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영화 없을까 하고 개봉 예정 영화 살펴보다가 예전에 잠깐 관심을 가졌던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가 송강호 주연으로 곧 개봉을 하더군요....
부산에서 연세가 좀 있으신분들은 잘 아실만한 사건이죠..물론 그당시에도 언론통제로
정확한 내막을 대다수가 아는 것은 아니였고 지금까지도 조작이였는지도 모르시는 분들이 있죠...
지식 백과 요약 내용은
1981년 제5공화국 군사독재 정권이 집권 초기에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일으킨 부산 지역 사상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이다
라고 되어 있네요
당시 5.18 이후 민주화 세력을 축출 하고자
각 지역(경상도 전라도 할 것 없이.. 부림사건은 부산)에서 모임을 갖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잡아다가
온갖 고문을 하여 억지로 자백을 받아내고 검,경,사법부 까지 셋트로 장단을 맞춰서 밀어 붙인 사건이죠..
사건은 이러 한데.. 제가 그 건을 보면서 가장 충격 적인것은
그 당시 대세를 따른 다는 명분 하에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부를 얻고 권력의 핵심으로서 현재까지 많은 것을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참 답답한 현실이죠...
정치적 이념을 떠나서...
과거 독재정권 세력도 청산 못하는 이런 어처구니 없은 현실에 처한 나라인데 캐캐묵은
친일세력 청산은 당연히 공염불이였겠지요..
이 사건을 보면서 더욱 정치가 혐오스러워 지고 과연 이나라에 정의는 살아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정치에 관심을 끊는것은 결국 기득권층과 권력에 눈먼자들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도 정보를 얻고 배우고 해야 하는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의도로 쓴글이 아니라 과연 이나라 정의는 살아 있는가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서 주절주절
쓴 글입니다... 노무현대통령이 언급 된다고 해서 정치적,이념적으로 매도 하실거면
그렇게 하세요 없는 사실을 지어낸것도 아니거니와 이미 밝혀진 펙트이니까요
아래는 당시 변호인이 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글입니다.
아래는 노무현에게 듣는 부림사건[출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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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9월 전두환 정권이 소위 '부림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것이 내 삶을 바꾸었던 바로 '그 사건'이다.
공안당국은 반국가단체를 만들어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이호철, 장상훈, 송병곤, 김재규, 노재열, 이상록,
고호석, 송세경, 설동일 등 부산지역 지식인과 교사, 대학생 22명을 구속했다.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한
일은 사회과학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정부를 비판한 것이 전부였다.
구속자는 대부분 1979년 이홍록 변호사가
만들었던 부산양서조합 회원들이었다.
개업식 축하 모임, 돌잔치, 송년회를 한 것이 범죄 사실로 둔갑했고, 계엄법과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이 사건에 손대게 되었다. 당시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인권운동을 한 변호사는 이홍록, 김광일 두 분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사가 김광일 변호사까지도 사건에 엮어 넣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변호를 맡을 수가 없었다.
손이 모자란다는 하소연을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변호를 맡게 된것이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일단 구치소로 피고인 접견을 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상치도 못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초췌한 몰골을 한 청년들은, 변호사인 내가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모두 영장 없이 체포되었고 짧게는 20일, 길게는 두달 넘게 불법 구금되어 있으면서 몽둥이찜질과 물고문을 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학대 받는 동안 가족들은 딸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있었다. 한 젊은이는 62일 동안 불법구금되어 있었다.
그 어머니는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시신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던
김주열을 생각하면서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영도다리 아래부터 동래산성 풀밭까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혹시
아들이 아닌지 가슴을 졸이며 뛰어갔다.
그 청년의 이름은 송병곤이었다.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사실과 법리를 따지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법정에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변론을 하기가 어려웠다.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처참한 고통을 거론하면서 공안기관의
불법행위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검사뿐만 아니라 판사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법정 분위기가 험악했다.
다음날 보자고 해서 검사를 만났더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느냐고 나를 힐난하면서 협박했다.
"부산에서
변호사 한두 명 죽었다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나는 오기가 나서 법정에서 검사와 삿대질을 해 가며 싸웠다.
그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는 후일 국회의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