-韓日 독도 공동소유 美제안, 박정희가 거부"

1965년 박 전 대통령이 일축 ,,, 미 국무부 외교문서 확인
신용일 기자


한일협정 당시 독도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팽팽히 맞서자 미국이 협정 체결을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한일 공동운영 등대를 독도에 설치하는 안을 제시했다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사실이 최근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은 363호에서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 대통령을 1965년 5월17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했다.
이튿날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한일 양국이 독도를 공유하며 천천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공동 운영 등대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있을 수 없는 일(Just would not work)’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미국은 주한미군 유지비가 한일협정 타결로 줄어들기를 기대했으나 독도문제가 협정 타결에 장애물로 대두하자 독도에 이같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는 로버트 W. 코머 미 국가안보위원이 1964년 5월19일 존슨 대통령과 특별보좌관 등에게 보낸 메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코머는 “우리는 한국민 2,000만명을 위해 연 3억달러를 지출하고 있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떡하든 한일협정을 타결시켜 일본돈이 한국으로 유입돼 주한미군 주둔경비가 감소되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협정이 성사되도록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 존슨 행정부가 독도문제에 대해 한국에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독도문제를 한일협정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박 전 대통령의 단호한 입장은 1965년 6월15일 윈트롭 브라운 주한 미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364호 문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브라운 대사는 문건 364호에서“독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자 박 대통령이 ‘만일 일본이 독도에 대해 계속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면 장관급 회담은 무의미하다.
만일 일본이 우리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김동조 대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권을 갖고 있기에 그같은 회담은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일본과의 협정 그 어느 곳에라도 독도가 언급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한국의 입장은 명백하다”고 재확인했다.]

돈 몇푼에 우리땅 독도를 폭파할려고 했다 삼국조정 어쩌구 하면서 독도를 넘길려고 했다며 국내 진보좌익 세력들이 끈임없이 인터넷을 통해 온갖 음해와 모함를 자행해왔지만 역사의 진실은 이렇게 미국과 일본의 큰 압력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은 독도를 끝까지 배타적 경제수역 (EEZ) 우리땅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단지 국제분쟁화 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술책에 직접적이고 감정적 대응을 자제한 정책기조를 선택했습니다. 독도영유권에 정작 큰 문제를 야기한 것은 신한일어업협정을 맺은 김대중정권 그것을 계속 연장해준 노정권입니다


60년대 그당시 냉전시대의 강대국의 논리가 없었다면 과연 일본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한테 돈을 주면서까지 수교를 할려고 했을까요? 미국의 압력이 컸다는 것은 이미 뉴스에 보도되어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되는 문제의 수준이 아니였습니다 약소국의 비애라 하겠지요

진보좌익들에 의해 박정희 정권이 독단적으로 식민지 피해에 대한 개인청구권을 포기했다고 유포된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받아내기 힘든 개인청구권 대신 국가가 대신 받는 정책으로 선회한 것은 이미 516혁명전의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부터 있었던 겁니다.

