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제철소 노동자 폭동사건

폴더짱 작성일 13.12.14 19: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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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제철소 노동자 폭동사건 - 이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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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냉이를 바꾸다가 총살당한 제철소 간부들

나는 북한을 脫北(탈북)해,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에 귀순한 이춘구이며, 나이는 35세, 고향은 황해북도 황주군이다.

귀순하기 전 내가 북한에서 겪었던 굶주림과 허덕임은 이제는 잊혀지는 듯하다.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북한 황해북도 송림시에서 1998년 8월에 일어난 황해제철소(황해제철연합기업소) 노동자들의 폭동사건이다. 이 폭동을 진압하는 북한당국의 非인간적인 만행은, 세월이 흘러가도 역사의 갈피 속에 영원히 피로 얼룩져 있을 것이다.

1998년 8월 초에 나는 혹심한 식량난을 이기기 힘이 들어 송림시에 살고 있는 이모네 집에 거처하게 되었다. 송림시는 북한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제철소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종업원은 거의 10만 명이나 되어 노동자 인구밀도도 높은 것만큼, 이모의 보따리 장사가 괜찮게 되어 우리 가족이 의지하게 된 것이다.

황주군에 있는 집을 버리고 처와 자식, 나 셋이서 이모의 물고기(생선) 장사도 도울 겸, 죽물이라도 얻어 먹게 되니, 그때 이모와 이모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이모부는 황해제철소 자동화 직장(공장내 생산라인)에 출근하고 있었다.

이 시기 북한 어디나 사정은 마찬가지였지만 노동자들이 꽉 들어차 생활하는 송림시에서도 한달치 배급 식량으로 하루 이틀치 정도에 불과한 옥수수 가루를 공급하여 먹거리 때문에 난리가 일어났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노동자들이 출근하지 못하니 각 직장들마다 생산을 제대로 할 수 없어 공장의 생산 실적은 말이 아니라고 했다. 이모네 집에도 일 나가지 못하는 이모부를 설복하려고 공장 간부들이 몇 번 다녀갔다. 직장 간부라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장군님께 충성하자"는 말마디들을 늘어놓자 이모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1998년 8월10일 쯤이라 생각한다. 온 송림시 안에 퍼지는 소문에 의하면 다음날 시 안에 설립한 공설운동장에서 8명의 황해제철소 간부들을 총살한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제철소 지배인과 책임비서가 토의하고 후방담당 부지배인과 업무담당 부지배인을 비롯한 회사 간부들이 주동이 되어 노동자들을 먹여살릴 대책을 토의하였다 한다.

회의에서 토의된 결론은 한 가지 방도로 중국에 압연 철판을 넘겨 강냉이로 바꾸자는 결론이 나왔다. 제철소 책임비서와 지배인은 북한 지도부에서 알아 주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들이고 고위 권력층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黨 중앙에 보고하여, 처리하게 되어 있는 이 일을 제철소 간부들만 알고 외부가 모르게 처리하도록 대책을 세웠다.

위에 보고하면 군수용이요, 뭐요 하면서 승인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이렇게 일처리를 하게 된 것이다.

회의에서 당 책임비서와 지배인은 "우리가 뭐 반동 노릇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들을 먹여 그들이 생산에 참가함으로써 철 생산을 하자는 의미"라고 해설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도록 간부들에게 오금을 박았다 한다.

그리하여 황해제철소 전용 어선으로 남포항에 나가 있는 배를 이용해 중국에 압연 철판을 싣고 가 강냉이로 바꾸게 되었다. 제철소 후방 부지배인을 위시하여 판매과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직접 배에 타고 가서 중국과 교섭하였다.

이 내막을 배에 타고 갔던 노동자들은 구체적으로 알 리 없었다. 싣고 갔던 압연 철판으로 바꾼 강냉이를 한 가득 싣고, 이들이 남포항 부두에 배를 정박하는 순간이었다.

