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대륙엔 거센 전쟁의 시기가 있었다. 수많은 왕국들은 점차 숫자가 줄어들며 하나로 통합되어 가기 시작했고 대륙 최초의 통일 왕국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5년간의 전쟁으로 모든 것은 황폐해져 사람들은 폐허가 된 집을 다시 짓고 죽어 버린 땅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하나의 왕국이라 하나 때는 혼란의 시기. 중앙의 권력은 겨우 수도권 주변만을 통제할 뿐, 지방은 각각의 공을 세운 영주들의 자치로 통치되었다. 말만 하나의 왕국이지 그들은 각각의 사병을 육성하여 힘을 키워 중앙의 통치를 거슬렀으며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서로의 영지를 빼앗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저 힘이 없으면 몰락할 뿐인 시대, 전쟁은 끝났으나 혼란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시간은 조금씩 흘렀다. 수도는 말 그대로 나라의 중심. 지방의 크고 작은 분쟁과 달리 평화로움을 유지하며 조금씩 사람들의 손으로 다시 세워진 그 중심은 힘을 키워갔고, 이제 혼란스런 시대의 끝을 내리기 위해 모든 귀족들의 영지를 중앙으로 결속시키기로 왕은 마음먹었다. 그가 개혁을 위해 먼저 하기로 결정한 일은 지방 영주들의 권속에 속해있는, 그들로 하여금 수도의 작은 동태도 보고하도록 하는 정보책의 입막음이었다.
1. 누군가에겐 가혹한...(1)
적우. 사람들은 그를 적우라 불렀다. 언제나 그가 지나간 자리엔 붉은 빗물이 흘렀다 하는 꽤나 이름있는 용병이 그였다. 회색머리칼은 그를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이든 노장을 생각하게 하지만 투박한 용모와 다르게 말끔한 피부는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임을 짐작게했다. 보름 이었다. 그의 머리칼 색깔만큼이나 괴팍한 성격인 그는 그저 달이 밝아서 수도의 밤거리를 걸었다. 최근 왕의 명령으로 인해 수도의 많은 가문들이 척살되는 가운데 밤에 혼자 거리를 걷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왕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행하기도 하지만 대다수가 돈을 노린 용병들이 일에 끼어든지라 걸리는 대로 죽이고 가문의 식솔이라 엮어 넣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것들은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그가 걸어오면서 계속 베어 넘긴 용병들의 수는 벌써 열을 넘겼다. 두두두두두.. 또 한무리의 사내들이 뛰어오기 시작한다.
“쳇, 평화로운 수도? 현명한 왕?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군.”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등뒤에 매여진 검에 손을 가져갔다. 참월광검. 달빛조차 베어버린다는 이름을 가진, 자신의 검술 스승이 죽으면서 넘겨준 그의 애검이름이다. 언제는 그는 이런 달빛속에서 검을 뽑아 검무를 즐겼다. 그의 손끝을 따라 하늘하늘 춤추며 청명하게 울리는 검음이 그리 좋았다.
“운이 좋은 건가? 혼자서 춤추기엔 적적했는데.. 구경꾼으로 꼬마 아가씨도 하나..?! 아무리 용병이 돈에 몸을 팔고 다닌다지만 너무하군 그래. 피에 젖은 꼬마 하나를 못 죽여 안달이라니!”
적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순간 마주오던 용병들이 흠칫 놀랐다. 월광아래 회색빛 머리칼. 미칠듯히 기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커다란 검을 잡고 뛰는 사내. 그 사내, 적우가 자신들에게 뛰어 오니 말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의 몸 여기저기의 검흠은 여러 전장에서 단련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일까? 한 줄로 뛰어들던 그들은 두 세명이 협공하기 쉽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적우게 달려들었다. 스릉~ 적우의 검이 사선을 그었다. 처음 달려오던 용병하나가 미처 자신의 칼을 휘두르지 못한채 꼬구라 졌다.
“하아~!”
그 옆에 이어 오던 한 덩치가 기합을 질렀으나 그뿐. 어느새 적비의 검은 그의 목을 스쳐 지나 다른 이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두 명의 용병이 아래위로 겨누며 칼을 휘둘렀다. 적우는 그저 놀라울 정도의 점프력으로 둘을 스쳐 지나가며 뒤돌았다.
“쌍둥이로군. 꽤나 요령있게 덤비는데?”
“우린 네가 누군지 알고 있지.”
“적우아니냐? 크크크. 오늘 우리 운이 좋은가 보군.”
“그러게! 간단하게 이름떨칠 기회라니!”
“문어 대가리들, 쓸데없이 말 늘리지 말고 유언은 간단하게 한마디씩만 하라고.”
“뭐! 이런 샹!! 형! 빨리 치자..”
슈걱.
“이 놈이!”
슈걱. 적우의 검은 어느새 둘의 목을 갈랐다. 뒤이어 오던 다른 용병들의 발검음이 오던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향하자 그는 천천히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방금 봤던 꼬마를 찾기 시작했다. 한쪽에 넘어진채 울고있다. 아마도 돌뿔리에 걸렸나보다.
“꼬마야 괜찮냐.”
