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서영이>에 녹아있는 왜곡된 현실 [늙은도령님 글]
요 며칠 어머님과 제 건강이 동시에 나빠져 주로 음식을 시켜먹거나 간단하게 먹으며 텔레비전을 많이 봤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 여러 가지 드라마가 하는 시간이라 요즘 가장 인기 있다는 <내 딸 서영이>를 보게 됐습니다.
필자는 <내 딸 서영이>를 보면서 공영방송의 주말 드라마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줄은 몰랐습니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철저히 상류사회 지향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 딸 서영이>는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상류 지향적이자 비현실적 판타지였습다.
주인공 서영이의 가족 구성부터 어이없었습니다. 먼저 아버지를 보시죠. 사업에 연이어 실패한 무능한, 그러나 착하고 이성적이며 자신의 잘못을 안 다음부터 지극히 헌신적으로 변해서 근면성실하고 다정다감한 아버지가 됩니다. 철저하게 가난을 미화하는 캐릭터의 놀라운 변신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 두 명의 직업은 한 마디로 하면, 헐~ 개천에서 용 나지 않고 더러운 냄새만 난다는 시대에도 여전히 신분 상승이 가능한 유일한 두 개의 직업인 변호사와 의사! 가난은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것이다, 이 두 명을 보라!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와 아버지의 방해 속에서도 이렇게 성공하지 않았는가!
주인공 서영이를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그녀는 신분 상승의 화신인양 그려지지만 지극히 이성적이고 따뜻하며 지고지순한 사랑을 믿는 약간 변형된 형태의 캔디 형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이지도 파렴치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를 호적에서 파내지 못해 자신이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했을 뿐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용서하노라,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짓을. 이것이 드라마의 주제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의문은 아무런 효용도 없습니다. 어느 재벌급 대기업 자식의 가정교사로 서영이 같은 인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느 재벌급 대기업 오너가 서영이 같은 자에게 자기 자식 교육을 맡긴단 말인가?
21세기 신데렐라는 20세기 신데렐라의 복고이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습니다.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내 딸 서영이>의 제작진들은 이런 주문만을 시청자들에게 걸고 있습니다. 당연히 재벌급 대기업의 경영권을 세습받을 큰 아들과의 숙명적 사랑이 서영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21세기에 들어서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 여성의 유일한 신분 상승의 통로! 양성 평등, 그 웃기는 구호란 세계적 배우인 조지 포스터마저 몇 십 년을 숨겨야 했던 커밍 아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서영이 남편을 한 번 보시죠. 그는 벌급 대기업의 큰 아들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처럼 아버지의 사업을 맡기 싫어 미국으로 도망갔다 돌아온 탕자입니다. 헌데 가난에 대한 병적인 자기 방어에 갇혀 있지만 똑똑하고 예쁜 서영이를 보고 위대한 사랑에 빠져듭니다. 당연히 그리고 너무나 순순히 경영수업에 들어가는 그는 왜 돌아온 탕자가 되었을까요? 판타지적 요소들로 가득한 아래의 포스터가 답입니다.
이 캐릭터 때문에 재벌급 대기업의 자식들은 신났습니다. 드라마에서 알아서 미화시켜주니까요. 부모도 없는 여성에 대한 대책없는 휴머니즘적 사랑 때문에, 미국까지 도망가서 흥청망청 살았던 자가 180도 변해 경영 수업까지 받고 탁월한 능력도 발휘하니, 오너 자식의 그 순수한 사랑이란 가히 인류의 모범 답안입니다.
재벌급 대기업 가족에 대한 찬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너의 부인은 남편이 술에 취해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비서와의 단 한 번의 혼외정사로 태어난 막네 아들, 세상에 둘도 없을 것 같은 비서의 행태, 핏줄의 정체를 알고서도 결국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오너 부인의 권태로운 모성애적 미덕까지.. 이로써 우리나라 대기업 가족이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신자유주의 캔디 형 사모님의 탄생.
도무지 그 존재가 어정쩡한 오너 집안 외동딸은 서영이의 남동생을 사랑하는 의사 동기에다 20세기 캔디의 전형과의 사랑싸움에서 밀려납니다. 친족간의 결혼을 막으려면 방법이 없으니.. 그렇다쳐도 요즘 의사들 휴머니즘적 존재들로 변신했나 봅니다. 하지만 병원 과장(기업으로 치면 임원급이다)과의 사랑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것도 해피엔딩으로 가겠네요.
대기업의 오너와 그 친구의 캐릭터는 극도로 미화된 주인과 노예관계.. 허나 거기에도 휴머니즘이 있고 우정이 있습니다. 오너의 인간적인 친밀감 조성이 목적일까요? 여기서도 등장하는 21세기 캔디 형 오너와 임원자리를 때려치운 그의 친구, 그것을 탓하지 않는 배부르고 한가한 부인의 권태로움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인물도 21세기 형 캔디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가족과 대비시켜 보십시오!
아, 그리고 이집의 딸이 서영이의 남동생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녀와 사랑싸움을 한 사람이 앞에서 밝혀듯이 서영이 남편의 여동생입니다. 반면에 사랑싸움에서 승리한 전통적 캔디(서영이 남동생의 부인)의 아버지는 서영이 시아버지의 친구이며 두 집안의 부인들은 오래된 친구인가 봅니다. 대한민국 정말 좁아터졌지요?
