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내리고

쌈바디쌈 작성일 06.02.24 19: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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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눈을 뜨자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축축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눈을 감은채 귀를 귀울였다. 빗줄기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는 그친걸까?

지금의 시간이 언제인지도 잘 모르겠다 오후 1시? 2시?

그 어떤것도 나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고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도 잠시였을뿐 어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

기억의 재생과 함께 밀려오던 현기증 그리고 외로움.

다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기억은 이미 겉잡을 수 없이 되살아나 버린채 나를 다시 잠들지 못하게 했다

비현실적인 지금 이 공간에서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체험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래 지금 가고 있어..어..그래..조금 있음 도착해..응..그래..미안해 이따봐."

지금 시간은 아마도 10시에서 10시 반쯤 된 것 같다.

우리가 자주 만나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너무 늦장을 부렸는지 도착하기도 전에 30분이 지나 버렸다.

뛸까 생각했지만 굳이 서두를 이유도 없다는 생각에 그냥 걸었다.

지혜를 다시 만나는게 몇일만이던가? 20일? 아무렴 어떠랴.

지혜와는 방학식을 하던 그날 밤에 헤어졌었다.

헤어진 이유는 어느 연인듯이 그렇듯이 시시콜콜했다.

더 이상 맞춰주기 힘들다던가. 너의 성격은 나와 맞지 않는다던가 하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지혜와 내가 헤어진 이유는 성격이나 배려의 문제가 아니였던 것 같다.

그냥 서로가 함께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린 헤어졌다.

‘쿵’

갑자기 무겁고 축축한 천둥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바라보니 별은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올 것 같다.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까닭에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하늘을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쳐다 볼 때즈음 나는 카페에 도착했고 카페 유리창 너머로 지혜가 보였다.

지혜는 우리가 자주 앉던 카페의 구석자리에 앉아있었다.

순간 지혜의 그 모습은 너무나 당연해 보였기에 그 모순된 상황이 오히려 나에겐 낯설게 느껴졌다.

낯선 문 손잡이를 밀어제치고 나는 지혜에게 다가갔다.

“어? 왔어?”

“응 미안 많이 기다렸냐?”

“어! 커피값은 니가 내!”

여전히 지혜다운 반응. 하긴 20여일이라는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연인이던 시간과 지금 우리의 시간. 달라진 것은 없다.

지혜의 머리에선 여전히 같은 샴프 향기가 났고 언제나처럼 헤즐넛과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비스켓을 주문해 놓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서로의 가슴속에 상실감이라는 그림자가 다시 돌아온 것 그 뿐일것이다.
“잘 지냈어?”

사실 지혜가 20일간 어떻게 지냈는지는 내겐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가 늘 그렇듯 그저 말을 하기전에 붙이는 일종의 습관일 뿐이다.

우리는 20일간의 공백에 대해 읊기 시작했고 ‘아 그래?’ ‘진짜?’같은 대답으로 서로의 공백을 채워줬다.

‘톡’

창밖을 보자 유리창에 누군가 흘겨놓은듯 물방울이 튀겨있었다.

‘톡, 톡, 토토도독’

물방울들은 카페 유리창을 채우기 시작했다.

결국 비가 오고 있다. 우산이 없는데 집까지 뛰어간다던가 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왠지 짜증이 났다.

“.....않았어?‘

“응?뭐라고?”

“나를 좋아하지 않았었냐고?”

빗방울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갑자기 나에게 찾아온 질문.

나는 지혜를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지혜의 머리에서 나는 샴프냄새가 좋았고 손의 차가운 감촉도 좋았으며 약간 코맹맹한 지혜의 목소리도 좋았다.

“좋아했어.”

“그럼 지금은?”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지금은? 우리는 이미 헤어졌고 서로의 마음을 정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한다.

순간 이 카페의 소파의 감촉이 낯설게 느껴졌다. 카페의 조명도 커피의 향도...

“지금은 아니야. 우리는 헤어졌으니까. 그만큼 시간도 흘렀고..”
“그래...미안해 갑자기 이런 이야기 꺼내서. 아! 어제 티비에서..”

다시 우리는 아무 의미없는 말들을 시작했고 나도 지혜가 꺼냈던 말에 더 이상 의미를 담지 않았다.

확인이라는 작업. 지혜의 말은 단지 확인일 뿐 이였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재인식으로써 현실을 더욱 정확히 분별할 수 있다.

우리에겐 그런 작업이 필요했다.

“아 이런 저런 말을 하다보니..히엑! 벌써 열한시 사십오분이야!”

정말이다. 벌써 시간이 한시간이나 지났던 것이다. 창밖을 보니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있었다.

“우산 가져왔어??”

“어?..어 아니야..뛰어가면 되 집이 가까우니까”

“그래? 그럼 일어나자 집에 늦게 가면 부모님이 또 뭐라고 하시겠다. 아차! 커피 잘먹엇어.”

결국 내가 내는건가. 아무렴 어떠랴..커피값정도는 낼 수 있다.

지혜는 먼저 카페를 나갔고 나는 커피값을 계산 했다.

나는 우리가 앉았던 자리를 다시 보았고 그제서야 나는 모순되고 낯선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촤아아아아’

생각보다 엄청 내리는 비. 양말이 비에 젖어 질척 거리는 것 만큼은 질색이라 빨리 뛰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갈게!”

“잠깐만!!!”

분홍색 우산을 들고 있던 지혜가 나를 불러 세웠다.

“왜??”
“나는 아직 니가 좋아.”


“하지만 넌 언제나 날 좋아하지 않았어.”

뭐?

“그게 우리가 헤어진 이유야.”

아니야 난 널 좋아했어

“잘가”







지혜는 그리곤 빗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걸었다. 신발 속까지 물이 차 들어와서 양말은 이미 질척해진지 오래였다.

그런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지혜를 좋아했다. 지혜의 향기를 지혜의 체온을 지혜의 진동을...

하지만 나는 지혜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세계였고 나만의 이미지였다.

나는 지혜를 좋아하지 않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니 어쩌면 빗물이 였을지도 모른다.

그런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지혜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렸고 내 몸은 비에 젖어 흘러 녹아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감촉은 내겐 비 현실적이였고

가슴속에 생긴 커다란 그림자만이 나의 현실이였다






다시 눈을 떳을때 방안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싸여 있었다.

지금 시간은 얼마나 됐을까 11시? 아님 새벽 1시?

창에선 차분하고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창가의 책상에 앉았다.

책상의 연필과 노트 그리고 어제 먹던 커피가 남은 컵.

이제야 무슨 생각이든지 할 수 있을것 같았다.

가슴 속의 그림자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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