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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드쉬 전 총재는 "한국 정부가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비밀에 부친 것이 상황을 악화시켰다"며 "한국이 1년만 일찍 IMF를 찾아왔더라도 그토록 초고금리 정책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캉드쉬 전 총재는 또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 직후 자신에게 보낸 서한에서 "IMF가 제시하는 목표는 지난 30년간 내가 싸워왔던 목표와 일치한다"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가혹한 IMF 조치, 한국 정부의 '비밀주의' 때문"
-한국인에게 IMF는 IMF 구제금융 이전과 이후로 시대를 나눌 만큼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IMF의 조치가 상당히 논란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은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모든 게 불공정하고, 가혹해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팩트는 당시 한국 국민들이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진실을 말하는 건가?
▶한국 정부는 IMF에 외환보유액을 공개하지 않았다. IMF 회원국으로서 정보공개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수치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수지 불균형이 빠르게 악화됐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의심은 커져만 갔다.
한국 정부와 IMF가 구제금융에 합의한 1997년 12월3일로부터 3주 전인 11월16일 정확한 외환보유액 수치와 정책 자료 등을 요청하기 위해 극비에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강경식 재정경제원 장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와 비밀회동 자리가 마련됐다.
우리는 그때서야 비로소 한국 정부로부터 정확한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은행이 외환보유고를 민간은행에 빌려주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1주일 뒤에야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에게 전달됐다.
한국 정부가 IMF에 알리지 않고 보유하고 있던 외환을 사실상 소진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IMF는 이로부터 8~9일 안에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나?
▶태국 바트화가 폭락하고 얼마 안 가 홍콩 주식시장이 20% 폭락했다. 인도네시아 외환위기가 터지고 위기가 아시아 전체로 번질 조짐을 보이자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3주마다 만기를 연장해야 하는 단기외채를 끌어다 쓰고 있었지만, 이는 국가부도 위기가 닥치기 전까진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정부에 외환보유액 수치를 요청했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한국은 특히 1년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됐다.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 가입국'이라며 자료 공개를 거부했다. 이러한 태도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더 불안하게 할 뿐이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자료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1월10일쯤 IMF가 한국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IMF 구제금융을 받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외국인 투자자들의 우려가 크니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기술적 분석이 필요하다면 제공해줄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이때도 우리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한국을 극비에 방문하기로 결정한 건 이때였다. IMF 협정문에도 명시돼 있는 감독권한을 발동한 것이다. 한국 경제정책 책임자들과 만나 성탄절 이전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성탄절 당일 한국이 파산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IMF의 조치가 너무 가혹했다는 평가가 많다.
▶한국 정부가 미리 도움을 요청했다면 처방은 훨씬 더 순조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보다는 미국과 일본에 가서 비밀리에 대출해달라거나 대출기한을 연장해달라고 요청하는 방법을 택했다. 미국과 일본이 거절을 하고 나서야 한국은 IMF로 왔다.
물론 한국은 당시 대선 기간이었고 강도 높은 개혁을 요구하는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IMF에 한국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IMF는 한국 문제에 훨씬 더 빨리 대응했을 것이고, 극심한 위기 속에서 행동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고, 중산층이 무너졌다.
▶한국의 중산층이 무너진 것은 IMF 때문이 아니다. 정경유착, 관치금융 등 그동안 한국의 낡은 경제적 모델이 종료될 시점이 온 것이었고, 이 시기가 IMF 개입시기와 맞물렸을 뿐이다. 당시 한국 사회에 끼친 IMF의 영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 구제금융을 제공한 것은 IMF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팩트는 한국의 경제 모델이 바뀌어야 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이 1996년 OECD에 가입하면서 기구가 제시했던 개혁조건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한국 경제의 비밀주의, 독점구조, 재벌문제, 정경유착 등은 변해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이라니?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1997년 12월18일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내게 한 통의 서한을 보냈다. 그는 "이전에 약속했듯 IMF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이행할 것"이라며 "IMF가 제시하는 목표가 지난 30년간 내가 싸워왔던 목표와 일치한다(fighting for the same objectives)"고 했다. IMF가 제시했던 프로그램과 김 당선인이 구상하고 있던 정책은 강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과는 개인적으로도 여러 번 만났다. 그의 용기와 통일에 대한 비전을 존경했다. 그가 당선인 신분이었던 시절 자택을 방문해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때 한국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합의했고, 그는 이를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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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IMF라는 것은 조지 소로스나 헤지펀드로 인한 문제이기 보다는
그냥 썩어버릴 대로 썩어버린 대한민국 경제가 더이상 지탱할수 없어서 폭삭 무너져 버린 결과이다.
분명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IMF.
하지만 현실 부정만을 하며 OECD에 가입한 것만을 자랑으로 여겼던 대한민국....
모든 것들을 비밀로 만들며 정작 국고는 바닥을 치고 들어오고..
이유가 달리 있겠어? 이것이 들어나면 자신의 비리가 걸릴까봐 망할 때까지 놓지 않은 것이지.
그리고 그 고생은 대한민국 모든 시민들이 당하고 말이야..
나는 개인적으로 김대중이 IMF를 잘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적어도 당시의 ㅄ당이 해놓은 망국 직전의 상황에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