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한 망상의 둥지 0001 -마지막-

NEOKIDS 작성일 06.05.19 0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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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아주 푸르렀다. 나는 가만히 그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나뭇잎들이 따스한 봄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시계를 잠깐 보니 11시 59분이었다. 다시 손목을 내려놓았을 때 어지러워질 정도로 푸른 하늘에 한 가득 한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나는 나지막이 웃었다. 그 얼굴도 웃고 있다. 젖은 눈동자가 뭐라 할 수 없이 예쁘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얼굴을 매만진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얼굴을 붉히는 그녀.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나의 얼굴에 다가온다. 촉촉함이 입술과 혀에 느껴진다. 그 때 내 손목에서 12시를 알리는 음이 들려왔다. 이 순간만큼은, 아주 백만장자가 된다든지, 엄청난 스타가 된다든지 하는 그런 속세의 즐거움이나 명예 따위와 전혀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에 비행기가 그리는 긴 궤적이 떠오른다. 그녀와 나는 마냥 웃고만 있다. 나는 팔베개를 해주고 그녀는 고등학교 동절기 교복을 입은 채 내 옆에 누워 나와 함께 하늘을 보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 하얗고 푸른 하늘, 같이 바라보고 있고, 같이 바라고 있는 그 하늘을 보며 우리는 꿈에 젖었다. 우리의 눈동자도 함께 젖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나 역시 그녀의 손을 끌어 나의 심장박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그 서로의 박동을 느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이때를 잊으면 안 된다고, 우리는 아직, 꿈꿀 수 있다고.




그 하늘은 지금 우중충해져 있다. 내 손도 우중충해져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갈색만으로 물들어 있는 듯하다. 피가 말라붙었는데도 어제 죽은 동료의 피는 아직도 지워지질 않는다. 어이가 없다. 왜 내가 여기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총과 탄창, 대검과 야삽이 지급되었다. 모든 필요한 것을 메고 나면 몸이 기우뚱거릴 정도이고, 그 무게는 내가 짊어지고 있는 옆 사람의 삶만큼이나 무거운 것 같다. 그것도 전투 중에 거추장스러우면 벗어버리고 나중에 아무거나 걸머지면 된다. 물론 죽은 동료의 것으로.




모두 죽어갔다. 탄환은 그들의 내장을 조각내어 내 주위의 땅에 흩뿌렸고, 사지를 폭발시켜 다진 고기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들의 눈알이 내 뺨에 튀어버리기도 했다. 내 전우를 그렇게 만든 년의 얼굴에 바둑판을 그어준 후 눈알을 손가락으로 눌러 터뜨려버린게 엊그제다. 아직도 그 야릇한 비린내가 가시지 않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모든 적은 여자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군복을 입고 자신들이 믿는 깃발 아래서 전쟁을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 정신없는 아비규환을 넘어서서, 나는 아직까지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전우를 만들지 않았다. 모두가 점점, 나처럼 변해갔다. 우리는 같이 싸우면서 한 마디도 서로 인사를 건네거나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어디서 왔느냐는 둥, 어떤 일을 하다 왔느냐는 둥, 아니면 하다못해 강간해봤냐고 묻기라도 하는 등 이야기꺼리들은 충분히 많았으나, 절대로 서로에게 단 한마디도 꺼내보지 않았다.
전우를 만들었다가 그들의 죽음에 뒤쳐져 살아남은 자신의 눈물이 흐르는 그 경험들을 이제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무너져가고 있었다.




적은 줄어야 하는데, 전혀 줄고 있지 않았다. 어떤 자는 분명히 우리 중의 누군가가 배신을 했다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여자들이 무언가 방법을 찾아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말도 신빙성은 없었다. 이렇게,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무얼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런 말들이 누군가가 우리에게 공포심을 일깨우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면 다소 괜찮은 방법이었다.
최소한 총을 다잡고서, 칼을 그러쥐고서 적의 심장에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찔러 넣을 수 있을 만큼, 순식간에 잔인해지게 만드는 데 공포는 어느 정도 필요한 요소이다. 공포. 그렇다. 그것만이 우리의 현재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일 것이다.




