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인 노무현의 대통령되기 까지 일생

땅크나가신다 작성일 13.01.04 13:5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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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 6일,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에서 출생하였다.

노무현의 위로는 두명의 형이 있었는데, 맏형인 노영현은 일찍 죽고, 그 위로 형인 노건평만 있었을 뿐이었다.



1953년, 진영에 있는 대창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업 성적이 매우 우수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생회 회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부통령 선거에 앞서 학교에서는 이승만 생일 기념 글짓기가 있었는데

노무현은 중학교 1학년 때, 이승만 생일 기념 글짓기에 대해 백지동맹을 일으켰다가 정학당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명박과 마찬가지로 상고에 진학하였다.

노무현은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 출신이다.



노무현은 집안 사정이 어려웠기에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였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이후에 농업협동조합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아 그만 두게 되었다.



노무현은 농업에서 퇴사한 후에 막노동, 사법공부를 병행하였다.

그러던 와중 1968년, 군에 입대하였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제대하였다.



1973년, 노무현은 초등학교 동창인 권양숙과 결혼했다.

권양숙의 됨됨이는 떠나서 낭만적이라고 봄


1975년, 노무현은 제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제 17회 사법시험에서 고졸 출신은 노무현 혼자였다.

그러나, 1978년 5월에 판사직을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한다.



노무현은 당시 부산에서 세무, 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그런데, 1981년에 부림 사건(부산의 학림사건)이 터지게 된다.

*부림 사건 : 전두환 정권 때 부산 학생, 교사, 회사원 22명을 영장 없이 불법 체포하여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



노무현은 김광일 변호사, 문재인 변호사와 함께 부림 사건에 참여하여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노무현은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참여하여 피의자 측 학생들을 변론한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 반미 성격을 띠는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 미국문화원에 방화한 사건.

이 사건으로 동아대 재학생 장덕술(22)이 사망하였다.



또한 1987년, 이상수 변호사와 함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 참여하여 진상 규명을 하려다가



경찰에 의해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 : 대우조선 노동자 이상규가 시위 하던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노무현이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자, 통일민주당의 김영삼은 노무현을 정계에 영입했고

노무현은 13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 5공화국 실세였던 허삼수를 누르고 당선된다.

    

노무현은 13대 국회에서 이해찬, 이상수와 함께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1988년, 제 5공화국 실세들, 정주영 회장을 상대로 한 청문회가 있었는데

노무현은 그 때 핵심을 파고드는 논리, 보는 사람이 속이 다 시원하게 청산유수처럼 말을 한다.

더 나아가 전 대통령인 전두환에게 자신의 명패를 던져, 그 날로 노무현은 대스타가 된다...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민주정의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은 3당합당을 선언한다.

그 당시에 김영삼이

"구국의 차원에서 통일민주당을 해체합니다..."

"이의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므로 통과를..."

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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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노무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외쳤다.

하지만, 노무현의 말은 무시당하고 만다.

이에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작별을 고하고, 탈당한다.

후에, 삼당합당 반대한 의원들이 모인 민주당에 가입하였으나

 14대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더 나아가 15대 총선에서는 이명박 후보,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하였다.



1997년,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고

1998년 2월, 이명박 의원이 사퇴하여 재보궐 선거가 치루어지게 되자,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종로구 공천을 포기하고

"지역주의의 벽을 넘겠다." 는 발언을 하고, 부산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노무현이 낙선하자, 노무현의 에피소드를 들은 일부 네티즌들은 노무현에게 '바보 노무현' 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노무현 팬클럽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을 창설한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장관(2000. 08~2001. 03)을 역임한다.

그리고, 노무현은 16대 대선 경선에 참여하게 된다.



처음 경선에서는 이인제 후보가 1위를 고수하고 있었으나

노무현은 자신 특유의 연설로 대중을 사로잡고, 울산에서 1위를 차지한 것으로 시작하여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인 광주에서도 역시 1위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문화일보와 SBS여론조사에서 노무현과 이회창이 대선에서 맞붙을 경우

노무현 41.7% 이회창 40.6% 라는 결과가 나왔고



결국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결정된다.



노무현은 자신의 성향과 다른 정몽준 대선 예비후보와 단일화를 하였다.

그러나, 선거 전날인 12월 18일 정몽준은 노무현 지지를 철회했다.

하지만, 이는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 하였다.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은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 선거>

유권자 : 34,991,529 명

투표자 : 24.784,963 명 (70.8%)

노무현 후보 : 12,014,277 표 (48.9%)

이회창 후보 : 11,443,297 표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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