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도 불었네

펠레일 작성일 06.04.19 17: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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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사당역





아침출근시간에 나를 그토록 밀치던 수 많은 인파들이 전부 어디갔는지, 점심시간의 지하철 역은 한산하기만 했다. 휘파람을 불어도 아무도 들을 사람도 없고, 혹시 들었다 하더라도 나에게 뭐라고 하진 않을것 같아서, 나는 되는 한 최대한의 고음을 휘리리 불어대었다. 이어폰을 통해 내 고막에 전해져 오는 음악소리를 휘파람으로 따라하면서, 그 클라이막스 부분이 너무 높아 내 휘파람 실력으로는 도무지 올라가질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제 밤 자기 전에 이불 뒤집어쓰고 불었을 때는 분명 올라간 부분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올라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음악은 말이지, 소리와 파동으로 이루어진 그 소피스티케이트한 세계는 말이야,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다음에 뭐가 나오는 줄 알아? 바로 도야, 정말 신기하지 않아? 누가 '시' 다음에 다시 도가 나온다고 생각했을까..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야, 도에서 진동수가 2배가 되면 왜 한 옥타브 올라간 도가 들리는 걸까? 왜 사람들은 그것을 같은 '도'로 인식하게 된 걸까? 같은 노래를 한 옥타브 높여 부른다고 해도 왜 사람들 귀에 아무런 이상 없이 들릴까? 왜지? 분명히 진동수는 2배로 변하였는데, 왜 사람들의 귀에는 같은 음로 인식 되는 건 왜인 걸까?






3옥타브 솔





내 휘파람의 음역대야. 정말 넓지? 대한민국 남자 육성의 평균 음역이 2옥타브 레라는 사실을 놓고 볼때 대한민국 남자의 평균보다 한 옥타브 이상으로 박쥐의 그 초음파의 영역에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거지. 믿을 수 없다고? 아니야 믿어줘. 정말 사실이니까 나를 의심하려고 하지마. 어제 저녁 내가 피아노를 옆에 놓고 도 레 미 파 솔....하면서 음역을 쟀더니 그게 정말 3옥타브 솔이 나왔더라니까.. 정말 대단해 난 타고났나봐... 휘파람 콘테스트이 생긴다면 난 최소한 입상은 하게 될거라는 걸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아....





나는 가끔 음악의 리듬에 맞춰서 걷는걸 좋아해. 그 음악이 헤비메탈 같은 하이템포의 곡이라면 나의 발걸음은 헤비메탈의 빠른박자에 맞춰 역동적으로 변하겠지. 그리고 그게 스무스한 발라드 음악이라면 내 발거음은 더욱 느릿해 지고 나의 몸짓에는 슬픈 감정이 녹아있게 될거야. 지금 같은 경우가 그래. 마사토혼다의 ‘Forget Me Not‘ 이라는 곡에 맞춰 나의 걸음은 바다거북만큼 느긋해져 있었지. 박자가 아예 없는 것 같다 라고 느껴질 정도의 기묘한 곡이라, 나는 이따금식 조용히 들려오는 드럼의 심벌소리에 맞춰 걸어야 했어. 그렇기에 나의 걸음은 더 이상 이상해 질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왜곡돼 있었어.






그거 알아?





사당역에는 지름길이 있다는 걸. 서울의 지하철역 사당역에는 지름길이 있어. 사당역은 환승역이야.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걸어가야 하는 길목이 길기로 소문이 자자하지. 오르락내리락 두 번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나면 지하철을 갈아타기도 전에 벌써 몸부터 지쳐 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게 돼. 그런 사람들의 노고를 아는지. 언제부턴가, 그 갈아타는 길목에 작은 문이 생겼어. 쇠철로 된 조악한 작은 문인데, 가끔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그 철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어. 그럴 땐 속으로 한번 ‘야호’하고 작게 외치고서 그 문을 통해 가는 것이 좋아. 그렇게 하면 두 번 오르내려야할 계단은 한번 내려가는 것으로 단축시킬 수 있게 되니까. 그런데도 그곳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다보고 있으면, 그 문을 통해 가지 않고 그냥 직진을 해버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 분명히 저곳으로 가는 것을 보면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가는거라고 밖에 볼 수가 없는데 지름길을 놔두고 빙 돌아가 버리는거야. 그런 사람들이 많더라고 10명중 7명은 그렇게 빙 돌아가 버리더라. 그럴때는 말야 그 사람들을 붙잡고 말해주고 싶어. 이 길로 가라고, 이 길이 지름길이라고. 그런데 그럴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변화를 싫어하니까 말이지... 흠흠..