개인청구권이란 개인이 일본정부와 재판을 해서 배상받는 것인데 실제로 배상받은 사례는 거의 잘 없습니다. 일본이 주장했던 것은, 서류로 증빙할 수 있을 경우나 객관적 사실확인이 가능한 경우에만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고, 하지만 우리는 6.25같은 전쟁 문제도 있고, 모든 부분을 세세히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정부는 그런 개인 보상도 포함해서 국가가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이라든가 하는, 국가와 개인을 포함해 포괄적으로 청구권을 행사하겠다는 태도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결코 일본 정부가 인심좋게 식민지배로부터 피해를 본 조선국민 개개인에게 광범위하게 구체적으로 넉넉히 피해보상을 하겠다는 것을 국가가 가로챈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할 기술도입과 경제개발 종자돈을 베팅할 시기를 놓쳐야한다니....?
그당시 아사자 동사자 전염 병자 비일비재하는 최빈민국가에서 할수 있는 최선책였을까요?
회담이 성사된 후 박정희 정권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종자돈을받아 투명하게 충실히 모범적으로 사용하여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지금보면 긍정적 평가가 국민적인 대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금액은 보는 관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수십억달라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라니..? 논리적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박정권의 비리를 캐기 위해 만든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으로 조사에 참여한 이원덕 국민대 교수의 글 인용합니다
-세간에 의혹과 억측이 난무했던 한.일회담 관련 한국 정부 외교문서가 한 장도 빠짐없이 그 전모를 드러냈다. 한.일회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본조건이 비로소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 자격으로 3만5000여 장에 이르는 외교문서의 공개 검토작업에 참여했던 필자는 한.일회담을 '대일 굴욕 협상' '매국외교'라고 단죄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오히려 필자는 악조건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난적 일본을 상대로 당시의 박정희 정부가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로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결실은 거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노정권이 위촉한 학자로 조사하러 들어간 사람이 이런 평을 한 것은 박 대통령이 역사앞에 당당한 승리자라고 할수밖에 없습니다.)

- 위 사항은 정책결정사항이며 이러한 정책결정사항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한다면?

현대적 개념의 국토는 땅 하늘,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땅 독도는 현재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해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독도가 국제법상 일본에게도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일본이 독도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탁할려고 혈안이죠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노무현대통령은 DJ정권의 해수부장관출신입니다.)당시에 이뤄어 졌습니다. 그럼 김대중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완전 개방하고 신한일어업협정 연장하신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친일파로 치자면 누가 진짜 친일분자인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진보좌익들은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자금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 대통령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 대통령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이단체는 박 대통령을 그들의 역사적 상상과 가정에 따라 신친일파로 분류했습니다. ~내용:이단체는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단체의 상상과 가정에 의한 설정에도 간도특설대이니 독립군 토벌과 같은 언급은 없음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

- 민족문제연구소 : 박정희를 친일파로 주장함. 박정희 생애에 대한 왜곡된 만화를 편찬하고 여당의원 선친을 뺀 친일인사명단발표를 함으로써 박 대통령을 대표적 친일파라 규정함 그러나 친일파로써 어떤 구체적 반민족행위를 했는지? 실체적 근거나 규명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 대통령의 친일논란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 내근직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일본육사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

조선인 중에 박정희 혼자만 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편입한 것도 아니고 역사를 극단적인 흑백논리로만 따진다면 일군 중위 까지 하다 망명하신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이나 중국의 장개석도 일본의 육사를 다녔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도 친일파가 되는 것인가요?

중국사람들은 장개석을 친일파라 얘기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그의 평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해본다면 자신의 조국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진정한 극일파였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의 지역감정 유래--

60년대 호남사람들이 선거때 박정희대통령한테 50프로 이상 표를 준 사실을 아십니까?

(김정렴 비서실장의 말 )

과거부터 유력정치인중 하나가(김대중) 호남을 차별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다녀서 지역감정 그것이 마치 사실인양 되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발 정책면에서 얘기를 해 보죠.

우리는 그 당시 일본에 대해서 100년 이상 뒤떨어져 있고, 미국, 영국에 대해서는 200년 이상 뒤떨어져 있는 데다 자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공업화하느냐, 이것이 초미의 과제였습니다.

그럴려면 가장 입지가 좋은 데다 공장을 세워야 되거든요. 우리 한반도를 보면 제일 좋은 곳이 동해안이고 남해안입니다. 단애가 져 가지고 바다가 급히 깊어져요. 그리고 남해에는 섬이 많고, 섬이 있으니 방파제의 필요가 훨씬 덜하고 준설도 많이 할 필요 없이 항구가 되죠. 더욱이 거긴 일제 때부터 도로와 철도가 발달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서해안의 경기도, 충남, 전북, 전남은 수심이 앝으니까 여기 10만 톤, 25만 톤 급 항구를 만들려면 이만저만한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철도도 장항까지 가는 것과 호남선 이외에는 안 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해안 따라서 도로가 없고 제한된 돈으로 일은 빨리 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남해안하고 동해안에 개발의 중점을 둔 겁니다.


