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카키 마사오’라 불러 세간의 화제다. 그런데 그 이름이 주는 정서적 충격은 일종의 시차효과다. 당대 조선인들은 대부분 창씨개명을 했고, ‘高木正雄(다카키 마사오)’은 그가 ‘고령박씨’임을 알려주는 심상한 수준의 개명이다. 그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다시 개명했다면 또 다른 문제지만 이 전승에 대한 근거는 없다. 혈서를 썼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청년 박정희는 해방 직전(1944년 12월) 소위로 임관되어 ‘무위도식’하다 광복을 맞았다. ‘오카모토 미노루’설을 제기한 재미언론인 문명자의 책에는 박정희가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는 걸 즐겼다는 증언이 있고, 역사학자 최상천이 이를 그대로 받아쓴 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지만, 당시 만주에는 토벌해야 할 독립군도 없었고 중국 팔로군과의 전투도 거의 없었다.
해방 직후의 사람들은 우리보다 친일파 청산에 대한 의지는 강했지만, 그 기준에 대해선 우리보다 훨씬 관대했다. 박정희는 반민특위 기준으로 친일파도 아니었고, 남한 사회에서 좀 더 강도 높은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졌다 해도 당대의 정서적 기준에서 처벌 대상은 아니었을 게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태어난 청년(1917년생)의 출세를 위한 행각에 사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혈서를 쓴 그의 신념체계가 친일파였다는 지적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념으로서의 친일파’와 ‘처벌 대상으로서의 친일파’는 엄연히 구별해야 한다. 나는 설령 지금 남한 사회에 북한 김씨 왕조를 추종하는 이가 있을지라도, 그가 구체적인 국가전복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은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새누리당과 사법부는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나로선 박정희를 그들의 신념이 아닌 내 신념에 따라 평가할 수밖에 없다. 나는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크나큰 잘못이라 생각할 뿐 그가 애초부터 선거에 나와서는 안 되는 이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물론 그런 이의 행적을 기회주의적이라 비판할 수 있고, 더구나 장준하 선생(1918년생)처럼 학도병 징집 후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의 친일이 문제가 된 건 그 친일행적의 거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가 18년 동안이나 대한민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드리웠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만주국 경험과 인맥은 대한민국의 상당 부분을 규정했다. 그런데 이것들이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는 것과 별개로, 박정희가 만주국 인맥을 활용해서 행한 모든 시책을 ‘친일잔재’로 몰아 청산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는 애매하다. 이정희 후보는 이어지는 발언에서 박정희를 “한일협정을 밀어붙인 장본인”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시기와 배상금 규모, 강행처리한 방식에서 문제를 찾을 수 있을 뿐 한일협정 자체가 피했어야 했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일본의 경제성장에 편승하는 것이 남한 경제 재건의 가장 빠른 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대내적으로는 친일 청산을 하고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수교를 하되 반인권적 범죄에 대해선 별도의 책임을 남겨두는 게 당대로선 가장 현명했던 일일 수 있다.
즉 박정희가 ‘신념적 친일파’라 해도 그 외교·경제정책에 대한 효과는 따로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것들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뉴라이트로부터 이상주의자란 비판을 받게 되었다. 당장의 정서에 편승하기보다는 정교한 구별 위에 비판논리를 세워야 시민들의 장기적인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다카키 마사오’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201212111411001&pt=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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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운동의 멤버 한윤형의 글인데 상당히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