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짜증이 났다. 잘만 사용하던 컴퓨터가 갑자기 먹통이 된 것이 이유였다. 그는 내일 회사에서 해야 할 프리젠테이션 준비에 컴퓨터를 이용해야할 작업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그러나 이 불성실한 컴퓨터는 그저, “나는 주인의 마음 따위는 고려 대상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 마냥, 이번에도 XP로고 화면에서 쥐 죽은 듯 멈춰버렸고, 더 이상 묵묵부답, 반응을 보일 기미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결국 부팅화면에서 안전모드로 들어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 방법은 먹혀들었고, 급한대로 안전모드에서 발등의 불 끄듯이 빠르게 작업을 했다. 몇 시간의 작업이 끝난 후엔 아파트 배란다로 나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을까. 불안했다. 담배를 피울 때는 아무도 안 보는데서 피워야 한다. 특히 반대쪽 아파트단지가 훤히 보이는 이런 탁 트인 공간에서의 흡연은 더욱 불안했다. 일종의 강박증이었다. “내가 좋아 담배가 좋아?” 라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해오던 그녀의 입모양이 떠올랐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고, 아침의 담배 맛은 썼다. 퉷.
부재중전화가 남아있었다.
2006/5/xx/ 11:25 나야
2006/5/xx/ 11:25 나야
2006/5/xx/ 11:26 나야
그녀였다. 그녀의 평소 습관대로 여러번의 전화가 남겨져 있었다. 그는 전화를 되돌려 보냈다.
“웬일이야? 이런 아침에 전화를.”
“응, 같이 쇼핑이나 할까 해서, 오늘은 식료품.”
“아침에 웬. 어제도 했잖아.”
“오늘은 식료품이라고, 어제는 옷 사러 간 거였잖아. 식료품은 필수야 없으면 죽지.”
“나는 피곤해. 휴식도 마찬가지로 필수야. 없으면 죽어.”
“다 왔다. 어서 나와. 집 앞이야.”
그는 배란다로 나왔다. 그녀의 새빨간 페라리360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의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서와”라고 그녀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외출복으로 주섬주섬 갈아입고,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너그러운 빨간색 페라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페라리의 조수석에 탔다. 그녀의 자동차는 그를 위해 언제나 열려있었다. 그가 타자 자동차는 ‘부릉~’ 하고 급가속 했다.
“오늘은 무얼 살지 메모해왔어?”
“아니, 귀찮아서 안했어.”
“왜, 어제 분명 앞으로 쇼핑할 땐 무얼살지 메모해 오라고 했잖아. 아무런 준비 없이 쇼핑하는 건 충동구매의 심각한 요인 중 하나라고, 메모해오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말했잖아.”
“자기, 그래봐야 식료품이야. 그깟 식료품 사는데도 메모가 필요해?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쓰다보면 인생이 복잡해져. 자기야 우리 그냥 쉬엄쉬엄 살자. 응? 그러고 보면 자기 가끔 컴퓨터 같을 때가 있어. 계산하고 분석하기 좋아하는 컴퓨터.”
“말도 안돼. 수영을 전혀 못하는 맥주병인 사람이 우리나라 올림픽에 자유형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는 것만큼이나 우스운 얘기야. 컴퓨터는 말을 잘 듣지. 입력한 값에 따라 값이 나오게 되어 있어. 보석을 넣을 경우 다이아가 나오고, 오물을 넣을 경우 쓰레기가 나오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보석을 넣던 쓰레기를 넣던, 한가지만을 내놓지.”
“그게 뭔데?”
그녀의 페라리는 L백화점의 2층, 자가용 승용차 전용 주차장에 주차되어졌다. 몇 안되는 차들 사이에 주차를 마치자 그녀의 새빨간 페라리는 일반서민들의 차들 사이에서 더욱 돋보였다. 그녀만큼이나 돋보였다.
그녀와의 쇼핑은 어렵지 않았다. 쇼핑카트를 툴툴 끌면서 그녀가 웃으며 들고오는 식료품들에 맞장구나 쳐주면 그만이었다.
“우리 집 계란 다 떨어졌잖아.” 하며 유정란 한판을 들고 왔을땐, “그걸 품으면 병아리 한 박스가 나올거야. 그럼 그걸 들고 초등학교 앞에서 장사해도 되겠어.” 라고 말하였다.
그녀가 키우는 애완견 비글에게 줄 고급 통조림을 집어왔을 땐, “비글 녀석 정말 좋아할거야. 자신을 먹는듯한 기분이 들만큼.” 이라고 말하였다.
커피가 떨어졌다며 커피믹스 코너로 가더니, 어떤걸 고를까 고민하다가 가장 비싼 커피믹스를 가져다 왔을 땐 , “맛보단 향취의 달콤함을 즐겨봐.” 라고 읊어주었다.
그리고 이대로 쇼핑을 끝내기가 못내 아쉬웠는지, 그녀의 손에 이끌려간 주얼리샵에서는 그녀가 골라준 로렉스시계를 품에 안고 “고마워, 잘 쓸게.” 라고 말해야했다.
그녀와의 쇼핑은 일종의 거래인 셈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그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유희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그녀의 자금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호의를 부여받는다. 게다가 평생 타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었던 스포츠카의 조수석에 타보기도 하고, 온몸을 값비싼 명품들로 도배하여 빛이 나는듯한 그녀의 옆에서 걷는 독특한 경험까지도 하게 된다.
그날도 그녀의 너그러운 페라리 차는 그를 그의 아파트 앞에다 내려놓았다. “전화할게~” 라며 손을 흔드는 그녀의 차가 저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니코틴이 필요하다는 증거다. 빨리 아파트로 뛰어 들어갔다. 외출후에 해야할 일반적인 작업들을 재쳐두고 컴퓨터방으로 들어갔다. 담배를 한 대 문다. 목구멍을 지나서 폐속의 폐포안으로 흡수되는 니코틴에 의해 그는 몸이 급속하게 안정을 찾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만나서면서 성역할이 바뀌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그에게 무언가는 선물하며 그의 관심을 이끌어왔고, 그는 그녀의 리드에 순순히 순응해 줄 뿐이었다. “후”하고 담배를 내뿜었다. 담배연기는 방안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컴퓨터를 켜고 안전모드로 들어가 보았으나 이제는 안전모드 조차 불가능이었다. 안전모드로 들어가는 도중에 컴퓨터가 멈추었다. 더이상 부팅이 안되는 것이다. 그녀가 사준 로렉스시계는 오후5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시계를 검지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시계는 찰그닥찰그닥 소리를 내며 회전했다. 시계에 박힌 보석들이 그만두라고 포효하는듯 했다. ‘탁‘하고 시계를 책상위에 놨다. 결정했다. 아무래도 컴퓨터는 A/S 받아야겠다. A/S 센터 전화번호가 머더라...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