당시 국토 개발 계획이 있었죠. 건설부 산하의 국토연구원이 있어서 주원 건설부장관이 국토 계획의 전문가였는데 지금 말씀대로 강원도는 관광자원, 수산자원 정도지 여기다 공장을 넣지 않는 것이 좋다 하는 식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경제권을 몇 개로 나누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하고 난류가 대한 해협에서 교체가 된단 말이에요. 그것이 부산 울산 포항 쪽입니다. 그러니까 공장을 거기다 지어서 오폐수를 쉽게 내보내고 특히 공해 많은 온산 공단에 들어간 유해 공장의 폐기물도 해류가 거기서 되돌아오니 거기에 넣어도 되었던 거죠. 하지만 서해 바다는 기껏해야 간만의 차이뿐이고 옆으로 크게 흐르지 않아요. 경기도, 전북, 전남 해안에 섣불리 공장을 지었다가는 해수가 들락날락만 하지 옆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조개고 뭐고 다 오염이 됩니다. 그 때 돈만 있었으면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 돈이 있었으면 더 급한 데 썻겠지요. 이것은 한마디로 우선 순위의 결정과 요충식 경제 개발의 불가피성 때문이었습니다.


선거 때마다 ‘호남 푸대접이다’ 하며 표가 떨어진다고 야단이었는데 왜 안 하려고 그러셨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유세 때 전주 광주 가셔서 ‘공업화 안 돼서 당신들 안타까워하지만 나중에 두고 보시오. 다른 데서 공해로 시달릴 때 당신네들은 더 깨끗한 공장 지어 가지고 나중에 더 잘산다’ 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경제 개발 정책상 할 수 없었어요. 그 대신 무척 애쓰신 것이 종합 제철을 광양에 갖다 지으신 것과 여천 석유화학 단지를 들 수가 있습니다. (........)

김정렴 정치회고록 발췌

박정희는 원래 만주군관 학교 출신이고요. 거기서 수석 졸업을 해서 일본 육사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도 박정희를 두고, 일본인을 이긴 조선인이라 하여 조선의 자랑으로 여겼죠. 무슨 친일파니 매국노니.. 그따위 평가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자부심 넘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손기정 선수 아시죠? 일본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나가서 일본에 금메달을 안겨주잖아요. 그래도 조선인들은 조선인이 왜놈들 보다 잘나서 조선인의 기상을 보여줬다고 떠받을었죠. 박정희도 마찬가지였습니다.박정희는 일본군으로 잘못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 하급장교로서 근무했으며 그의 비중은 크지 않았습니다.(만주국은 일본국과는 좀 다른 나라였죠. 뭐~ 괴뢰국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겉으로는 오족협화의 기치를 내세운 그런 나라였습니다.)

먼저 독립군 토벌 광복군 토벌이니 뭐니 하는 건 전부 근거 없는 날조이고요. 천황 혈서 충성맹세 같은 것도 아무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특히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도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중측에서 날조한 것으로 드러났고, 김대중의 창씨개명이 도요다 다이쥬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러한 정치공작도 쏙 하고 들어가버렸지요. 당시의 창씨개명은 조선인 80% 이상이 한 것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부친도 했었던 것이고요. 별로 친일이니 매국의 증표가 될 수는 없지요.