우리에게 작전명령이 떨어진 것은 수많은 어느 날 중 정말 그렇고 그런 어느 날이었다. 큰 전투가 있은 뒤 우리는 항공대에서 낙하시켜 보급 받은 음식들을 먹으면서 보다 더 따뜻한 음식과 샤워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 때 소대장이 작전을 알려줬다. 069고지. 그 곳의 명칭이라고 했다. 난공불락이라고도 했고 다른 부대들도 그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10분 후까지 장비를 챙겨야 한다고 했고, 늘 그렇듯 무표정하게 군장을 챙겼다. 트럭의 덜덜거림은 그나마 몇몇이 그 같잖게 먹은 것마저 게워내게 할 만큼 심했다. 제대로 포장된 길 따위란 없었다. 작전지역으로 가는 길은 하나같이 야포부대의 포탄과 폭격기가 투하한 재래식 고폭탄들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나마 길이란 게 있다는 것 정도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니면 운전병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고지까지 차량으로 이동하자 바로 포격과 총격이 날아왔다. 제길, 이번 적은 저격수까지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몇 킬로미터 밖에서 총알이 날아올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비틀거리며 겨우 정차한 트럭에서 바로 뛰어내려 고지까지 행군으로 갈 것으로 결정했다. 우리의 짜증은 한층 심해졌다. 엄폐물을 찾아가면서 몇 킬로미터를 간다는 건 체력적으로 낭비를 한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런 투덜거림도 몇 십 초가 지나자 사라져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의 탄환이 우리 대원 한 명의 화이바를 관통하고 머리가 으깨져 버리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엄폐물을 이용하면서 조금씩 전진했다. 그렇게 몇백 미터쯤 가자 우리 편의 포격이 시작되는 듯 했다. 그 바람에 저격수로부터도 안전해진 우리는 조금씩 미속으로 전진했다. 이미 차량의 지원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피냄새가 진해져오면서 부산스러움도 느껴졌다. 수많은 아군들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포격들도 점점 더 치열해졌다. 하지만 위의 적은 제대로 된 포대는 없는 듯 했다. 그것이 천만다행이랄까. 어쨌건 우리는 도착해서 다시 태세를 재정비했다. 무거운 짐들을 내리고, 캠프를 세우고는 우리의 짐들을 모두 정렬해서 놔둔 뒤에 약식군장 차림으로 바로 총만 쥔 채로 나오고서는 수류탄과 실탄을 지급받았다. 다행히 보급이 이뤄진 후여서 실탄과 수류탄은 충분했다.
나는 30발들이를 꽉 채운 탄창 6개를 지급받았지만, 있는대로 다시 탄창을 야상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걸 수 있는 곳에는 어디라도 모두 수류탄을 걸어두었다. 모두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탄창 6개 가지고는 이런 야전에서는 택도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우리 보병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옛날에 있었던 동남아 쪽 지역의 정글 속 전투에서는 적 한 명을 사살하기 위해 적어도 2만발의 탄창을 소비했다고 한다.







무기가 다 지급되고 나자 우리 소대는 바로 그 고지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파상공격의 1파가 후퇴하는 틈을 타서 우리 소대가 고지에 마치 자궁모양처럼 둘러쳐진 적 방어선 좌측방을 맡아 2파의 선두에 섰다. 그 곳의 대응은 어느 곳보다도 치열해서, 좀 더 잔인하고 용감하다고 소문난 우리 소대가 맡게 되어 있었던 방면이다.
아니나 다를까, 1파의 누구도 제대로 성해서 내려오는 사람이 없었다. 크건 작건 떠메어져 있건 떠메고 있건 모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엄폐물은 바위나 나무 등 충분했는데도 고지 위의 적의 대응이 상당히 심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우리 소대원 중 그 누구 하나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적을 물리치고 올라갈 것인가, 그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1파의 후퇴가 제대로 이루어지자 아군 야포들의 엄호가 이어졌다. 총 10여 대의 대포가 고지의 윗부분을 강타했다. 흙이 튀고 가끔씩 손가락이나 내장 같은 것도 섞여서 굴러 내려온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모래가 섞인 침을 뱉어내려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무조건 올라가고 엄폐했다.




포병의 엄호가 끝나자 바로 적들이 바로 대항해왔다. 철조망과 지뢰 등은 이미 1파가 먼저 파괴통으로 헤집어놓은 뒤였다. 하지만 고지가 가파른 관계로 그 이상을 해내기는 힘들었던가 보다. 덕분에 경사는 더 심해진 듯 했다. 나는 그 저지선 바로 밑의 바위 뒤로 기어들어가 수류탄을 내가 직접 만든 새총에 매겼다. 이때까지 몸을 일으켜 던지려는 바보들 치고 총알에 안 맞아 죽은 인간이 없었다. 이건 영화가 아니잖은가. 이 새총은 이런 때에 아주 유용했다. 유탄발사기 따위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날린 수류탄이 중턱 한 쪽의 참호 속을 뒤흔들었다. 그 참호가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나와 몇 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참호 안으로 뛰어들었다.




