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전남대 5.18 연구소 물론 증언 당시 증언자가 평민당이라는 점은 감안해야합니다만, 증언 내용 자체는 사실이라면 ㄷㄷ
군수사기관 관계자
505보안부대 광주사태 처리 특명반 수사관의 증언/허창환(당시 보안사 광주지부 특명반 수사관)
505보안부대 광주사태 처리 특명반 수사관의 증언
증언자 : 허장환 생년월일 : 출생지 : 성장지 : 광주시 학력 : 대졸 당시직업 : 보안사 광주지부 수사국 수사관 현재직업 : 평민당원 채록일자 : 1988년 12월 2일 특기사항 : 이 증언은 증언자가 1988년 12월 6일 평화민주당사에서 가진 기자회견 전문임.
저는 지난 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당시 계엄 업무를 기획조종하는 실질적인 지휘본부였던 보안사 광주지부 제505보안부대 즉 계엄사 전남합동수사단 광주사태 처리 수사국의 핵심부서인 특명반 수사관으로 재직한 바 있던 허장환입니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씨는 지난 88년 9월 4일 저를 비롯한 전두환, 최세창 등 9명을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광주지검에 제소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 검찰에서는 피고소인인 저에게 단 한번의 확인조차 없었습니다. 이는 보안사령부 511연구단의 압력에 의해 증거불충분이란 명목으로 동 사건을 기각 조치토록 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국민 앞에 광주사태의 실상을 공개하게 된 중요한 배경과 의미는 중학교에 다니는 저의 아들이 앞서 말씀드린 고소내용이 보도된 신문을 보고 난 후 당시 광주사태의 배경과 그 당시의 아버지의 역할, 그리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등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저는 상명하복만이 요구되었던 당시 저의 입장과 정의를 알려고 하는 아들의 아버지로서 평소 자식에게만은 역사적으로 죄인이 되지 않는 길을 택하려는 양면된 입장으로 그 동안 고뇌와 번민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광주민중항쟁 당시 숨져간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영혼 앞에 조금이라도 사죄하고 더욱이 어린 아들의 세대에서 다시 민족의 죄인이라는 오명을 남기지 않는 길은 오직 정권 찬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친위대원이었던 저 같은 사람이 모든 진실을 국민 앞에 공개하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증언에 앞서 저는 먼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목숨보다 소중한 민주주의를 쟁취키 위해 산화한 수많은 민주시민들과 의미 없이 숨져간 공수대원들의 영령 앞에 조용히 옷깃을 여미고 그들의 명복을 빌고 그분들의 유가족과 아직도 병상에서 신음하는 부상자 그리고 505보안부대에서 저를 비롯한 수사관들로부터 잔혹한 고문수사를 받은 모든 분들에게 엎드려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편의상 사태발발 전, 사태발발 후, 그리고 평정 후 수사과정과 결론, 참고사항 순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사태발발 전 사항으로 광주사태가 외부세력 즉 김대중씨가 조종하여 발생하였는가? 아니면 보안사령부가 김대중씨를 광주사태 배후 조종세력으로 조작하여 광주사태를 사전 기획하고 이를 구체화시켜 실행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가) 1980. 5. 17 국방부 기밀실에서 확대계엄을 위한 전군주요지휘관 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인 80. 5. 16 보안사?부 대공처장 이학봉 대령에 의해 긴급소집된 전국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에 참석하고 귀광한 광주 505보안부대 대공과장 서의남 중령은 80. 5. 17. 17:00 경 광주 보안부대 1층 대공과장실에서 저를 비롯한 수사관 8명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사령부 지침을 하달한 바 있습니다.
1. 이번 확대계엄은 광주에 한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전제와 함께 1980년 5월 17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에 확대계엄을 실시한다.
2. 확대계엄을 실시하는 목적은 용공분자인 김대중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였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함을 깨닫고 변칙수단을 강구하여 민중폭동으로 혁명을 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3. 더욱이 문제 학생들로 구성된 전국학생연맹 대학생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22일을 기해 전국에 4.19와 같은 데모를 일으키기로 토의한 바 있다. 여기에 전남대학생들도 참석했으며, 이들이 광주에 내려와 김대중의 지령대로 광주를 기점으로 폭동을 일으키려하고 있다는 정보를 사령부에서 입수했다.