그리고 5.16은 정변이 아니라, 명백한 혁명이고요. 당시 윤보선, 장면 정부는 무능과 부패의 절정을 달렸는데.. 박정희가 빈농의 아들인 것에 반해 윤보선은 친일명문벌열가문 출신이었고요. 장면도 역시 김구 선생의 지시로 반민특위가 작성한 친일파 살생부 268인 중에 한명으로 등재된 악질 친일파였죠. (박정희 해당없음)

4.19로 자유당 정부가 무너진 이후 장면 내각이 출범하는데... 비참한 민생은 내팽계치고 10번도 더 개각이 이뤄지죠. 이유는 바로 장관 자리 하나씩 해 먹으면 가문의 영광이요, 국가에서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처럼 코드정치다, 보은인사다.. 하면서 전부 다 해 처먹었죠... 박정희가 5.16 혁명을 일으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심판합니다. 5.16으로 인하여 장면,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진짜 친일파 정권이 무너지게 된거죠. 그런데 왜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냐고요?

당시 4.19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회가 5.16 지지성명을 발표하죠. 그리고 장준하 선생께서 5.16은 4.19 정신을 이었다며 칭찬하게 되죠. 이처럼 학생, 대중, 지식인 너나 할 것 없이 5.16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4.19 정신의 계승이라 칭송했습니다. 군사정변??? 5.16때 아무도 안 죽었습니다. 대규모 교전도 없었죠. 그래서 5.16을 무혈혁명이라고 합니다. 즉 구국의 결단으로 이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불순한 무리들은 5.16을 폄하하며..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고 하는데.. 이후 혁명공약을 내걸어 모두 완수하고, 민정이양을 거쳐 직접 선거로 대통령직에 당선됩니다. 당시 서민이었던 박정희와, 친일벌열가문의 후예인 윤보선이 경합을 벌이는데.. 간발의 차이로 박정희가 당선되게 되죠. 즉 국민들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박정희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통치설은 터무니 없는 억지이며 반박정희 세력이 퍼뜨리는 유언비어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박대통령의 유가족인 박근혜씨의 증언을 올립니다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임종조차 못했던 자식으로서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아버지께서 여한없이 눈을 감으셨으리라는 점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믿음에 변화가 없습니다."

▶여한이 없으리란 뜻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그 무렵 국가를 위한 자신의 설계를 거의 다 이루었다는 생각을 하셨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끝은 우리 겨레의 5천년 한을 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어떻게든 경제자립과 자주국방을 이루어 가난과 외침에 시달려온 민족의 한을 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미국의 조직적인 방해를 무릅쓰고 핵개발을 추진 중이었으며, 우리가 핵을 개발함으로써 전쟁 억지력이 생겨 북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78년 9월26일 우리 힘으로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여 세계 일곱번째의 보유국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고, 그날 쓰신 일기를 보면 “자주국방과 조국근대화작업이 완성단계로 접어들었다. 흥분과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당시 최규하 총리를 후계자로 생각하셨던 것은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저에게 여러 번 “최총리가 하면 잘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분의 경력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시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81년까지는 핵개발과 정부이양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오늘 우리나라는 혼란없이 선진국 대열에 섰을 것입니다."

-- 후진국에서 경제건설과 민주화가 양립가능했겠는가? --

(산업화에 민주화를 동시 추진, 성공한 예는 없다)

이론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 산업화의 성숙단계에 도달한 대부분의 서구국가들에서
그것은 경험적으로 실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화의 초기단계에서도 이들 국가들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추진하거나 「선민주화, 후산업화의 길을 걷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이에 대해 선발 산업화국가들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정치혁명(시민혁명)과 경제혁명(산업혁명)을 순차적으로 겪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험을 보편적 「모델」로 삼아 많은 후속국가들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단선적 발전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 내지는 순차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편견이거나 도그마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참정권의 범위가 얼마나 제한적이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등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영국도 산업화를 어느 정도 성숙시킨 연후에야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후속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특히 그 범위를 후발 산업화 국가들과 그 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로 한정시킬 경우 그 예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 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세계에의 수많은 권위주의 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과 성격에 주목하게 된다. 국가개입이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국가개입이나 역할에 있어 정도의 차이를 낳는가. 경제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은 산업화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을수록 일반적으로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후발 내지 후후발 산업화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역할이 큰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발전지향형국가」라는 개념이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발전지향형 국가는 단순한 권위주의체제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보아 권위주의 하에서 경제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경우는 국가가 사회 내의 제계급(지배 및 피지배계급 모두)으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이면서도(그 국가가) 발전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정책적 및 제도적 능력을 갖추었을 때뿐이다. 이런 특징을 갖춘 국가를 「발전지향적」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관찰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발전의 예는 모두 그 국가가 「발전지향적 권위주의」체제였기 때문이지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였기 때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는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는 명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선산업화 정책은 정당했다

