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부국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는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도약한 나라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15억달러의 준비금을 비축했고 임금은 서유렵 수준에 이르렀으며 법치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번영한 나라였다.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성장으로 두터워진 중산층 때문에 사회는 대단히 안정적이었다.
후안 페론 대령은 1943년 쿠데타로 탄생한 군사정부의 노동부 장관이었다. 그는 노조와 결탁해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군사정부는 그를 감옥에 처넣었지만 페론의 정부(情婦) 에바두아르테는 노동자를 궐기시켜 그를 구출해냈다. 페론은 1945년 선거에서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됐다.
페론은 '엘리트의식'에 빠진 전형적인 사이비 지식인이었다. 그가 대중에게 내세운 건 역시 '정의'였다. 그는 레닌,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으로부터 온갖 이데올로기의 부스러기를 가져와 섰었다. 그런 기묘한 '잡탕'을 특징 지을 단어로 그는 정의란 걸 생각해냈고 자신의 '철학'을 '정의주의'라고 불렀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 다음은, 복지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무분별한 '정부의 확대'가 멀쩡한 나라를 어떻게 파산시키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다. 페론은 국민들에게 '즉시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노동자들은 유급휴가를 즐기며 한 달치 봉급을 더 받았다. 주거와 의료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공공 서비스 지출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페론은 금융, 통신, 철도, 전기, 항공, 강철 등 주요 산업을 모조리 국유화했다. 정부는 비대해졌으며 국민들은 북유럽식 복지국가의 환상에 젖었다.
그러나 불과 6년 만에 준비금은 완전히 탕진됐고 국유화한 기업들의 생산성은 최악으로 떨어졌다. 나라 전체에 돈이 말라버려 세금을 거둘 곳도 없었다. 그런데도 한번 커진 복지 수요를 줄일 수도 없었다. 국민들은 정부에 끝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페론은 이제 돈을 마구 찍어대기 시작했다. 임금이 천정부지로 올랐지만 돈의 가치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만성적인 악성 인플레이션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르헨티나를 집어삼켰다. 사람들은 수레에 돈을 가득 싣고 가서야 먹을 것을 살 수 있었다.
그래도 아르헨티나는 '제 살을 뜯어먹는 몽환'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그것은 바로 '복지국가'라는 주술에 걸린 최면이었다. 페론은 1945년 2월 24일 선거에서 승리하고부터 1955년 파라과이 군함을 타고 피신할 때까지 아르헨티나를 완벽하게 '복지국가'로 타락시켰다. 아르헨티나는 그 뒤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선동정치의 결말은 너무 비극적이었다. 아르헨티나는 포퓰리즘이 파놓은 중우정치의 함정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여실히 증명한 경우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페론이 쫓겨난 이후 한 번 팽창한 '국가(정부부문)'을 줄일 방법을 찾지 못했다.(정부 부문을 줄이는 일에 성공한 지도자는 마가릿 대처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하다.) 대중은 오히려 국가의 타락 과정에서 느꼈던 쾌감을 잊지 못하고 1973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페론을 선택했다. 대중이 얼마나 무지하며, 그런 까닭에 얼마나 엉뚱한 결과를 낳는지 이로써 우리는 알 수 있다.
무대에 다시 등장한 페론은 손쉽게 박수를 끌어내는 방법으로 '적'을 찾았다. 선동정치는 적을 정하고 그 적을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페론의 적은 미국이었다. '양키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얻었다'는 페론식 선동은 그를 완벽하게 부활시켰다. 이 방식은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의 취약한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한때 '반미'를 적절히 이용하여 궁지를 벗어나거나 선거에서 승리했다.(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반미면 어떠냐'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캠프의 많은 이가 걱정한 것과는 달리 지지도가 폭등했다.)
전원책 저, 「자유의 적들」 中
이런걸 볼때마다 선심성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은 여야 할것없이 위험해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