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_이신조(소설가)

늑대의눈빛v 작성일 14.06.29 21: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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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에세이를 쓰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정식 데뷔도 하신 에세이스트이신 만큼 에세이란 장르에 남다른 이해와 애정을 갖고 계실 듯합니다. 해서 이 자리를 빌어 특별한 에세이스트 한 분과 그 분의 책을 소개해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서경식입니다. 그간 서경식님은 여러 권의 에세이집을 출간하셨는데, 그 책들은 모두 ‘번역서’입니다. 서경식님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입니다.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음에도 한국에서 발표하는 모든 글이 ‘번역’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재일교포의 슬픈 정체성이 역설적으로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재일교포가 우리 근대사에 유난히 아픈 이름이란 것을 대통령님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대통령님과 비슷한 연배인 서경식님이 에세이스트의 삶을 살게 된 데에는, 그 분의 남다른 가족사가 크나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혹시 서경식님의 둘째형과 셋째형인 서 승, 서준식님의 이름을 알고 계신가요? 71년에 있었던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기억하고 계시진 않나요? 당시에도 대통령님은 지금처럼 청와대에 계셨기에 여쭤보는 말씀입니다. 서경식님의 두 형은 조국을 배우겠다는 뜻을 품고 일본을 떠나 한국의 서울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독재정권에 의해 조작된 간첩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투옥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둘째형인 서 승님은 살인적인 고문을 이기지 못해 분신을 시도, 전신에 끔찍한 화상을 입고 맙니다. 두 형제는 정치범으로 각각 19년과 17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


일본에 남은 가족들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위태로워집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으로서의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던 서경식님은 두 형의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 5년이 지나도, 7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계속됩니다. 감옥의 두 형은 때때로 고문과 단식투쟁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그 사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차례로 부모님이 돌아가십니다. 대통령님께서도 불행한 상황 속에서 양친을 잃은 경험이 있으시니 서씨 형제분들의 비통함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두 형이 투옥된 지 12년째 되던 해, 서경식님은 생애 처음으로 유럽 여행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홀리듯 유럽의 여러 미술관을 순례하며 서양미술의 걸작들을 감상합니다. 서경식님의 첫 책인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 책은 단순한 여행기일 수 없으며, 고상한 미술 해설서일 수도 없습니다. 서경식님은 당시 자신이 접했던 예술작품들을 숨막히는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문 같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서경식님은 역사의 아픔과 시대의 모순을 뜨거운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미술작품에 대한 뛰어난 에세이들을 연이어 발표합니다.


대통령님, 서경식님의 미술에세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청춘의 사신>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다른 모든 책들도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또한 그 분의 아픈 가족사와 서 승, 서준식 두 형제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_이신조(소설가) (::문학동네::) |작성자 댄스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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