이렇게 볼 때 산업화의 초기 단계인 1960∼70년대, 특히 그 초두인 1960년대 전반의 한국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란 두 가치는 병행추진이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박정희 체제의 가치 선택은 발전이었고 그 선택은 현실성이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민주를 선택하여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룬 선례가 없다는 경험적 근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민주라는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만약 굶주림이나 절대빈곤과 배타적 선택관계에 있다면 생각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과정에서 생긴 고노동,저임금같은 노동권의 취약성과 환경권관한 문제는 우리나라의 초기 산업개발 당시부터 개발 우선 정책집행 과정상 당면한 고노동 저임금 및 반환경적 요소를 용이하게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쉽게 간과했고 넘어갔다면?
박정희식 경제개발 모델을 비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60년대 내수시장이 열약한 상태에서 수출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상태에서 기술도 없고 자본도 별로 없는 초기 개발 단계에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분야는 상식적으로 많지 않고 선진국보다 값싼 노동력에 의존한 제한적 선택일수 밖에 없다. 박정희의 겯제개발이 바로 노동자 억압으로 주장하는 지금 좌파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저노동 고임금과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천연자원과 산업자본의 취약성을 극복해 짧은 세월안에 산업화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의 신빙성을 보여주는 선모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발산업국가도 후발국가도 산업화과정에서는 모두 고노동,저임금이었고 친환경적이지 못했다. 적절한 노동과 임금은 산업화가 어느정도 진척된 이후에 노동자들의 투쟁과 국가의 노동복지정책 즉 국가환경정책으로 위상이 올라간 것이 그간의 세계사이며 환경권도 마찬가지이다.
더우기 경제개발시대 공무원 및 기업가들의 유착과 연결된 반노동권적 정책 집행 및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의식 부재와 결여에서 파생한 크고 작은 사건 사고까지 모두 박정희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이성적인 역사인식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민주는 그 의미가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적어도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민주보다 발전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이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발된 것이 바로 박정희 집권하의 1960∼70년대이다.

몹시도 배고팠던 시절, 남북대치상황에서 안보불안도 컸던 시절.
경제건설을 통한 산업화 근대화가 이룩되고 나면 그 토양위에서 우람하고 튼튼한 민주주의가 자리잡는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은 옳은 것이라고 판단한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과연 노동자 농민의 희생뿐인가?

"한국경제 약자의 희생만으로 성장했다는 교과서 서술은 잘못"

