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이야기# [기적과 함께] - 10. 미안해요. 미안해요.

도리돌2 작성일 20.11.29 23: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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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기가 부족했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용기가 안 났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이 수정과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었기에 오늘 안에 확실한 답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마음 역시 내게로 향하고 있다고 확신했는데 어제부터 보인 그녀의 반응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사귀기로 했냐는 루다의 질문에 딱 잘라 아니라고 했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모습만 보면 여전히 멍청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지금까지 내가 모든 것을 착각했거나 어리숙한 척 연기하는 고수(高手)에게 속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뭐가 됐든 오늘 안에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아주 하찮고 비겁한 선택을 했다. 

 

  이 일행의 마지막 공통 목적지인 부르고스(Burgos)로 출발하는 아침 올모스 데 아따뿌에르까(Olmos de Atapuerca) 알베르게 앞에서 넌지시 물었다. 대상이나 관계를 특정 짓지 않고 연애에 대한 의견만 물었다.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온다면 오늘 밤이 지나기 전 확실하게 물어 답을 얻고, 부정적인 대답이라면 직접적으로 거부를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으며 마음을 정리하면 그만이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비겁하고 졸렬한 수작이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수정이 아무리 어리숙해도 그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절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이 여자는 그런 건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이 지금까지 이어온 관계의 지속을 바랐다. 함께 걷고 함께 식사하고 서로에게 대하는 행동은 요즘 말로 썸타는 행위는 지속하길 바랐다. 화가 났다. 예의가 없는 건지 가지고 노는 건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상대의 감정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났다. 그런데도 아직 감정을 확실히 정리하지 못하고 그녀의 걸음에 맞추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도대체 이 사람과 발맞춰 걷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7명에서 4명의 일행이 됐던 첫날 비아나에서 부르고스까지 5일의 저녁 메뉴를 결정했었다. 볶음밥, 파스타, 오므라이스 등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과 부족한 재주로 세운 계획이었지만 그날그날 알베르게에 남은 재료에 맞춰 요리하다 보니 계획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도 일행이 함께하는 마지막 날엔 루다와 내가 가지고 있던 라면 3봉지와 아껴왔던 재료를 쏟아내 만찬을 즐길 계획이었다. 그런데 막상 부르고스에 도착해 보니 주방이 없다. 주방시설도 식기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세 개의 전자레인지가 전부였다.

 

  차라리 잘 됐다. 어차피 오늘 이후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과 굳이 얼굴 마주 보며 어색하게 있는 것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게 낫다. 분명 마지막 날이니만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겠지만 식당을 이용하는 부담 역시 가지고 싶지 않았다. 마침 일요일이었기에 미사가 저녁 시간에 있을 테니 핑곗거리는 적당했다. 

 

  예상대로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주일 미사를 핑계 대고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일부러 피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에 루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봤지만 모른 척 무시하고 축제로 한창 북적거리는 번화가로 나왔다. 일요일이라 식료품 가게가 전부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축제 덕에 빵이나 과일을 파는 곳은 꽤 있었다. 다시 열흘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가장 싸고 큰 빵을 하나 사서 공원 한편에서 다시 청승을 떤다. 전에도 이렇게 맛이 없었나? 열흘이 넘도록 누군가와 함께 보낸 온기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브라보! 성당 옆에 문을 연 슈퍼마켓이 있다. 축제 때문인지 대도시답게 관광객을 위한 것인지 알 길도 알 필요도 없다. 그저 술을 살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왁자지껄 골목을 울리는 활기 넘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지금까지 조용한 곳에서 말 그대로 휴식을 취하던 것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대도시의 소란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불편했다. 자자. 얼른 마시고 취기로 자고 일어나 내일 목적지를 향하면 된다. 여기는 그저 스치는 곳일 뿐이다. 누군가 식당에 두고 간 일회용 플라스틱 와인 잔에 와인이 떨어지며 울리는 소리가 초라하다. 안주 하나 없이 술만 들이켜는 내 모습도 처량한 건 마찬가지니 신경 쓰지 말자.

