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에, 마누라께서 가까이 사는 처형댁에
뭐 좀 갔다 주라고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걸어가면 오분거리인데,
바람도 심상찮게 불고,
무엇보다 황금같은 주말에 노동 같은 심부름이 싫어서,
차에 시동을 걸었지요.
저희 아파트 뒤로 샛길이 길게 있는데,
그 길이 약간 오르막이 져 있습니다.
얼릉 다녀와서 열심히 하던 위닝,
그 엘 클라시코 더비를 마무리 해야겠다 싶어,
2차선 도로 오르막길을 조금 밟아 올라갔더랬죠.
그 도로는 근방 아파트 입구가 두어개 연결되어 있는데,
반대차선에서 감장색 오피러스가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피러스가 제 옆을 스쳐갈 때 쯤,
오마이갓!
아파트 입구에서 차가 밀고 나오는 것이였습니다.
제차의 헤드 쪽으로 쑥 들어오는데...
순간,
이건 박았구나.
황금같은 나의 주말은 보험사와의 통화,
정비소로의 출장,
개념없는 운전자와의 말다툼으로 얼룩지겠구나 싶었죠.
하지만,
무슨 반사 신경에서 였는지,
도로 옆 인도에는 사람이 없다는 걸 인지했고,
저의 차가 SUV인지라,
그냥 인도위로 차를 올렸습니다.
정말 1센티미터 차이로 그 차는 제 앞을 지나쳤고,
인도에 반쯤 걸쳐진 제 차와
제 앞에서 비스듬이 새워진 그 차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내려서 욕이라도 한바가지 해줘야겠구나 생각하는 찰나,
그 차의 비상깜빡이가 켜집니다.
하지만 비상깜빡이로 저의 분노하고 놀란 이 마음을
어찌 진정시키겠습니까.
“초보운전”
아...
아.....
상대차 뒷유리에 너무 애처럽게 붙어있던 그 네글자.
그리고 앞자석으로 보이는 여자 운전자의 가녀린 어깨와 뒷머리...
그냥 넘기기로 했습니다.
뭐 박지도 않았고,
오늘은 엘 클라시코 더비를 치러야 하는 중요한 주말이니까요.
초보운전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근데,
적어도 옆으로 지나가면서 인사라도 해주면 좀 좋을까요.
뒤도 안돌아보고 저만치 도망가 버립니다.
아무튼 뭐 이래저래 미션을 완수하고
다시 그길을 따라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근데 아까 그차가 그 길가 갓길에 비상깜박이를 키고,
운전자가 차 주위에서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파란색 프라이드.
분명 그 차가 맞았습니다.
통화하는 처자는 핑크색 벨루어 츄리링을 입고,
까만색 모자를 눌러쓰고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뭐.. 이쁘더군요.
내 스타일이야..
천천히 그 차 옆으로 지나가려는데,
그 아가씨,
제차를 보더니 후다닥 뛰어 차로 뛰어 들어가려 합니다.
문을 잡고 열려고 하는데,
문은 열리지 않고,
차키를 주머니에서 빼다가 놓쳐 버립니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요.
저의 차를 기억하는 것일까요.
당황해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데,
차키를 놓치고 문을 당기고 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워 보이던지...
혼자 큭큭거리면서 그 차옆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문여는 것을 포기했는지,
차키도 못줍고 차 유리창에 머리를 푹 박고 뒤도 안돌아봅니다.
천천히 지나가다가 차를 세우니까
아예 제 차 반대쪽으로 고개를 박고 돌아볼 생각을 안합니다.
창문을 반쯤 열고
“저기요”
불렀습니다.
대답 안합니다.
여자니까 무서웠겠지요.
“저기요”
“네..”
박고 있던 머리를 슬며시 돌리면서 쳐다보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 이뻐..
검정모자 밖으로 늘어진 갈색 웨이브 머리에,
화장도 안했는데 어찌나 피부가 뽀얗던지..
“초보운전이세요?”
“네...”
저를 쳐다보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채 대답만 합니다.
정말 귀엽더군요.
요즘 문제되는 택시, 지하철 뭐 그런 여자들과 다른,
그냥 겁먹고 발발 떠는 듯한 그 모습 보니,
초보운전이 얼마나 놀랐겠나 싶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쁘니까...
“내가 무서워요? ㅎㅎ”
그제서야 모자사이로 빼꼼히 눈을 보여주며 쳐다보는데,
거참.. 눈도 이뻐...
저는 그냥 운전연습 열심히 하시라고,
운전 조심히 하시라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딱히 분홍색 벨루어 츄리링에 드러나는 몸매가 이쁘다거나,
피부가 너무 뽀얗게 드러나서 얼굴이 보고 싶었다거나,
그런건 아닙니다.
저는 유부남 이니까요.
“운전 조심히 하세요, 큰일날 뻔 했네요 ㅎㅎ"
멋쩍게 웃으며 얘기했지요.
저 분명 욕도 안했고,
화도 안냈고,
위압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눈물을 글썽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죄송합니다”
이 말을 듣긴 들었는데,
내가 더 미안해 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려서 눈물을 닦아주면서
가까운 커피숖에서 운전에 대해 가르쳐 주고 싶은 이유는
단지 그 아가씨가 이뻐서 였을까요.
아무튼 유부남인 것과 블랙박스가 없는 것이 참 아쉬운 하루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