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는 구라다.

노동쟁의 작성일 13.01.25 13: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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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떡밥이다. 신기한건 확실이 패륜충들이 유교적 관념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구만.

오늘의 썰은 그럼 유교적 효의 관념성이 도덕적이지 않은 이유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결론은 이렇다. 효는 구라다.

우리가 효를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지은것은 유교적 사회인 조선시대 이후라 볼 수 있다.

중국의 예를 들어보자. 중국이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은것은 한나라부터이다. 

한나라가 멸망할때 까지도 유교 사상은 널리 전파되지 못했었다. 

진나라를 보라. 진 시황은 친부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여불위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미 마저도 권력 싸움을 놓고 제거해버린다.

춘추시대는 오죽하랴. 빨리 죽지 않는 아버지를 제거하고 제후에 올라서기 위한 자식들을 보고

우린 피가 물보다 진하다 말할 수 없다.

동양을 떠나 서양도 마찬가지다. 봉건왕국의 제왕자리를 놓고 부자가 싸우고 모자가 칼날을 겨룬 사례는 넘쳐난다.


이를 놓고 효는 인간의 본성이라 말할 수 없다. 효는 당연히 후천적으로 습득된 관념에 불과하다.


유교사상이 노친네에게 필요한 이유는 자명하다. 노친네들은 점차 힘을 잃을 것이다. 그들이 설 자리는 부족해지고

젊은이로 하여금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정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들은 지식이라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목줄을 만드는 것.

행하고도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은장도를 만들어 주는게 필요했다. 그것이 효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적으로 개체는 자신과 유사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보호하려 한다.

그것이 이기적 유전자이며 종족적 본능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메커니즘인 셈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건 코드화 된 애정이다.


자식이 부모를 중히 여기는 까닭을 효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는 사랑과 혼동하고 있다.

사랑은 도덕이 아니다. 30여년을 함께 본 사람과 3일을 함께 본 사람간의 관계속에서 싹트는 정의 

농밀함은 다를 것이다. 사랑은 정이다.


따라서 효는 사회적 때깔이 묻은 퇴색된 사랑일 뿐이다.  효는 구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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