이름 : 자유주의연대 날짜 : 2005-04-28 10:34:36 조회 : 81

파일 : img_nophoto2.gif

img_nophoto2.gif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한강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렸던 한국의 경제 성장은 노동자의 저임과 농촌·중소기업에 대한 차별을 바탕으로 했고, 그 결과 극심한 소득 격차를 사회문제로 낳았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그처럼 쓰고 있다.
경제사학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29일 열리는 ‘교과서 포럼(상임대표 박효종)’의 ‘중·고등학교 경제 관련 교과서 이대로 좋은가’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교과서 서술이 객관적인 통계 수치를 무시한 오류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큰 논란이 예상된다.
이 교수는 미리 발표한 논문에서 현재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사용 중인 경제 관련 교과서 8종을 검토하고 “한국 경제가 이룩한 성과와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과서 포럼은 지난해 일부 고교 역사 교과서가 한국 현대사를 분단 고착과 독재, 성장 과정의 독점이라는 ‘실패의 역사’로 본 것을 비판하며 태동했고, 지난 1월 주요 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사를 “기본권의 신장과 삶의 질 향상, 정치 권리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저임금으로 성장했나?… 노동생산성 만큼 임금도 올랐다경제학적으로 ‘저임금’이란 노동생산성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과서는 1970~90년 동안 노동생산성은 729% 증가했는데 임금은 436%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를 확인하면 제조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부분만큼 착실히 상승했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노동의 한계생산성 증가율과 임금의 증가율 그래프는 완전히 겹치는 양상을 보인다. 노동 생산성만큼 임금이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 중소기업 희생시켰나?… 지난 40년간 中企 10배로 늘어 한국의 중소기업은 1980년대 이후 대기업과 계열관계를 강화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 중소기업 수는 급증한 반면 대기업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1961년 137개였던 대기업은 1988년 1318개로 정점에 달했다가 2002년 670개로 급속히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은 1961년 1만5067개에서 2002년 10만8819개로 10배 증가했다.
1970년 10%에 불과했던 대기업에 대한 중소제조업체 수급비율은 70%로 상승했다. 대기업은 경기 변동에 따른 신축적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중소기업과의 연계 강화로 노동·자본의 감축분을 대체하고 있다.

◆ 소득 분배 불균등했나?… 소득분배 수준은 국제적 모범생 소득 분배를 나타내는 지표는 한국 경제가 국제적으로 ‘소득 분배의 모범생’임을 보여준다. 소득 분배 수준을 나타내는 ‘10분위 분배율’ 지표에 따르면 1996년 한국은 0.558로 국제적으로 덴마크(0.710) 다음으로 양호하다.
한국은 미국(0.338)은 물론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네덜란드(0.526)보다 소득 분배가 균등하다.
소득 분배 구조의 악화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부터이다.
◆ 농촌경제 차별했나?… 쌀값 보전 등 보호정책이 더 많아 한국의 농업은 오히려 지나친 보호를 받아 왔다.
쌀값은 국제 수준보다 5~6배 높은 수준으로 계속 인상됐다. 농산품 가격은 1960년대 이후 공산품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인상됐다.
2000년을 100으로 할 때 공산품은 1965년 300에서 현재 80~9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농산품은 30~ 40에서 120~130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한수기자 hslee@

-국내 진보세력들이 펌하한 새마을운동 세계가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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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배우라고 3년간 3만명의 공무원을 한국에 보낼 것이라고 한다. 장기적으론 공무원 35만명을 한국에서 硏修연수받게 한다는 것이다. 지난 2월엔 후진타오 주석 등 최고지도부가 31개 省성·市시 간부 200명과 일주일 合宿합숙하면서 새마을운동의 역사와 성공요인을 학습했다. 중국은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했지만 농민 소득이 도시 근로자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都도·農농격차로 고심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한국 새마을운동이 낙후한 농민·농업·농촌의 ‘3農농문제’를 극복해낼 정책 모델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의 농촌부흥운동을 배우기 위해 몽골,베트남,라오스,필리핀,말레이시아,태국,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가 우리 새마을운동을 배워가고 있다. 새마을 관련조직과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연수받고 돌아간 각국 공무원과 농민이 160여개국 4만명에 이른다. 북한 김정일조차 새마을사업이 한국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바깥 시각은 이런데도 정작 나라 안에선 새마을운동이 ‘장기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농촌의 겉모양을 바꾸는 데 置重치중했다’고 쓴 근·현대사 교과서를 토대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 그 교과서가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대중의 열정을 끌어내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커다란 역할을 한’ 성공적 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중국의 開放개방과 발전 지향의 사회주의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한국 守舊수구 左派좌파의 눈엔 거꾸로 보인다는 말이다.