4. 김대중이는 이들에게 벌써 폭동에 필요한 자금도 주었다고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의남 중령은 사령부에서 가지고 온 예비검속자 명단을 보이면서 김대중 자택 방문자 기록 및 출입자의 사진도 입수하였다고 말하면서 검거 대상자 전원을 계엄확대를 알리는 새벽 방송이 나가기 전까지 전원 체포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나) 서의남 중령은 사령부 지침을 하달하고 나서 목포지역에 장기간 근무하여 김대중씨의 인적사항을 잘 알고 있는 저에게 목포, 여수, 순천 등 분견대에 지시하여 추종인물을 일망타진토록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당시 목포분견대에서는 박대통령 집권시부터 동향을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서의남 중령은 재야인사 및 학생 등 김대중 추종세력은 이번 기회에 씨를 말려야 한다고 말하며 505사병만으로는 부족하니까 경찰도 동원하여야 한다고 하여 전남도경을 비롯한 광주 및 서광주 경찰서 등에서 기히 합수단에 파견 근무하던 인원의 각 10명씩 30여명의 경찰수사요원을 당일 밤 지원 받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21:00 경 서의남 중령은 검거자 명단을 수사관에게 할당하는 자리에서 제가 "그럼 김대중이도 오늘밤 체포되겠군요."라고 말하자 서의남 중령은 "사령부에서 지금 이 시간쯤에 아마 검거했을거야." 라고 대답하였는 바 서의남 중령의 무심코 뱉은 이 말이 후일 광주사태가 사전 조작이라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발언이었음을 당시 제 자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비 검속에 앞서 저는 서의남 중령으로부터 전남대와 조선대에 지금 이 시간에 주둔하고 있을 공수부대에 가서 공수부대를 담당하는 보안부대원을 찾아 명령보고계통을 505로 하도록 지시한 후 대학 내 도서관 등에 있는 학생들을 공수부대와 협조, 체포하고 이들 중에 예비검속 대상자를 색출토록 하라는 지시를 받고 22:00 경 조선대에 임해 본즉 공수부대원들이 이동을 마치고 일부는 야영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대학 내를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다) 다음은 사태 발발 후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확대계엄이 일어난 1980. 5. 18. 오후에 보안사령부 대공과장 홍성윤 중령이 자신들이 구성하고 실행했던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을 확인키 위해 사태 감독관이란 직책으로 내려와 5월 28일 저녁에 상경한 바 있으며 광주사태 투입 병력의 최고 지휘관인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사태 진행과정에서 서울과 광주를 수시로 왕래하면서 505부안부대장 및 최세창, 신우식, 최웅 준장 등 예하 부대장과 빈번히 접촉하며 작전상황을 수시로 보고받고 지시한 적이 있던 중 5월 21일 서울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직접 광주 K-57 비행장에 도착 상무대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에서 사태 진행과정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후 헬기로 광주일원을 살펴보고 상경한 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제505보안부대장 이재우 대령, CAC사령관 윤흥정 중장, 공수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 11공수여단장 최웅 준장, 7공수여단장 신우식 준장,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소장, 전교사 참모장 장사복 준장 등 계엄관계관회의가 개최되었는바 이 회의 석상에서 특전 사령관 정호용 소장을 비롯한 예하 3개 공수 여단장들이 한결같이 무기 사용여부로 회의를 질질 끌 것이 아니라 군이 자구책으로 자위력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라는 회의 결정이 있고 그후 저는 이러한 회의 결정을 505보안부대에서 사령부에 보고하는 T.T전문에서 자위력 구사 결정 사전 조치 발포, 계엄군 시 외곽 철수 등으로 된 내용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수사회의 과정에서 상기 505대공과장 서의남 중령은 "오늘 사령관님께서 부대에 들르지는 않았지만 광주를 다녀가셨고 전교사 회의 결과 역시 자위력 구사를 최종 결정했으니 폭도들에게 곧 사살명령이 내릴 것이다. 지금부터는 외근 근무를 하는 수사관들은 사복 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폭도로 오인 받을 수가 있다." "특히 허 수사관은 특수임무 수행상 시내에 자주 출입하므로 주의하도록 하시요."라고 하여 그때 저는 "아! 이것이 정식 발포 명령이구나." 그리고 "정말 역사적 순간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4·19의거 당시 발포문제로 시비가 있었던 점을 회상하고 "만일 최인규와 같은 꼴이 되는 것은 아니겠죠?" 라고 하자 서의남 중령은 "그때와는 사태가 다르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사령관님이 책임진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있고 나서 형식상 지휘계통인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자위력을 위한 자구책이 하달되었으며 이날 밤 계엄군이 퇴각을 시작하며 전면적인 발포가 있었습니다.
