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과 함께] - 8. 고백하는 거야?

도리돌2 작성일 20.10.25 22:45:58 수정일 20.11.26 11: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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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치질을 마치고 들어온 방 풍경이 낯설다. 살짝 오른 취기 탓도 오랜만에 얻어 태운 담배 탓도 있겠지만 방 배정을 받고 짐을 풀 때부터 지금까지 몇 번을 들락날락했지만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숙소에서 묵는 어색함이 아니라 밤의 침대 배치가 문제다. 아무리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침대를 놓기 위한 선택이라곤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다른 알베르게라면 기껏해야 세 개의 이층 침대를 간신히 놓을 수 있는 공간에 얼키설키 놓은 침대가 무려 다섯 개다. 더군다나 침대 세 개는 억지로 욱여넣은 것처럼 붙어 있어 잘못하면 순간의 움직임으로 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는 배치였다. 그 세 자리 중 두 자리가 수정과 내 자리다.

 

 그래도 대부분 순례자는 이런 구조 속에서도 나름의 방법으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이따금 같은 알베르게 묵고 있는 휴고와 그의 여자친구는 한 침대 한 침낭에 쏙 들어가 잠을 자고 있었고 준영은 성경을, 루다는 여행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숙소 밖과 판이한 방의 따뜻한 공기나 은은한 조명은 몸을 침낭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지만 아직 9시도 안 된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싶지 않았다.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달도 없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웠다. 조명이 거의 없는 시골 마을이나 이른 새벽 마을을 벗어나며 별들의 강을 마주한 적은 있지만 일부러 별 자체에 목적을 가지고 외출을 한 적은 없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선지 루다와 준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사실 목적은 한 사람이었다. 그 시커먼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모두에게 물은 것뿐이다. 다행히 수정은 흔쾌히 대답하고 나섰다.

 

 밤공기는 낮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찼다. 쉬고 있던 복장 그대로 밤마실에 나서려는 수정에게 외투를 권한 건 확실히 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얇은 외투 한 겹만으로 차가운 밤공기와 바람을 막는 데 무리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선명한 은하수를 보고 싶은 생각에 마을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게다가 어둠이 점점 짙어질수록 추위에 공포까지 더해진 수정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내 옷깃을 잡고 있던 수정의 두 손을 통해 떨림이 느껴졌다. 슬그머니 손을 뻗어 옷깃을 잡은 수정의 두 손 위에 포갰다. 체구만큼이나 작은 손이 한 손에 쏙 들어왔다. 개수작의 의도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온기를 조금이라도 나눌 목적이었는데 다행히 수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내 손을 잡고 비비며 온기를 가져가는 과감함까지 보였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시골 마을의 외곽 길은 아무리 잘 다져놓았다 해도 도로처럼 고르진 못했다. 삐뚤빼뚤 돌이 튀어나오거나 군데군데 아이 주먹만큼씩 꺼진 곳도 있었다. 시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밤눈이 어두운 수정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집중하며 걸었지만 나는 이따금 하늘을 보며 속으로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조금 더 완벽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참아야 했다. 워낙 작은 마을이었기에 알베르게를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마을 외곽 공터에 들어섰을 때 수정에게 하늘을 소개했다. 

 

 “와…….”

 

 짧게 터져 어둠 속으로 슬그머니 사라지는 낮은 탄성과 함께 수정의 표정은 환희로 가득 찼다. 지난 며칠 동안 짧게 만났던 은하수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수만의 별들이 만들어낸 물줄기는 어디서부턴가 어딘가로 흐르고 있었다. 어째서 선조들이 굳이 은하수(銀河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문득 탄성을 삼키고 눈을 떼지 못하는 수정의 표정이 궁금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대충 뒤로 졸라맨 검은색 파마머리, 조금이라도 더 많은 하늘을 담으려는 듯 크게 뜬 눈, 높지 않은 콧대와 약간 튀어나온 앞니가 보일 만큼 벌린 입……. 결코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안경을 벗은 수정의 외모는 사실 그저 그랬다. 그런데 지극히 평범한 그 외모가 눈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달빛에 반사된 수정의 모습 하나하나가 문신처럼 눈과 머리에 새겨졌다. 머리로 생각한 일이 아니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그 모습을 잊으면 안 된다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수정의 두 손은 내 손 안에서 옷깃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빠져 자각을 못 하는 것인지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은하수에 빠진 채였고 몸은 현실을 견뎌내고 있었다. 천천히 수정의 손을 놓고 등 뒤에 서서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지금껏 손을 잡거나 머리를 쓰다듬을 때와 달리 처음으로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감정에 취해 너무 과한 행동을 한 건 아닐까? 수정이 놀라자 덜컥 겁이 났다. 물론 불순한 의도가 다분했지만 추행이나 그에 준하는 행동이 목적은 아니었다.

 

 “내가 너무 과했나?”

 

 “아뇨. 괜찮아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대한 수정의 대답은 나직했다. 부끄러움인지 두려움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공포에 질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인위적인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마을 외곽의 공터, 이제 만난 지 열흘도 되지 않은 건장한 남자, 사전 동의도 없는 과감한 신체접촉……. 나… 실수 크게 한 건가?

 

 “근데…….”

 

 괜찮아요. 근데…? 뒤 내용이 앞 내용과 반대될 때 쓰는 그 근데? 큰일 났다. 기분에 취해, 그녀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를 착각하고 있었다. 말만 하지 않았지 암묵적으로 동의 된 감정이 서로에게 있다고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손을 놓고 도망쳐야 하나? 알베르게 들어가서 짐만 챙겨서 도망쳐야 하나? 그럼 진짜 범죄자 아냐? 휘몰아치는 범죄자가 될지 모를 현실적 공포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조심스럽게 수정의 말은 이어졌다.

 

 “저, 포옹하는 거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망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아들은 스페인 콩밥을 먹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도 거의 안은 적 없어요. 근데 오빠가 안는 건 불편하지 않아요.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싫거나 거부감이 생기진 않아요.”

 

 응? 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거야?

 

 “방금 그 오빠한테 고백하는 건가요?”

 

 “네? 왜요?”

 

 아, 맞다. 이 녀석은 그냥 멍청이였지. 도무지 이런 쪽에 개념이 없는 사람이다. 혼자 설레고 혼자 기대한 내가 바보지. 자기가 한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다 알고 계획된 행동일 수도… 아니. 열흘이 넘도록 봐온 수정은 절대 그렇게 용의주도한 사람은 못 된다.

 

 끈질기게 자신이 한 말과 고백의 상관관계에 대해 꼬리를 물고 매달리는데 진심으로 그 작은 머리에 박치기하고 싶었다. 이걸 어쩌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주면서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나? 내 사람이라고? 이젠 자신을 속이는 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지금까지 애써 부정해 왔지만 이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그 감정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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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사진을 열심히 찾아봐도 당시에 찍은 사진 중 올릴만한 사진이 하나도 없네요ㅠㅠ 

똥손이 어디 가겠느냐만은… 그래도 그나마 건질 게 있다고 지극히 주관적으로 판단되어 3년 후 두번째 걸을 때 찍었던 사진만 올립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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