그는 별 생각할 것 없이 꼬마를 가슴팍에 안고 자신이 묻고 있던 여관으로 향했다. 계속하여 칭얼거리던 꼬마는 방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꼬마를 침대를 눕히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의 용병들로 보이는 패거리와 한패로 보이는 자들이 여럿이 여관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우는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십 여명의 상대에게 포위대어 있지만 여유가 있는 것은 적우 쪽이었다.
“검을 뽑아야 하나?”
그의 말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사내가 나섰다.
“그대가 적우인건 알고 있소. 1급 용병에게 우리들이 괜한 시비를 걸 필요가 있겠소이가? 그저 꼬마만 주시오. 그 꼬마는 역적 베에덴 자작의 슬하로 그 얘를 감싼다는 것은 왕을 배신한 역적이 되는 것뿐이오. 물론 우리가 성급하게 당신에게 달려든 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보상과 사과를 할 것이오. 우리 이글 용병단은..”
“그만. 난 여태까지 검으로 말하고 살았지 입으로 말 한 기억은 없군.”
“꼭그리 해야만 한다면.. 우리쪽에서 나서는 숫자에 괜치 말아 주시오.”
“나 역시 재미없는 싸움은 바라지도 않아. 내 참월광검 역시 한두 명의 피로 목을 젖시지도 못해. 흐흐. 숫자만 믿고 까부는 어리석은 놈들. 어서 덤비시지? 뭐, 나서지 않겠다면 내가 먼저 가지!”
적우의 발이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감에 창월광검은 달빛에 시리도록 빛났다. 쾅! 쾅! 쾅! 쾅! 무엇인가 폭발하는 소리가 적우의 검이 휘둘러진 곳에서 계속 들렸다.
“크억!”
“아악!”
검이 지나가는 곳에 걸리는 것은 굉음과 함게 뭐든 박살나기 시작했다. 칼로 막으면 칼이 박살나며 튀는 파편에 스러졌고 피할려고 하면 어느샌가 뒷목을 스쳐 지나가는 빠르기란, 그저 칼만 들고 자신을 검사라 치부하며 왈가불가하는 용병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벌써 반수가 적우 주위로 스러졌다.
“발사!”
쉥~! 어디선가 고함소리와 함께 수십대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쳇!”
적우는 빠르게 뒤로 발을 빼며 위로 몸을 날렸다.
“성가시군. 왕국 기사단의 궁병대라니.”
주변을 포위한 채 활시위에 화살을 올려둔 수십의 잘 갖춰진 병사들. 그 앞에 제대로된 갑옷을 걸친 기사로 보이는 자가 나섰다.
“왕국 기사단 제 2전대 소속. 제 1 궁병대의 수장 바란이요! 그대의 이름은 기사인 나도 알고 있으면 그 무위는 나 역시 경외를 표하는 바요. 허나 이 이상 방해를 한다면 반역도로 처벌할 것이니 물러나시오.”
적우는 자신의 검을 갈무리하며 그를 마주했다.
“나 역시 왕국 기사단과는 얽히고 싶지 않소. 허나 저들이 먼저 지나가는 나를 이유없이 공격했으며, 그로인한 저들과의 은원관계를 확실히 매득짓고 싶을 따름이오. 참견하지 않는다면 그 뒷일은 나 역시 관여할 바가 못되오.”
“좋소. 기사된 사람으로 그런 개인 명예에 관련된 일에 관련하지 않겠소. 저들과 일이 끝나면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겠소.”
“좋소이다.”
순간 용병들의 입에서 욕지거기가 나왔다. 아마도 저들에게 고용되었으리라. 무엇보다 갑작스레 활을 쏘며 도와줬다는 것을 같은 편이라는 뜻인데, 기습이 통하지 않자 만만찮아 보이는 적우와의 충돌로 인해 혹시나 자신들에게 생길 피해를 없애기 위애 모른채 하겠다니, 기사의 어쩌고저쩌고는 그저 핑계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럴 생각 할 틈 없이 적우의 검은 빠르게 그들의 목 앞에 다가왔다. 그저 하나의 선이 그어졌으나 그 선을 막지 못했다. 창월광검이 지나가는 자리에 자신들의 칼을 거져가 막으면 될것 같으나 어느 때고 빠르게 용병들의 칼을 지나치며 정확히 목을 베어버렸다. 게다가 적우가 제대로 노리는 타점에 칼이 있다면 그대로 칼이 파쇄되어 버렸으며 그 파편들은 정확하게 자신들의 목과 심장을 파고든다. 피하려는 순간에는 어느새 검의 길이가 더 늘어났다는 착각과 동시에 뒷목이 서늘해 졌다.
“너만 남았군.”
“휴.. 내가 포기하면 되겠소?”
“안돼겠는걸? 벌써 내 검이 피를 먹는 바람에 나도 어떻게 자제를 못하겠거든. 대신 나를 베어 넘긴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이 있었으니까 나를 찾아 왔겠지? 뭐,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도 있었겠지만 무리겠지? 지금 왕국 기사단의 궁병대가 저렇게 주변에 버티고 있으니. 그냥 입에 칼 물고 꼬구라지는건 어때?.”