 


義人 8명의 총살 현장

뜻밖에도 권총을 꺼내 든 사복차림의 젊은 사나이들이 배에 뛰어 오르며 신분증을 보였다. 신분증에는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라고 찍혀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북한 당국의 직접 지시를 받아 움직인다는 현대판 북한 암행어사들인 것이다.

이들은 배에 타고 있던 일행을 전원 체포하여 포승줄로 묶어 북한에서는 보기 드문 승용차에 싣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비밀에 부쳐졌던 이 사실을 보위부가 어떻게 알았나 하고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가서 알고 보니 누가 이 사실을 고발하여 일이 벌어진 것이라 하였다.

이 내용은 그 배에 탔던 영문을 모르는 노동자들이 풀려나와 증언한 것이었다. 누가 고발했냐 하는 노동자들의 격분에 찬 음성이 온 거리에 쉬쉬거렸다.

아울러 어느 거리 골목에서도 노동자들을 위한 제철소 책임간부들의 용단을 두고 주민들의 칭찬어린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다음날 아침 9시 시 공설운동장은 처절한 마음을 안은 시 안의 노동자들과 주민들로 꽉 차 있었다.

이모부와 함께 운동장에 나간 나는 트럭에서 끌어내려지는 사형수 8명을 보았다. 고문을 당한 후유증인지 모두 걷지 못하여 옆에서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라는 사복 입은 청년들이 질질 끌고 말뚝을 세워놓은 곳으로 갔다.

사형수들을 말뚝에 묶는 순간에도, 제철소에서 일했다는 이모부는 누가 누가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여름철인데도 모두 두꺼운 솜동복을 입혀놓고 눈을 싸매 놓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무슨 중앙 재판소라는 곳의 사람들이 사형선고문을 읽었다.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위반하고 국가물자를 외국에 팔아먹는 국가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배에서 현장 체포된 후방 부지배인과 판매과장, 그리고 연루된 제철소 업무 부지배인과 생산과장을 비롯한 간부들 8명을 즉석에서 총살에 처한다는 것이다.

순간 노동자들과 주민들 속에서는 부정하다는 뜻의 수군거림이 웅성웅성 해졌다.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총살까지 시키는 건 너무합니다"

하지만 사형수들 앞에 자동보총을 든 열댓 명의 사격수들이 줄을 지어 서더니 구령에 따라 자동보총(소총)을 난사하였다. 자지러진 수십 발의 총성은 좁은 운동장을 들었다 놓았고, 총에 맞은 사형수들은 하나같이 피를 뿜으며 앞으로 상반신을 수그리고 쓰러졌다. 어마어마한 살인 광경 앞에 주민들은 모두 넋이 나간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폭풍이 지나가자 격노한 주민들의 부르짖음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터지며 운동장 안이 술렁거렸다. 나도, 이모부도 어느 사이에 흥분되어 주민들과 함께 목소리를 합치며 알지도 못할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를 대변하듯 한 중년 여자가 어느 사이에 판결문을 읽어대던 마이크 앞으로 튀어나갔다. 옆의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가리키며 "위대한 수령님(김일성)의 간호사를 하던 여자다"하고 말했다.

이모부는 중앙당에서 대단한 신임을 받고 생활하는 저 여자는 전에 평양 봉화진료소에서 김일성의 담당 간호사로 일하다가, 지금 고향인 송림시에 내려와 혜택을 받고 떵떵거리며 산다는 것이다.

이모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대뜸 저 여자가 사형을 정당화하는 궤변을 늘어놓을 것이라 생각되어 눈초리가 꼿꼿해짐을 느꼈다. 다른 주민들도 모두 마찬가지로 증오스러운 눈초리를 그 여자에게 보내는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그런데 마이크에서 울리는 그 여자의 음성은 전혀 뜻밖이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총살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철소 간부들이 위대한 장군님께 생산을 많이 하여 기쁨을 드리자는 일념으로 강냉이를 바꾸려 했는데, 방법이 틀렸으면 처벌을 주어야지 총살까지 하는 건 너무합니다. 총살당한 간부들이 노동자들을 먹여 일을 시켜보자고 했지,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이렇게 사형까지 하는 건 너무 무지막지 합…"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젊은 사복쟁이들이 달려들어 그 여자를 마이크 앞에서 끌어내며 구둣발로 차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이어 넘어진 그 여자의 몸을 포승줄로 꽁꽁 묶어놓고 일으켜서는 한 사형수의 말뚝으로 끌고가 쓰러진 사형수를 발길질로 옆으로 밀어놓고 그가 섰던 말뚝에 그 여자를 묶어놓았다.