 

  시간은 어느새 10시에 가까워졌다. 한 시간이면 훌쩍 비울 것 같던 와인 두 병 비우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아직도 반병이나 남았다. 남은 술이 아까워 억지로 잔을 붙들고 있지만 취기도 이제 어느 정도 올라 바로 잠들어도 좋을 상태다. 그만 마시자. 자리로 돌아와 물병을 가져와 남은 술을 덜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점점 커졌다. 지난 열흘 동안 함께 하던 이들의 목소리였다.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붙잡고 있는데 그들이 먼저 발코니 문을 열고 다가왔다. 조금 전 식사 자리를 피했던 원망은 없고 홀로 청승 떠는 걸 타박할 뿐이다. 예의상 잔을 권했지만 몇 마디 인사와 함께 다들 자리로 돌아갔다. 

 

  화장실에 다녀와 침대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1층에 누워있던 수정이 조용히 불렀다. 사다리를 오르다 말고 그녀의 곁에 슬쩍 앉았다. 

 

  “왜? 내일 오빠랑 헤어질 생각 하니까 아쉬워서 잠이 안 와?”

 

  술기운과 상관없는 질문이다. 농담처럼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 속에서 그녀의 숨은 진심의 한 조각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가요? 여기 와서 계속 같이 다녔는데 루다하고 저만 남기고 다들 헤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아쉽고 너무 서운해요.”

 

  딱 예상한 만큼의 대답이다. 언제나처럼 직접적인 대답은 회피하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대답이다. 속내를 감춰 스스로 상처받지 않고 악역도 맞지 않으려는 듯 애매모호한 처신은 역시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다. 물론 나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적어도 표현은 꾸준히 해왔다. 그에 대한 대답만 바랄 뿐이었는데.

 

  “너도 참 징하다. 끝까지 그렇게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만 하냐. 됐다. 자라.”

 

  더이상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나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다리가 체 펴지기도 전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녀가 손목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화… 내지 말아요. 죄송해요. 오빠 기분 상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하아, 운다. 이렇게 또 나는 악역이 된다. 나도 울어버릴까? 눈물의 의미를 모르겠다. 내일이면 헤어질 열흘간의 일행이 화를 내서? 아니면 그 남자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서? 지금 이게 눈물 흘릴 타이밍인가? 이해할 수 없는 마음과 달리 몸은 이미 수정과 나란히 누워 그녀의 머리를 살짝 가슴에 품고 다독였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수정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뭐가 그리 미안한지 주문처럼 사과를 되풀이할 뿐이다. 이러다간 지쳐 잠들 때까지 눈물을 멈출 것 같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뭔가 획기적이고 확실하며 인상적인 방법을.

 

  “예전에 어떤 책에서 봤는데… 여자 주인공한테 첫사랑과의 추억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여자가 하는 말이 애인이 자신의 눈물을 먹어준 게 가장 기억에 남았대.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입맞춤하듯 다가와 입술로 눈물을 닦아줬을 때 거짓말처럼 눈물이 멈추고 마음이 풀어졌던 기억이 가장 크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오글거리고 유치한 개수작은 도대체 어디서 솟아난 걸까. 단순 술기운이었을까? 아니면 카미노의 기적이라는 것을 잠깐이나마 믿었던 걸까.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말을 마치며 당연하다는 듯 입술을 수정의 얼굴로 가져가 눈물을 훔쳤다. 마치 양 볼에 입을 맞추듯 번갈아 수정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입술로 훔쳐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개수작이 먹힌 건지 입술로 눈물을 훔치는 행동이 먹힌 건지 수정의 눈물은 더는 흐르지 않았다. 눈물이 멈추고 한동안 말없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과감한 신체접촉 후 찾아오는 어색함과 애틋함이 더해졌다고 생각하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천천히 다가가 수정에게 입을 맞췄다. 놀람도 거부도 없었다.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감정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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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복잡함 탓이었는지 부르고스 사진은 많지 않네요..ㅎㅎ

마지막 사진은 알베르게에서 홀로 청승맞게 와인 마시던 테라스에서 올려다 본 장면입니다.(3년 뒤에 다시 걸을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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