뛰어든 순간 나는 총을 놓쳐버릴 정도로 놀랐다. 몸을 웅크리고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적 병사가 보였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런 단순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적 병사들의 맨 앞 선두, 그것도 저들의 달라붙고 섹시해 보이는 군복이 아닌 고등학교 동복 교복을 입고 있는 한 여학생의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 탄환이 귓전을 스쳐가는 난전 중에서도 나는 그 사람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알아보지 못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절대로 잊지 말자던 시간을 같이 나누어 가졌던 그녀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떠메어져서. 한 쪽 다리에 총이 스쳤는데, 그나마 다행인 경우라고 떠메고 있는 놈이 내게 중얼거렸다. 참호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선두에 선 고등학교 교복이 내게 특제 저격용 소총을 겨누었단다. 내 뒤에 있던 동료 두 명의 머리가 작살이 나고 그 다음 팀들이 올라오면서 대응사격을 해준 덕에 그 교복의 사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일단 2파도 실패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 그 교복의 저격수가 있는 이상은 그 방면은 누가 와도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년, 장거리 저격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근접전투도 장난이 아니더라. 우리 소대도 벌써 30명 중 반수가 희생당했다고 한다. 그 반수의 반수는 그 교복에게 순식간에 희생된 거란다.
도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 날의 푸른 하늘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 내가 살아야 한다는 그 긴장과 급박함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아군의 엄호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달궈졌던 포신이 그새 다 식었던가 보다.




의무병이 소독용의 하얀 가루를 마구 뿌려주고는 붕대 하나를 스스로 감으라며 건네주고는 더 급한 동료들을 찾아 떠났고, 그 붕대를 다 감은 나는 빡빡한 비스킷을 씹으면서 다친 다리의 통증에도 아랑곳없이 생각에 잠겼다. 주위의 아수라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그 애가, 아니, 그녀를 여기서, 만나게 된 건가. 도대체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단 말인가, 내가 겪어온 아수라장을 그녀도 겪었단 말인가, 라는 물음표에는 지금의 세상이란 틀 속에서 대강의 추측으로는 답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감정의 심장에 무수한 칼을 꽂힌 후에야 남들의 진짜 심장에 칼을 후비는 법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잔인함에 취해버린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지켜야 할 무언가를 위해 몸을 던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추측을 해봐도 도통 알 수 없는 것은, 왜 그녀가 군복을 입지 않고 교복인 채로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인가, 라는 점이다. 교복이란 건 결국 각종 보호대를 하건 군장을 하건 간에 불편할 뿐이다. 불편할 뿐인데도 군복을 찾아 입지 않는다. 교복.




거기서 문득, 영원한 기억을 약속한 그 때에 우리가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설마 교복을 입는 것을 그 때의 연결고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가능성이 내 동료 셋의 머리를 간단하게 날려버린 그녀에게 아직도 남아있을까? 마지막 조각을 씹어 삼키면서 나는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다음에 그녀를 만나게 되면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헬멧을 벗기로. 다만 그녀가 아직 잔인함에 눈이 멀어 날 알아보지 못하는 일만은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
만에 하나 그렇대도, 죽는 건 순식간이다. 그녀의 솜씨라면 고통 없이 끝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부대는 살아남은 다른 부대와 합쳐져서 100명 정도의 새로운 부대로 재빠르게 정비되었다. 제 3파의 공격이 조금의 성공을 거두어서 적들을 조금 더 위쪽의 고지로 후퇴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하루를 또 보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상황이 그다지 나아진 건 아니었다. 현재 보급된 물자들을 끝으로 언제 보급이 될 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보급선이 원래 긴데다가 적들이 보급선을 알아채고 집요한 공격을 걸어오고 있다는 것이 소대장의 상황 설명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빨리 이 작전을 승리로 이끌고 보급선이 안전한 곳까지 후퇴해야만 한다는 말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말 이후의 설명들은 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줄곧 그녀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진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슬그머니 뒤로 쳐져서 고지를 우회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들키면 바로 전장에서 소대장의 권총에 즉결처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왠지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우회하자 이윽고 아군과 적군들의 치열한 사격전이 시작된 듯 사방이 총성으로 시끄러워져 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저격수임을 생각하고는 좀 더 위쪽의 참호 근처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다행히 위쪽의 참호들은 아래쪽의 엄호 등으로 주의가 아래로 집중되어 있어 내가 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그녀가 아래쪽에 없기만을 빌면서 좀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참호 가까이까지 근접하자 몇몇의 기관총 자리들이 보였다. 그녀라면 긴 머리 때문에 쉽게 눈에 뜨일텐데, 아무래도 옆쪽으로 와있다 보니 찬찬히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조급함은 그녀에게 나를 보이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다가, 나는 진한 곤색의 교복색에 눈이 머물렀다. 그녀가 거기 있었다. 다행히 저격임무를 맡고 있다가 혼전의 양상이 되자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그 곳으로 낮은 포복으로 잽싸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그녀의 가까이에 다가가자,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서 달려 나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무표정한 채로 이쪽을 보면서 바로 곁에 있던, 이상하리만치 무겁고 길어 보이는 자신의 저격용 소총을 집어 들어 일어섰다. 어깨를 움츠리고 안정적인 자세를 눈 깜짝할 사이에 취한 채 나를 겨누었다.
나는 급히 헬멧을 벗고는 두 팔을 벌린 채 멈추어 섰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이 잠시 움찔하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산발한 채에 피로 떡이 진 그녀의 머릿결이 잠시 바람에 흔들렸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헬멧을 벗은 내 모험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 역시 총을 겨눈 자세에서 눈만 스코프에 붙이지 않았을 뿐 조준자세를 취한 채였다.