정부는 새마을운동 첫해인 1970년 3만5000개 마을에 335부대씩 시멘트를 나눠주면서 마을길 넓히고 다리 세우고 창고를 지으라고 장려했다. 이듬해엔 성과가 좋았던 1만6000곳을 골라 시멘트와 철근을 추가로 나눠줬고 성과 없는 마을엔 지원을 끊었다. 경쟁을 통해 농민들의 마을 살리기 의욕을 북돋운 것이다. 국토균형발전이니 뭐니 해가며 행정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라고 해서 곳곳에 국민 稅金세금만 뿌려대는 이 정권과는 달랐다.

중국이 우리에게서 배운 새마을정신으로 사회통합을 이루고 그걸 디딤돌 삼아 압도적 경제력으로 한국시장에 밀고 들어올 때 ‘새마을운동 깎아내리기’에 골몰했던 사람들은 모두 꽁무니를 내리고 시치미를 뗄 게 분명하다.



[펌] 박정희를 다시 생각하며...

저는 젊은 20대의 경제학을 전공한 여성입니다.
태어날때 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 "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 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라. 한국인의 후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준다"라며 경멸했습니다.
대학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은 내가, 박통교에 빠져있는 무식한 늙은이들과 보수꼴통들을 깨우치게 만들고 계도해야 겠다는 책임감까지 느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파시스트 악마였고 박정희야말로 한국을 망친 챙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알게 되고 "그래도 대단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구나" 정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경제발전은 다른나라도 다 이루는 것이며 오히려 정경유착과 재벌만 키운 나라를 망친 경제발전이었으므로 박정희시대의 경제발전은 IMF의 원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시야를 넓혀 외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입니다.
한국이 당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신생독립국들 중에 한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국가가 앞서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과거 조공국가였던 중국도 너끈히 누르고 경제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윗세대들은 "보수 꼴통"이 아니라 한국역사상 가장 급격한 발전을 일으킨 "위대한 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 정치인들이 박정희를 어떻게 보는 가를 알게 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중국 최고 인기 정치인인 등소평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등소평이 박정희모델을 추종해서 따라하고 포항제철을 부러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캠브리지의 수재이자 싱가폴의 아버지인 리콴유를 알게 되면서 리콴유가 박정희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똑똑한 촌철살인 발언으로 아시아의 입으로 불리는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정희처럼 되고 싶다. 말레이시아 비전인 "look east policy"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어법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도 "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 라며 흠모하고, 지금도 몽골, 카자흐스탄 대통령등등 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 박정희를 대단하게 평가하며 따라하려고 하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흔들렸습니다.
내가 "파시스트 악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후진타오가 이례적으로 박대표를 만난 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졌지만 후진타오는 대학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직접 공부까지 한 사람이고, 후진타오 이외에도 중국정치인들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읽고 따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너무 궁금해 하여 중국대학에 수업에 박정희 강좌를 개설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무시했던 "새마을 운동"은 후진국들의 성공적 발전모델로 인식되어 이라크, 몽골, 콩고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한국에 새마을 운동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냐?라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만큼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독일은 원래 부자나라였지만 한국은 전쟁을 겪은 이후 잿더미에서도 저렇게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후진국들에게 우리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외국의 경제학 책들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최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 불평등 정도도 낮으면서 100년 걸리는 산업화를 20년 이라는 단기간내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전쟁국가에서 20년만에 제철, 자동차, 조선업을 생산해 내는 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경제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불릴만 하다 "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

젊은 세대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외국에서는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하고있는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업적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에 대한 지나친 "숭배"나 "영웅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도로를 짓고 혼자서 공장을 돌리고 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발전이 국민들의 노력만으로 저절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무식한 소리입니다.
경제발전에서는 리더의 역활이 대단히 중요하며, 특히 농업국에서 중공업 위주로 산업이 재편성 된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이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이대근, 안병직 같은 과거 좌파경제학자들까지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표의 지지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님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께, 철없던 시절 아버님을 미x듯이 욕하며 저주했던 저의 무식함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경제성장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 진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외국에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외국배낭여행을 가서도 'south korea'라고 하면 무시받지 않고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추진력, 그리고 윗세대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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