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 피습 '민족정기 짓밟힌 국치일'

황매력남 작성일 20.06.12 1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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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bs.co.kr/news/view.do?ncd=4464413&ref=A

시대가 어느때인데 아직도 친일청산 얘기를 하는거야!!!!

 

맞는 얘기다 시대가 어느때인데 아직까지도 친일청산 얘기를 꺼낼 수 밖에 없는 이 상황이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6월 6일은 현충일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1949년 6월 6일은 친일파 청산의 유일한 기회를 이승만이 날려먹은

치욕의 날이기도 하다.

 

해방후 1947년 친일파 청산을 외치는 끊임없는 민중의 소리에 드디어 친일청산 특별법을 제정하였으나

미국의 반대에 의해 시행되지 못하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이후 맥아더장군의 포고령https://ko.wikipedia.org/wiki/%EB%A7%A5%EC%95%84%EB%8D%94_%ED%8F%AC%EA%B3%A0%EB%A0%B9에 의해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군정에 의하여 모든 행정권이 이행되었다.

이 포고령으로 인해 남과 북은 38선을 기점으로 분단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북한은 친일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한 반면 남한은 맥아더장군 포고령에 의하여 해방직후 친일청산에 실패하게 되었다.

일본의 패망 직전 남한에 있던 당시의 친일파들과 일본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도망갈 계획을 하였으나

 

맥아더장군은 포고령을 통해 기존의 행정인력들은 그대로 남한에 남아 계속하여 행정업무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로인해 당시 요직에 있던 친일파들은 계속해서 요직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노덕술등..

 

당시의 미국은 일본과 남한이 사회주의체제로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일본의 전범들과 유대관계를 맺었으며

1947년 친일청산 특별법역시 유대관계에 있는 친일 인사들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정부는 자체 법률을 적용하여 드디어 반민족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으며

염원하던 친일파 청산작업에 들어간다.

전국에서 접수된 고발장에 의해 약 7천여명의 반민족자를 추려내었으며 그중 기소된것은 약 200여명이었다.

 

계속하여 추가 조사를 통하여 더 많은 반민족자들이 기소되어 처벌 받았어야 했으나

노덕술을 구속함과 동시에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당시 노덕술등 칠일파 출신 경찰들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암살자였던

박민태의 자수로 다행히 실패에 그쳤다. 그로인해 노덕술은 구속 수감되게 된다.

 

이승만씨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노덕술의 석방을 계속해서 요청하였다.

또한 반민특위 활동을 계속해서 방해하였으나 실패에 그치자 당시 친일파출신 경찰들을 동원하여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사무실을 습격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반민특위위원들과 직원들은 모두 구속되었다.

 

그로부터 몇일뒤 김구선생님이 암살 당하며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친일파들을 깡그리 처벌할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는 그 동력을 잃고 결국 친일파들은 모두 풀려날수 있었다.

 

6월6일은 현충일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역사의 치욕의 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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