뭔가, 할 말이 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바라보는 것 밖에는. 갑자기 어둑했던 하늘이 그 날의 하늘처럼 푸르고 눈부시게 변하면서 햇빛을 우리에게 내려주었다.




따사로운 햇살 속에 우리는 그냥 그렇게 서로를 보며 서 있었다. 계속 총성과 함성이 들려왔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총성이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그녀가 속한 적의 부대가 우리 부대를 물리친 것이 분명했다. 아니었다면 벌써 여기까지 아군이 올라오고 있었을 것이다. 총성이 잦아들었다는 것을 안 그녀가 천천히, 조준을 풀지 않으면서 조심스레 뒷걸음질쳐 사라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의 시야에서 완벽하게 사라지고 나서, 나는 긴장으로 한꺼번에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아쉽긴 하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되었다. 우리가 더 이상 뭔가 말을 하려 한다면, 마음속에서 뭔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 부서짐은 결국 상처를 만들고 지금의 지옥도보다도 더한 지옥,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옥을 안겨줄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피를 손에 묻힌다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더라도 그런 지옥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다시 부대로 돌아왔을 때는 아군의 부대들은 이제 재정비한다고 하기에도 초라할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을 남은대로 모아서 소대를 만들어보려는 소대장조차도 거의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싸움이 심했던 탓이리라.
소대장은 내가 어디에 갔다왔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소대장의 관심이 내 개인의 이동에 신경을 쓸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 후에 알 수 있었다. 이미 보급된 물자는 바닥을 드러나고 있었고, 보급을 요청하려 해도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이미 무전연락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전기가 연락할 수 있는 범위로부터 중앙지휘본부가 이미 멀리 이동해버렸다는 증거였다. 포병부대는 이틀 전에 다른 곳으로 차출되어 떠나버려서 포병의 엄호도 기대할 수 없었고, 이대로 또 하룻밤이 가면 내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없다.

내일이면 여기서 작전을 수행한 지도 4일째가 될 것이다. 예상했던 2일을 초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대장은 반드시 보급이 올 거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듯 했다.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에게 다시 남은 탄알들을 긁어모아 빈 탄창에 채우도록 명령을 하고, 자신도 이런 저런 부대의 정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최후의 일격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골몰하거나 적에 대해 이를 갈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와중에서, 나는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제 몇몇은 내가 완전히 전쟁공포증에 빠져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은 눈치였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다시 그녀를 볼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그 날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면. 단지 그것만이 생각날 뿐이었다.
하지만 답은 보이지 않았다.




아군이나 적군이나 둘 다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공격개시 시간은 11시 20분으로 잡혀졌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내야만 한다는 듯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독려했다. 나조차도 다시금 총을 잡고 고지로 뛰어올라가며 목숨을 걱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만큼 그녀가 살아있기를 바랬다.
다시 총알과 무반동포가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몇 번 박격포탄이 날아와 내 눈앞에서 이름 모를 사람의 사지를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놨다. 그 옆에는 파편에 뇌가 날아가 즉사한 시체와 심장 언저리와 입에서 피를 뿜으며 마지막으로 뭔가 말하려는 사람이 있다. 모두 내팽개쳐졌을 뿐 누구 하나 도와주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만큼의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고지 위로 뛰다가 무릎 아래로 기관총을 맞고 다리가 통째 날아가기도 하고, 그 뒤에 따르던 사람이 그 피에 눈을 적셔 부비다가 가슴에 기관총탄을 맞고 몸이 다 으스러지는 광경도 보였다.