허허,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해도 주인과 노예 가족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우정이란! 단 세 개의 집안이 꼬이고 꼬인 놀라운 관계, 거기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서영이에게 사랑을 뺏겼다고 집요하게 복수하는 여인도 변호사입니다. 출신도 재벌급인 것 같습니다. 요즘 여자 변호사들 단체로 사랑 타령에 빠져 있나 봅니다. 이렇게 인간적이니 셰익스피어가 환생한다 해도 더 이상 변호사들을 욕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서영이가 결혼을 위해 거짓말을 한 것조차 모르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대기업의 큰 아들은 지극한 사랑으로 서영이를 용서하고, 당연히 서영이는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그 쓰잘 데 없는 자존심 때문에 한 번 튕겨보는 것이고 어차피 해피엔딩으로 갈 테니까. 그리고 그 연결고리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니까! 남편과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 말도 안 되는 드라마의 너무나 뻔한 대단히 희극적인 해피엔딩을 위해!!
도대체 우리나라 드라마에는 온갖 종류의 우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몇 개의 가족들이 얽히고설키는 지지볶음이 되었단 말입니까? 악인은 지옥으로, 현실에서는 도무지 실현되지 않는 불변의 법칙만 변함이 없다라고요. 주인공이 신분 상승을 꿈꾸는 조금 꼬인 능력 있는 신데렐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 근본이 모두 다 착하니 이 어찌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단 한 가지, 겹사돈의 위험성이 내포되고 있으니 그것만 조심하면 됩니다. 답답하고 말도 안 되는 줄타기는 설렁탕 국물을 우려내는 뼈들처럼 엄청나게 우려먹더군요. 이게 대한민국 공영방송 드라마의 기본적 테마이자 프레임인 것 같습니다, 끝없이 미화되는 가난과 대기업의 놀라운 인식 개선과 함께.
드라마 주 시청자인 주부들에게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자식들이 변호사나 의사가 될 만큼 공부시키고 또 공부시키고 또 공부시켜라’를 끊임없이 주입시킵니다. 공영방송의 주말 드라마는 현실에선 찾아볼 수 없는 온갖 종류의 캔디들로 가득합니다. 똑같은 설정들의 지겨운 반복과 우연, 무뇌아들보다 오직 단 한 발 정도 앞에 서있는 사람들이 주말밤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대중을 상대하는 드라마인데 단 하나의 리얼리티도 없는 캐릭터들의 몽상적이고 표피적인 향연들이 만들어내는 주제는 단 하나입니다. “가난, 그거 별거 없어. 공부만 잘하고 착하면 어떻게든 구원받아. 개천에서 용 나는 것 아직도 사실이야. 아직 신분 상승의 사다리는 유효해. 대기업의 가족 구성원들과 어떻게든 엮이면 모든 현실적 한계란 눈녹듯 사라지고, 그 순수함만 받아들이니까.”
그래서 현실은 살아볼 만한 것이 됩니다. 단, 가난해도 스스로 공부 잘해야 하고 무조건 착해야 합니다. 신분 상승의 욕망에서 벗어나도 안 되고요. 가난에 대한 방어심리는 쓸데없는 자존심에 불과하고 가난을 인정해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공부 잘해서 좋은 직업 가지면 어떻게든 꿈은 이루어지니까요.
헌데 공부 잘하려면 어떻게야 합니까? 그래요, 체제에 순응하면서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매달려야 합니다. 안철수 전 후보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50대 중에서 민주화 운동이란 단 1분도 해보지 않는 사람이 그이니까요. 글이 옆으로 셌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부 잘하고 사회 체제에 순응해야 하며 외모도 출중해야 합니다.
이상이 대한민국 공영방송 주말드라마 <내 딸 서영이>를 통해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본질입니다. TV드라마가 아니면 신분 상승의 꿈과 성공지상주의를 포장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극도로 확대된 양극화의 폐해들과 그에 대한 분노와 부조리를 숨기려면 이 모든 것을 단방에 극복할 수 있는 사랑 타령 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대중에게 주는 상류층의 선물이자 마약이며 체제 유지의 숨은 조력자입니다.
가난은 위대한 진보를 위해 무한히 조성되어야 할 텃밭입니다. 광고로 돌아가는 텔레비전은 찬란한 신분 상승의 박탈된 해방구로 작동해야 합니다. 특히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공영방송이라면 체제 유지의 한 축을 담당하는 주말 드라마까지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며 유치찬란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중 매체의 드라마라 해도 최소한의 현실은 담아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에서 <내 딸 서영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특히 KBS는 시청료를 징수하는 방송입니다. 광고라는 것도 결국은 소비자 수중에서 나오는 것이지 기업이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 광고도 역시 세금에서 나옵니다.
대체 뭐하자는 것일까요? MBC에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죽인 살인마에게 희한한 변명의 장을 마련해주는 방송 테러를 하지 않나, SBS에서는 복지 재원 문제를 다루면서 박 당선인의 공약 축소나 철회를 유도하지 않나.. 정말 골 때리고 저급하며 파렴치한 대한민국 지상파 방송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