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5월 17일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새벽 0시경 보안사령부는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하여 감금하고 국회를 점령하여 기능을 마비시켰다.
자정 이후 서울 이외의 주요 도시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고 광주에 공수부대 병력이 도착한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18일 당일 아침, 비상계엄의 소식을 들은 대학생 100여 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시위를 했다.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7 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는 ‘충정작전’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에 따라 주둔지 경비를 위해 일부 병력을 대학 구내에 남겨 놓고 금남로로 이동하여 계엄 반대를 정당하게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공수부대는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검문검색과 무차별 폭력을 가했고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학생의 자유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의 성격이 변한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폭증했고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하였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하였다. 20일 저녁에는 2백 대의 택시가 전남도청 앞에 결집,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지며 시위대의 규모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공수부대는 대검을 동원했고 진압은 가혹해졌으며 시위는 격렬하게 변하였다. 일부 시민들은 공수부대를 찾아 직접 항의를 가하였으나 무효였다.
21일 오전 전남도청 앞은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계엄군 역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애국가가 흘러나오면서 시민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되었다. 시민들은 속속 몰려들었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0일 밤 광주역, 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날 항쟁 기간에 많은 사상자를 냈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 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망, 부상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정부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발표했다. 광주 시민들의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화 요구 시위를, 언론이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영합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자유 민주화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광주 시청을 점거했다.
또한, 21일 오후, 시민들은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예비군 부대의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하면서, 스스로 시민군이라 부르며 계엄군에 대항한 자유 민주화 시민군이 결성되었다. 공수부대 배후가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시민들은 군수품 공장인 아세아자동차 공장 등 군수품, 방위산업체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되었고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대응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 자유 민주화 시민군은 전남도청 건물 안 계엄군 병력과 교전을 한 후 계엄군 병력이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한 후에 21일 오후 18시경 시민군은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명의로 유감성명서가 발표되었으나 신군부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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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줄만 딱봐라
계엄군이 총을 쐇으니까 시민들이 살기위해 무장한거지 그럼 민주주의 운동한답시고 간디처럼 핍박받을까?
상식갖고 살자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