역시 그날도 그 쇠철문이 열려있었어. 룰룰랄라 기분 좋게 통과하려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어느 여자아이와 맞닥뜨리게 됐지 뭐야. 나는 그 철문을 통해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고 있었고, 그 아이는 계단을 올라와서 철문을 통과하려고 하고 있었지. 내가 피해주려고 한발짝 왼쪽으로 움직이니까. 그 아이는 나를 피하려고 한발짝 오른쪽으로 움직였지. 그러니까 어떻게 됬겠어. 서로 다시 마주 친 거지 뭐. 그래서 나는 다시 오른쪽으로 한발을 움직였는데 그 아이는 또 한발짝 왼쪽으로 움직이더라. 그게 몇 번 정도 반복되니까.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서. 하여튼 이상한 기분이었지. 그리하여 나는 그런 뻘쭘한 광경이 더 이상 지속 되지 않도록 가만히 있었고, 그 아이가 오른쪽으로 한발 움직여 나를 피해가도록 내버려 뒀어. 그 아이도 꽤 당황했는지 내가 가만히 있자 옆으로 후다닥 뒤도 안돌아보고 지나가더라고. 10살 초반의 어린 아이인 것 같았어.






2옥타브 솔





난 정말 최악의 거짓말쟁이야. 나는 말이야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을 해버렸지 뭐야. 사실 나의 진짜 휘파람 음역대는 2옥타브 솔이야. 어제 3옥타브 솔이 나왔다는 나의 휘파람의 음역대는 거짓말 이었어. 어제 내가 피아노를 쳐가면서 확인했다는 3옥타브 솔은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은 한 옥타브 낮은 도부터 측정을 햇을때 나오는 수치였어. 그래 거짓말 이었어. 수치스러워 너무너무. '나의 휘파람의 음역대는 이정도야' 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선거지. 나 자신을 너무 대단한 존재로 만들고 싶었던거야. 그런 허풍 같은게 그 당시 작용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결국 나의 실제의 휘파람의 음역대는 2옥타브 솔이야. 이건 정말 사실이야. 믿어줘.





어째 이상하게 음이 안올라간다 했어. 어제는 분명히 올라간 부분이었는데... 그러니까 어제는 한옥타브를 낮춰서 부른거였어. 그랬기 때문에 너무 쉽게 올라간거고. 한옥타브를 높여 부르면 진동수가 2배가돼. 이게 정말 엄청난 차이야. 2옥타브를 높여 부르면 진동수가 4배. 3옥타브를 높여 부르면 진동수가 8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정말. n옥타브가 올라갈수록 진동수는 2의 n 승이 되는거야. 정말 무서울 정도지. 이렇게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데도 어제는 한 옥타브를 낮춰 불러놓고 올라간다고 했으니 나는 정말 멍청이야, 바보.






총신대입구역





너를 다시 만난 건 무빙워커의 끝부분에서 였어. 나는 설마하고 내 눈을 의심했지. 하지만 분명히 너였어. 오른쪽으로 한발 움직이고 왼쪽으로 한발 움직이고,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몸짓으로 나를 피해갔던 너. 넌 무빙워커 끝에 서서 무빙워커를 타고 오는 나를 보고 있었지. 나는 좀 의아스러웠어. 너는 그때 확실히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갔었는데 어떻게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 거지 하고. 하지만 너의 말을 듣고는 나는 그냥 ‘헉’ 하고 속으로만 소리를 내었지. 그때 내가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는 너의 말. 사당역에서 나를 만난이후 나를 따라왔다는 너의 말. 분명히 내가 이곳을 지나겠구나 생각하고 여기서 나를 기다렸다는 너의 말. 그리고 휘파람을 가르쳐 달라는 말. 나는 그제서야 ‘아’ 하고 속으로 생각을 했어. 휘파람을 배우고 싶구나.