5월 22일 17:00 경 서의남 중령은 계엄군이 철수된 광주시내 시민군 동태를 탐지하기 위해 저를 비롯한 수사관 4명을 침투 그들의 배치사항, 병력, 소지화기, 특히 중화기 소지 여부 등을 확인 보고토록 한 바 있습니다.
그후 5월 23일 10:00경에는 저를 비롯한 수사관 6명이 헬기를 타고 광주교도소에 공수되어 게엄군이 철수작전시 체포한 시민군 및 교도소 습격 폭도 명목으로 체포 수용중인 178명에 대한 분류심사 작업을 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연고지인 담양, 순천 방면으로 가려던 광주에서 취학하고 있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당시 제 직권으로 중학생 1명을 현지 석방조치 한 바도 있습니다.
라) 5월 27일 평정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7일 평정 기습작전을 앞두고 CAC공병대 폭약전문처리 군속이 전남도경 지하실에 은밀히 침투, 폭약 뇌관 완전 제거 보고가 있고 나자 26일 저녁 9시 K-57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저를 비롯한 평소 도청내부 구조를 잘 아는 정보과 도청담당요원들로부터 내부 구조 시설에 관한 브리핑이 있었고 익일 04:00 평정작전에 돌입되었습니다.
저는 06:00 경에 도청에 들어가 현지 수습처리 부대로 투입된 20사단 병력 담당 보안 부대원과 협조하여 일제 외부인 출입을 통제시키고(특히 국내외 기자 등에) 폭도들이 기록하였을지도 모를 모든 문서서류 일체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고 도청에 임하여, 상기 임무를 수행한 바 있습니다.
마) 광주사태 처리 수사국 편성
사태 평정 후인 80. 5. 27. 광주 외곽을 계엄군으로 신속히 차단하고 수사관 1명씩을 배치 사태 가담자를 색출토록 하는 반면(이때 홍남순 변호사 일가족이 송정리 검문소에서 505보안부대 이종남 수사관에게 체포) 사태 처리를 위한 수사국이 긴급 편성되었는 바 편성요원들은 보안사, 안기부, 검찰, 범죄수사대 등에서 차출된 80여명의 수사요원들이 80. 5. 27. 헬기로 505보안부대에 투입되었는 바.
1. 수사국 구성요원의 주요 편성 직제를 보면 초대 수사국장이 보안사 기획처장 최예섭 준장, 부국장에 현 보안사 참모장 최경조 소장(당시 대령) - (최예섭에 이어 수사국장이 됨), 부국장에 505보안부대 대공과장 서의남 중령, 광주지검 공안검사 김기준 외 1명 등이 주축이 되고
2. 3개과 1개 반으로 편성 - 1과. 재야 담당 팀장 전남도경 파견요원 (경정)
2과. 학생 〃 〃 안기부 파견 요원 (부이사관)
3과. 폭도 〃 〃 보안사 〃 〃 (조모소령)
그외 특명반이 있었습니다.
