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_안보윤(소설가)

늑대의눈빛v 작성일 14.06.29 21: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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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얇은 책장 안에 고인 세계가 어떻게 이렇게 무거운가, 이름으로만 명시된 누군가의 삶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우리와 닮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지금부터 대통령님께 소개해드릴 것은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생이라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습니다. 광부였던 아버지가 죽은 뒤 청소일 하는 어머니를 도와 어린 시절부터 집안일을 해야 했던 평범한 시민입니다. 그녀는 성장한 뒤에도 정육점 판매일, 유치원 관리인, 가정부, 주방 보조와 홀서빙, 파티 관리인 등을 하며 쉴 틈 없이 지냅니다. 영리하고 성실한 카타리나는 고용주들의 상당한 신뢰를 받았습니다.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전망 좋은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으나 대출금을 갚기 위해 더 맹렬히 일을 해야 했지요. 그런 카타리나는 댄스파티에 참석했다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파티에서 만나 춤을 추고 하룻밤을 보낸 남자가 은행 강도에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수배자였던 탓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카타리나가 파국에 이르는 것이 사랑에 배신당한 개인적인 슬픔에 연유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남자가 은행 강도라는 얘기를 듣고도 카타리나는 의연합니다. 남자가 떠났어도 그녀에게는 충실히 이행할 다음 일상이 있었으니까요. 황색 언론이 그녀를 뒤흔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정부를 대변하는 언론지 <차이퉁>의 기자는 카타리나의 생애를 샅샅이 파헤칩니다. 카타리나의 고용주들과 어머니, 전남편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그것을 왜곡해 보도하지요. 선정적인 문구와 허무맹랑한 음모론, 대서특필된 허위기사에 휘말린 카타리나는 순식간에 강도의 정부이자 공산주의자, 파렴치한 창녀로 전락합니다. 언론에 선동당한 군중들까지 그녀를 공격하지요. 그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진행됩니다. 결국 카타리나는 <차이퉁> 기자를 살해한 뒤 자수합니다. 선량한 소시민이었던 카타리나가 범죄자가 되는 데에는 고작 닷새가 소요될 뿐입니다.


카타리나는 작가 하인리히 뵐이 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카타리나의 삶이, 그녀를 범죄자로 몰아가는 조직의 오만한 횡포가 우리의 것과 실로 닮아있지 않습니까? 대통령님이 이 책과 마주한다면 제목 옆에 작지만 단단하게 붙어 있는 부제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소시민―이들에게 명예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다만 이어가는 것, 성실한 삶에 대한 약간의 보상으로 자신의 좁고 사각진 방에서 머릿내 풍기는 어린 자식과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 고작 그 정도일 것입니다. 재난현장에 찾아가 기념사진을 촬영하거나 진실을 외면한 채 또 다른 카타리나를 양산하고 있는 누군가의 천박한 명예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카타리나가 잃어버린 명예는 소박한 삶 자체니까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하인리히 뵐이 이 소설을 발표한 때는 1975년입니다. 사십여년 전 쓰인 소설이 왜 우리에게는 현대소설일 수밖에 없는지 대통령님, 이 책을 읽으신 뒤 꼭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_안보윤(소설가) (::문학동네::) |작성자 댄스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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