“사양하겠소. 나 역시 이들을 아래로 거느릴 자격을 가졌던자. 끝을 봐야 겠소. 그대의 실력은 뛰어나나 나와 종이한장 이상의 차이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
“그래? 하긴, 한끝 차이 말고는 없어 보이는군. 그럼 오라고.”
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적우는 몸을 날려 검을 휘둘렀다. 여전히 선 하나만을 그을 따름이다. 그때 상대방이 적우에게 몸을 날리며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아까 녀석들이랑 확실히 다르군.”
현재 적우가 휘두르는 일검은 그의 검술 스승이 전해준 다섯가지 검로 중 첫 번째. 별다른 이름은 없고 그저 1 식이라 부른다. 동방검술의 발도에서 착안한 것으로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휘두름으로써 상대의 칼이 부딧치기 전에 상대를 베거나 뒤로 피할때면 상대의 생각보다 한 박자 빠르게 검이 다가옴으로써 검이 늘어났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무엇보다 휘둘러진 검이 거두어지기 바로 직전인, 최대한의 속도와 힘이 실리는 순간 보통의 도검류는 파쇄할 정도로 강한 위력을 지니게 된다. 해서 상대방이 다가올때면 아직 최대의 힘과 속도가 실리기 직전에 검이 부딧치게 되므로 그저 조금 더 빠르게 휘둘러진 검 이상의 의미가 없게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변환없이 그저 하나의 선을 긋는 것이 적우의 검이었기에 검이 올 경로가 예상 가능하기도 했다. 즉 조금의 실력만 있다면 무리없이 막는게 가능했다. 창! 이를 시작으로 적우는 몰아 부치기 시작한 한 용병. 창, 창, 창, 창, 창. 자신의 검이 적우를 뒤로 물러나게 하자 어느새 자신감이 붙은 순간, 저도 모르게 더 힘을 줘서 쳐내야 한다는 생각에 검을 머리 위로 과도하게 들어올려 도끼로 나무 내리치듯이 한번에 힘을 실으려 하다 자세가 커졌다. 스각. 순간 적우의 검은 그의 칼이 내려 긋기 전에 심장을 관통시켰다. 적우의 검로 중 두 번째. 그저 단순한 찌르기에 그칠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의 검이 휘둘러지는 동안 자신의 검이 한 박자 느리게 출발하더라도 팔을 한번 펴주는 것으로 상대의 몸에 먼저 관통시키는 찌르기이다. 일 식과 같이 단순한 것이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휘둘러지는 것보다 타점에 효과적으로 빨리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검이란 휘두르는 것보다 찌르기가 효과적이라고.”
주변이 어느정도 정리되자 적우는 앞의 왕국 기사단 소속의 기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많이 기다렸소. 그럼 용무를 들어 볼수 있겠소?” “어렵지 않소. 베이른 자작가의 영애를 우리에게 넘기시오.”
“허허.. 기사란 자가 사람을, 그것도 자작이라는 신분을 가진 자를 그렇게 쉽게 부르면서, 무엇보다 기사가 지켜야 할 약자를 물건 다루듯이 넘기라니, 도대체 왕국 기사단 소속이 맞기 하는 거요?” “지금 내가 말장난에 놀아날 정신이 없구료. 저들의 시체 처리도 넘겨야 하고, 여러 안건에 바빠서 그러니 빨리 물러나시오. 그대의 무위에 경외를 표한다고 했지만 나는 결코 그대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오. 무엇보다 왕국 기사단 2 전대의 궁병대를 모른다고 하진 못하지 않소?”
“그래서 지금 이렇게 여관 가까이에 서 있는 것 아니오. 나는 이만 피곤해서 들어갈테니 나중에 찾아오시오.”
후다닥!
“이런! 쫓아라!”
궁병대는 즉시 활시위를 거둬서 자신의 옆구리에 차고 있던 숏 소드를 꺼내어 무장하고 여관으로 들어설 준비를 했다. 혹시나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들어오는 순서대로 기습을 할지 몰라 그들은 입구에서 약간의 시간을 지체했다. 여관에 묵고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소란에 놀란나머지 우르륵 몰려 나오자 바란은 그들을 한쪽으로 인도하여 주변을 정리하는 한편 궁병대를 세 개조로 나누어 임무를 맡겼다. 1 조는 여관의 후문을 봉쇄. 2조는 지붕으로 혹시나 탈출을 시도하는 적우를 포획 및 사살. 3조는 반은 숏소드로 무장을, 나머지 반은 화살을 활시위에 겨눈채 여관의 복도에서 만날 적우를 대비 하게 하였다. 어느새 날이 밝았다. 하지만 바란은 적우를 놓쳤다. 혼란 중에 여관의 일반객으로 변장하고 나간 그를 알아보지 못한 그의 실책이었다. 무엇보다 바로 쫓아 들어가지 못하고 피해가 생길까 우려해 앞에서 괜히 임무를 주며 우왕좌왕 했던게 컸다. 그사이 적우는 간단히 낡은 로브를 걸치고 쩔뚝거리며 품에는 꼬마 하나를 안고 여관을 나섰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