3. 이들은 처음 재야 수괴를 정할 때 남동성당 김성용 신부로 했다가 김신부가 미검상태였으므로 홍남순 변호사로 교체했으며, 최고 수괴를 김대중씨로 한 후
재야수괴 - 홍남순
학생수괴 - 전남대 (정동년)
폭도수괴 - 김종배
극렬가담 불량배 - 박남선, 윤석루
등으로 수사체계도를 작성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이 체계도에 무조건 적당히 끼워 맞추었습니다. 이러한 수사과정에서 김대중씨와 범죄사실을 연계시키기 위해 피의자들에게 무수한 고문이 자행되는 조작수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예로 1) 5. 29. 정동년이 숙박하였다고 주장하는 아리바이를 없애기 위해 완도읍 모 여인숙의 숙박부를 찢어버리고 변조한 외, 2) 홍남순씨를 고문과 설득 회유로 송치하였다가 홍변호사가 검찰에서 진술을 번복하자 도저히 공소유지가 어려워 기소할 수 없다라는 군 검찰관의 요구가 있자 재차 신병을 보안부대에 인수 잔혹하게 고문하여 수사관이 진술서를 쓰고 피의자격인 홍남순씨가 이를 정서하여 기소한 사실, 3) 22일 오후 4:30 경 광주 통합병원 근처에서 시민군이 잡아 계엄군에 인계된 간첩 용의자 전옥주를 서의남 중령이 저에게 "최대한 김대중이와 연계시키라."고 하였으며, 4) 전남 도청에서 사태 진행과정 중 발생된 독침사건의 주범 장계범이를 사태 평정 후 보안부대에서 보호하였으며 장계범이 분명히 사태 가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형사처벌되지 않았으며 더욱이 서의남 중령은 당시 이들을 저에게 잘 보호하도록 지시까지 한 바 있습니다. 5) 송치된 인원들에 대한 군 재판부의 공판이 진행되기도 전에 송치된 자의 형량을 505보안부대와 CAC 군 검찰 및 재판부가 사전에 형량확정을 했으며, 그리고 공판일에는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인정하도록 수사관 전원이 법정주변에서 대기하며 공소유지에 필요한 조치를 한 바 있습니다. 6) 그외 특명반에서는 전남대 교수를 골라내어 이들을 김대중 내란 음모 간접 가담자로 규정 민준식 총장 및 김동원 교수, 이방기 교수, 명노근 교수 등 수 십 명을 사표를 강요 사직토록한 이 권력형 부조리 수사를 하는 등 국보위 및 청와대 지시사항을 수행한 바 있습니다.
= 결론 =
5·18 광주만행은 5·16보안사 대공과장 회의에서 이미 그 사전 전모가 대공처장 이학봉 대령에 의해 지시되었고 상기 지시를 받은 505보안부대 서의남 중령은 이를 구체화시키고 실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계획 하에 계엄확대 방송과 함께 도시외곽을 차단하고 시외전화 등 통신을 두절시켜 광주시민을 고립시킨 후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육진압작전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병행하여 80. 5. 18부터 보안사 대공과장 홍성율이 보안사령부가 구상하고 실행했던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을 독려하는 감독관으로 내광하여 사태를 전두환 사령관에게 보고하였고, 5. 19부터 공수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이 수시로 서울 광주를 내왕하며 작전상황을 지휘 및 보고하였으며 또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직접 광주를 다녀가는 등 일련의 과정을 감안컨대, 광주사태 사전조작 및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음이 명백한 사실인 것입니다.
이들은 5·18진행과정에서도 장계범 독침사건을 조작하는 등 흥분된 군중심리를 더욱 극대화시키려는 조작을 하였고 수사과정에서도 김대중 - 홍남순 등 사전에 조작된 틀에 맞도록 모든 사람을 가혹한 고문으로 수사하여 이 틀에 끼워 맞추었으며 체포된 자의 형량도 재판이 있기 전에 미리 505보안부대가 예상 확정 조정하는 등 실로 경악할 일이 자행된 바 있습니다. 이들은 5. 28 이후에도 특명반으로 하여금 교수 등 민주인사를 김대중씨 추종세력으로 조작하여 그들을 자격정지케 하여 수많은 가정을 경제적으로 파탄케 한 바 있습니다. 5·18 광주시민 학살은 이처럼 소수 정치 군인들이 사전에 조작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 민족의 비극사임을 만천하에 밝혀 드리는 바입니다.
= 참고사항 =
특명반에서는 권력형 부조리 척결이라는 미명하에 국보위 지시로 삼청교육 및 공무원 숙청 작업과 병행하여 전남일보 사장 김종태 및 조선대 총장 박철웅 일가족을 잡아들여 이들을 위협 고문하고 재산 일부를 몰수하였으며, 불교정화란 명목하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사찰 수색 및 승려 체포 등 종교 탄압을 하였고 특히 국보위에서는 전남도에 전 모 대령을 파견하여 행정전반을 지휘 감독케 한 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505보안부대는 광주사태를 최종 마무리하면서 민주화 항쟁가담자 전원을 내란 가담 국 사범으로 치안본부 컴퓨터에 입력시켜 이들을 영원히 범죄인으로 낙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81년 11대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바 있던 현 평민당 국회의원인 전 31사단장 정웅 장군을 청와대 지시에 의해 납치, 강제로 입후보 사퇴케 한 장본인이 본인임을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이상 광주사태 전모를 말씀드렸습니다.
끝으로 당시의 광주시는 도시전체가 2차 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아우슈비츠 유태인 도살장을 능가하는 잔혹한 참상이었음을 여러분에게 폭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