뒤이어 마이크 앞에서 판결문을 읽던 재판관도 아닌 한 중년 사복쟁이가 나섰다. 보위사령부 검열대 성원들을 지휘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대뜸 "우리 사회주의 독재체제에 불응하는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모두 똑똑히 알고 처신하라"는 서리낀 목소리를 던졌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느 사이에 3명의 사격수들이 그 여자를 향해 아홉 발 가량 되는 총탄을 발사하였다.

금방까지 펄펄 뛰던 여자가 피를 뿜으며 눈앞에서 쓰러지자 주민들은 입이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 모두 공포에 몸을 떨며 숨도 크게 쉬지 못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운동장에 바스락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나도, 이모부도 너무나 무서워 얼이 나간 듯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그 광경을 목격한 이모나 나의 처도 누구 하나 말 한 마디 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말하면 금방 달려들어 또 총탄을 안길 것 같은 환각이 드는 것이다.

총살이 강행된 다음날 오후였다. 분노한 제철소 노동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공장 구내에 몰려서 시위를 단행했다는 소식이 온 송림시 안에 퍼졌다.


새벽녘에 탱크가 밀려오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간부들을 숙청하지 말라" "우리를 먹여 살리고 제철소를 위한 간부들의 행동은 잘못이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며 공장 구내 길에서 몇천 명이 모여 앉아 버티기 투쟁을 한다고 하였다.

이 소식에 온 송림시 안의 주민들이 너무나도 통쾌해 격려어린 말들을 아끼지 않았다. "노동계급이 다르긴 다르다" "노동자들은 배짱이 있다" 하는 말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에서 이와 같은 시위를 일으킨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시위자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당국을 대표하는 간부가 나서서 들어줄 때까지 앉아 버티기로 하였다. 밤이 되도록 자기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노동자들은 밤을 새우며 공장 구내에 앉아 버텼다. 이들의 시위소식을 들으며 우리는 혼곤히 잠들어 버렸다.

그런데 새벽 무렵 나는 아내가 흔들어대는 바람에 눈을 뜨는 순간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에 깜짝 놀랐다. 둔탁한 무한궤도 소리에 창문이 드르릉 울리고 집안바닥이 흔들리는 게 분명 탱크 소리였다.

몇 대가 지나가는지 가늠할 수 없게 연속 거리를 지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시계를 보니 때는 새벽 4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깨어난 이모와 이모부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바깥소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니야"
"그런 것 같애" 하는 이모와 이모부의 말소리에 나도 아내도 마주보며 수긍하는 뜻으로 눈을 크게 떴다. 6·25 전쟁도 새벽에 일어났다더니 탱크 소리와 함께 날이 푸름푸름 밝아 오는 것이 전쟁 같은 것을 연상케 하는 느낌이었다.

"아유, 어쩌면 좋아. 빨리 가서 알아보고 피난해야 될 게 아니야?"
이모의 째는 듯한 소리에 나와 이모부는 엉거주춤 바지를 입었다.

밖에 나선 우리는 이미 지나간 탱크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앞뒤에서도 주민들이 달리고 있었는데, 제철소 방향이었다. 우리 집에서 제철소까지는 한 5리 가량 되었는데 제철소 방향에서는 탱크소리가 계속 들리고 거리는 그곳으로향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달리면서 나는 혹시 탱크가 시위자들에게로 가지 않는가 하는 의심어린 말을 이모부에게 던져보았다. 이모부는 "탱크가 거기 가서 뭘 한단 말이냐" 하며 가당치 않은 말을 한다는 듯 나를 흘겨보고 부정해 버렸다.