휘파람을 불려면 입술로 만들어내는 원의 크기, 혀의 위치, 바람의 세기 이 세 박자가 고루 갖추어 져야 비로소 소리가 나온단다...라고 말하기 전에 너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어. 왜 휘파람을 불고 싶은건데? "멋있어서요." 혹은 "그냥요."라는 대답을 기다렸던 나의 기대는 "좋아하는 애를 꼬시려구요" 라는 말을 내뱉는 너의 입술에 10t망치에 맞은것 처럼 굳어버렸어. "어떤 남자가 여자애가 부는 휘파람에 넘어가겠니?" "그애가 휘파람을 잘불어요." 이 순진한 꼬마 아가씨가 꼬신다는 말의 뜻이나 제대로 알까. "네가 휘파람을 분다고 그애가 너에게 넘어오겠니?" "그래도 그애와 최소한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테니 그걸로도 충분해요" 나는 더 이상의 이 당돌한 아가씨와 말싸움은 비생산적인 이해관계만을 조성하겠다고 생각하여 이내 단념하고 휘파람을 부는 법을 가르쳤지







무빙워크





"알겠지? 휘파람 소리가 고음이 될수록 원의 크기는 작게, 혀의 위치는 높게, 바람의 세기는 강하게 해줘야해. 이게 이론적으로 말은 쉽지만 니가 직접 몸소 체험하고 느끼는게 좋아. 자 해봐." "후~" 까지의 얘기가 진행되었을 때였어. 이쪽으로 오는 방향의 무빙워크가 갑작스럽게 멈춰 버린거야. 아무래도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전력소모를 줄이기 위해 자동으로 운행이 정지된 것 인듯 싶었어. 덕분에 그 위에 홀로 타고 있던 중년 아저씨는 앞으로 휘청하고 크게 넘어질뻔했지. “꺌꺌꺌”하고 넌 웃었어. 아까 전에 나와 마주쳤을 때의 너의 당황한 모습은 태평양 넘어 어딘가로 사라지고 너는 그야말로 당돌한 아이로 변해있었지. 이번엔 내가 당황했고,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 우리 쪽을 보고 인상 쓰며 지나가는 중년 아저씨에게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어야했지.. 나는 “이녀석!” 하는 표정으로 너를 바라보았지만, 너는 그저 얄밉게도 “후~후~” 하며 바람소리만 나는 휘파람을 계속해서 불어대었어




"아씨 안돼잖아” “얘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아까 그 아저씨 못 봤어?” “처음부터 잘되는 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어. 아까 그 아저씨 무빙워크를 타고 가다가 큰일 날 뻔 한거 못봤니? 시간 몇 초 단축시키겠다고 너무 무리하다가 큰코다쳤잖아. 너도 똑같아 처음부터 그렇게 잘하려고 무리하다간 나중에 가선 어떤 큰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천천히 배우는 게 더욱 오래 가는 법이야.” 너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후~후~” 하며 열심히도 연습했어. 무빙워크에 비유는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돼는 것 같았어. 근데 순진한 너는 겉으론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여실히 믿고 있는 것 같았어. 하하하. 순진하긴.







3옥타브 솔





얼마후 너는 갔어. 너는 나에게 다가왔을 때처럼 그렇게 나에게서 멀어져갔어. 내가 너에게 가르친 건 없어. 혀의 위치는 어떻게 해야 돼? 라고 묻는 너의 질문에 나는 “적당히” 라고 말했어. 바람의 세기는 어느 정도로 해야 돼 라고 묻는 너의 질문에도 나는 “적당히”라고 말했어. 입술의 구멍크기를 어느 정도로 해야 돼? 라고 묻는 너의 질문에도 “적당히”라고 했지. 너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모든 질문에 적당히 로 일관했어.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라고 말했을 때도 나는 “적당히”라는 답변을 전달해 주었어. 이윽고 너의 입에서 휘파람 비슷한 소리가 났을 때 “됐다! 됐다!”라고 놀란 듯 외치는 너의 얼굴을 보고 “그 느낌을 기억해”라고 말해준 게 전부였지.



아침출근시간에 지하철역은 정적분의 정의 만큼이나 복잡하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몸을 맞부딪치고 호흡을 공유하는 그 일련의 시간들이 나는 고통스러웠다. 휘파람을 불고 싶었다. 앞사람의 머릿칼 주변에서 나는 지독한 스킨냄새에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나는 그 사이에서 휘파람을 불고 싶었다. 당돌했던 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의 마음 따위는 신경 쓰지 않던 너를 떠올렸다. 그래 너의 앞에서 만큼 나의 휘파람은 3옥타브 솔이었지. 나는 휘파람을 불겠어. 남의 시선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그렇게. 개미떼처럼 밀집되어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휘파람을 불었어. 나의 모든 꿈과 희망이 담긴 휘파람을... 필릴리릴리~









Tansi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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