그렇게 치열하던 적의 사격도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 잠잠해졌다. 차라리 육박전으로 이 모든 것을 끝내려는 결심이 선 모양이다. 어차피 아군도 모든 탄약을 소비한 듯 사격하지 않았다. 서로가 눈치만 보던 가운데, 드디어 한 사람씩 총검을 꺼내어 총에 장착하고는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도 총검을 총신 앞에 끼우기 시작했다.
손목에 맨 시계가 1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지에서도 적군들이 모두 총검을 장착한 총을 들고서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살기등등한 표정을 하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먼저 돌들을 들어 던지다가 드디어는 서로 함성을 지르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도 바로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팔을 휘두르며 서로에게 피분수를 뿜기를 강요했다. 얼굴을 개머리판으로 맞아 턱뼈 밑이 깨끗하게 날아가 버린 사람이 땅에 뒹군 턱뼈를 주워 울부짖던 자는 끝내 적의 총검에 목을 찔려 더 이상 울부짖지도 못했다. 적의 가슴을 도려내며 흥분하던 병사의 눈에 적이 내지른 총검이 깊숙이 박혔다. 그 적군의 뒤통수를 돌로 내려쳐 쓰러뜨린 후 군홧발로 다리뼈를 짓밟는 사람이 있었다.
혼전의 양상 속에서 나는 총의 총검을 휘두르다 아예 동료 것 하나를 더 주워서 양손에 움켜쥐고 적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스텝을 밟고 팔을 휘둘렀다. 휘두를때마다 치명적인 곳만을 노렸고, 노린 곳은 여지없이 칼날이 살덩이를 베어나갔다. 나중엔 휴대용 야삽을 들어서 한 적군의 머리를 으깼다. 뇌수와 두개골 조각들이 얼굴에 튀는 것이 느껴졌다. 나 또한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 흐른 피가 군복을 적시고 있었다.
혼미한 정신으로 상대의 목젖을 그어버리고 몸을 일으키던 내 시선에 그녀가 보였다. 그녀가 거기서 아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마치, 그게 영화라면 너무나 아름다운 몸동작에 감탄사를 내질렀을 그런 움직임으로.
하지만 그녀 역시 상처를 입고 있었다. 피를 뿌려가며 심장에 칼을 박은 후 능숙한 동작으로 돌려 빼고는 다시 다음 적을 향해 쇄도하는 그녀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나는 등에 칼을 찔릴 뻔 했다. 나는 그 등쪽의 상대를 눈을 칼로 그어 처리하고는 점점 그녀에게 다가갔다.
양편 모두 점점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지만, 나와 그녀의 사이에는 아직도 아수라장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그 아수라장을 헤치듯 걸어나갔다. 보이는 적은 모두 베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그녀 역시 나를 향해 오면서 도륙을 멈추지 않았다. 점점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잦아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돌아보니 주위의 병사들은 모두 죽어있었다. 피가 빗물처럼 고인 시체들의 밭 사이에 우리는 서있었다. 둘 다 상대의 피와 자신의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 입은 상처는 치명적인 듯 했다. 동시에 쥐고 있던 무기를 버리고는 우리는 다시 서로를 향해, 멈췄던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사람을 죽이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하늘이 파랗고 맑게 변해있었지만, 피가 흘러 눈에 들어간 덕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 역시 한 쪽 눈은 감은 채로 하늘을 보려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조금씩 다가갔다. 이제 조금만 더, 그녀를 만질 수 있다. 그녀가 축 쳐지지 않은 다른 손을 뻗었다. 나 역시 공격을 막느라 부러진 한 팔이 아닌 다른 손을 뻗었다. 겨우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손이 강하게 내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껴왔다.
도대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눈물이 아주 뜨겁게, 뺨을 적시면서 흘렀다. 그녀의 눈에서도 피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다시 누워있었다. 나의 팔을 베개삼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그 때의 눈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제서야, 아주 살짝 웃을 수 있었다. 눈을 감으며 우리는 하늘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온몸이 나른해짐을 느끼게 해주는 온화로운 햇빛을 받으며. 점점 멀어지는 의식의 한귀퉁이에서, 이미 우회로를 확보했으니 그 곳에서 모두 후퇴해서 합류하라는 지휘본부측 연락병의 목소리,

그리고 12시를 알리는 내 손목시계의 시끄러운 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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