 


탱크에 짓이겨진 시체들 즐비

순간 달리던 주민들은 모두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서 움직일 줄 모르고, 터지는 총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백 발의 총성 속에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선뜩 가슴을 치는 것이 현실인것처럼 눈앞에 환상적으로 안겨오는 듯 했다.

한 10분간 들리던 총소리와 용을 쓰는 듯한 탱크소리가 들리지 않고 간간이 세워둔 듯한 탱크의 발동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제철소 구내에서 어지러운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주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정신 없이 구내 안으로 달려 들어가다가 나타난 광경 앞에 모두 아연 실색하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제철소 구내 안의 아스팔트 길에는 걸쭉한 시커머스레한 죽은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둘러서서 통곡하는 사람들 가운 데마다 보기에도 끔찍한 짓이겨진 수십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그 옆에는 잘라져 나간 팔과 다리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물씬 물씬 풍겨오는 피비린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시위자들인 듯한 남자들의 무리를 둘러싸고 수백명의 군인들이 기고만장하게 서서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시체를 보니 보나마나 탱크에 치이고 총에 맞은 듯한 광경이었다. 이어 달려온 사람들 속에서 가족들이 제각기 자기 식구의 시체를 둘러싸고 대성 통곡을 했다.

주위는 언제 시위가 있었던가 싶게 모두 사망자들을 둘러싸고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통곡하며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시위대열이 앉아 버티는 앞으로 열댓 대나 되는 탱크와 함께 트럭에 탄 수백 명의 군인들이 줄지어 달려 들었다. 당장 흩어지라는 소리에 노동자들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간 무슨 구령소리가 나더니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시위자들이 쓰러지고, 탱크가 시위대열 속으로 굴러 들어왔다. 뜻밖의 기습에 앞에 앉아 버티던 노동자들 수십 명이 순식간에 탱크 무한궤도에 깔려 들어갔다. 너무나 놀란 시위자들은 비명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피신해갔다.


또 한 차례의 공개총살

다음날 거리에는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성) 명의로 된 포고문이 나 붙었다. 내용은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고 좀먹는 불온 선동으로 시위를 주도해온 주모자들을 인민의 이름으로 심판한다는 것이었다.

포고문이 나붙은 거리로는 총을 멘 살기 어린 군인들이, 거리 골목골목을 누비며 어슬렁거리는 게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 같았다.

이틀 후 공설운동장에서는 폭동 주모자라고 하는 3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또 한 명의 중학교 선생과 어린 처녀를 총살하는 놀음이 벌어졌다.

중학교 선생과 처녀의 죄명은 한 재일 귀국동포의 집에 들어가 녹음기를 훔친 죄과였다. 그들은 재수 없게 계엄령 상태가 벌어진 그 시각에 총살감을 찾지 못해 헤매는 당국자들에게 걸려든 것이다.

나의 아내는 그때 총살하는 자리의 맨 앞에 앉아 있었는데 끌려나온 사형수들 속에서 아련하게 생긴 그 처녀에게 눈길이 자꾸 가 유심히 살펴 보았다 한다. 죄과라는 것을 읽고 총살에 처한다는 판결과 함께 두 명의 보위사령부 사복쟁이들이 나서서 그 처녀에게 다가갔다. 이들은 처녀에게 다가가더니 턱을 주먹으로 올려 쳐 턱뼈가 빠지게 한 뒤, 손바닥 안에 쥔 자그마한 용수철을 그 처녀의 입에 넣었다.

순간 그 처녀의 입에 들어간 자그마한 동그란 용수철이 쫙 퍼지더니 그의 입이 고통스럽게 불어나 처녀는 몸부림쳤다. 이어 말뚝에 묶여 연속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그 처녀의 모습을 보며 아내는 경악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며칠 동안 부들부들 떨며 잠 못 자는 아내였다.

연속 일어나는 충격적인 이런 일들로 8월 한 달, 송림시 안의 모든 주민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지내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송림시에 문제가 있다"는 북한당국자의 지시 아래 평양 보위사령부가 내려와 뿌리를 뽑았다는 사건들이다.


2001년 7월 이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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