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자 적우는 피로함과 배고픔을 느꼈다. 자신의 회색빛 머리칼은 수도안에서 수배 명단만 나온다면 너무 쉽게 발견될 것이다. 해서 아무 여관에 들어가질 못했다. 그렇게 사람이 자주 들락거리는 곳은 눈에 뛰는 외모를 가진 자신에게는 좋지 않았다. 대신 예전에 거래를 했던 도둑길드를 찾아 수도의 골목을 누리고 다녔다. 커다란 걸물들 사이에 난 좁은 길엔 한적함만이 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적우의 발소리외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온 동네의 골목을 헤집고 노닐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골목길. 적우는 어느 건물 앞에 멈춰섰고 작은 쪽문으로 되어있는 어느건물의 뒷문을 두드렸다.
머리칼이 피에 젖은채 적우의 품에서 눈뜨지 않고 계속 자고 있는 꼬마. 카르는 경악하며 말했다.
“이제 유괴까지 하고 다니나? 아무리 썩어나는 세상이라지만..”
“크윽... 그렇게 밖에 안보이나? 역시 나란 놈은 친구에게 그렇게 밖에 안보이고. 슬퍼지려는군.”
“크하하, 농담일세. 그래 사정있어 보이는군. 어느 지인의 딸래미라도 되나? 일단 안으로 들지. 꼬마에게 쉴 공간도, 자네에게도 먹을 것과 휴식이 필요한 것 같으니. 나중에 이야기 합세.”
“고맙네.”
현재 적우가 방문한 곳은 수도의 도둑길드. 카르는 이름난 사기꾼이다. 그는 도둑과 사기는 너무나 궁합이 좋다고 여겨 도둑 길드장에게 한 귀족의 홀라당 벗겨 먹으므로써 자신의 유능함을 보이고, 수도의 작은 지부를 맡게 되었다. 2층으로 오르자 적당한 방에 적우를 인도하며 카르는 자신의 부하에게 먹을 것을 부탁했다.
“그래 얘는 여기에 자게 냅두고, 아래로 가서 이야기를 마저 하지.”
“그러지.”
아래층의 응접실에 약간의 먹을것이 차려졌다. 적우는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꼬마는 역적이라더군. 베이른 자작인가? 그 사람의 슬하인데 어찌어찌해서 도망친 모양인데, 내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아줄 구경꾼으로 좋을 것 같아서 구했는데 잠들어버리곤 깨어나질 않네.”
카르는 자신의 신분이 비록 사기꾼에 도둑이긴 했지만 바로 앞의 친구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는다란 생각이 들었다.
“자네.. 역적인가?”
“지금 왕의 기사도 무시하고 이렇게 버젓이 꼬마를 데리고 있으니 그런거 같군. 해서 보통의 여관에선 머물수도 없을 것 같고, 빨리 수도를 벗어나서 한 몇 년간 지방으로 갈 생각이네. 요즘 일거리가 그 쪽으로 많다고 하더군.”
“밖으로 나갈 루트를 달라?”
“그렇지! 수도가 성벽으로 쌓여 있어서 외침을 당하진 않아 평화롭고 좋지만, 밤이면 살육이 난무하고, 마음대로 나가기도 어려우니, 곤란하네.”
“오랜만에 나도 따라 나서 볼까?”
“관두게! 지금 따라 붙어봐야 피 볼 일 말고는 없으니.”
“그런가? 크하하. 여전히 재밌는 일은 혼자서 다 하고 다닌다니깐! 역적이 되었으니 지금의 국정을 뒤엎고 왕이라도 되어볼 생각은 없나?”
“재밌는 제안이긴 하지만 관두세. 더 일을 키우긴 싫군. 그러다 길드에서 쫓겨나면 돈도 많이 못번다고.”
그때 얼굴에 흉터 있는 갈색 옷을 걸친 사내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카르씨, 위층의 꼬마아가씨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카르 부하의 말에 적우는 일어섰다.
“일단 내 검무의 구경꾼에게 가봐야 할 것 같군.”
“그래, 좋은 관객일 것 같군! 크하하, 정말인지 언제나 재밌구만, 자네는.”
2층의 방에 꼬마가 훌쩍이고 있다. 적우는 아래로 내려가서 우유라도 가지고 올까 망설이다가 그냥 가기로 했다.
“훌쩍, 훌쩍..엄마..아빠.. 흑흑..”
“꼬마야?”
흠칫. 적우의 목소리에 꼬마는 놀라서 이불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누, 누구세요?”
“그때 밤에 널 살려준 사람인데?”
“아..그때는 감사했어요.”
‘나이게 걸맞지 않게 조숙한데? 왠지 찝찝해.’
겉으로 많이 봐서 열 살? 그런 꼬마가 이런 낯선 곳에서 모른 사람 앞에 이렇게 침착하게라.
“그래 사정이나 들어볼까? 일단 나는 용병 적우라 하지. 넌 이름이 뭐냐?”
“베에른 디 카에나. 베에른 가의 장녀이고 나이는 이제 스물입니다. 그러니 꼬마라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에? 꼬맹아! 네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것은 인정한다만 지금 같은 상황에 농담이..”
“디스펠 매직.”
번쩍! 순간 꼬마의 몸은 어른으로 변했다. 물론 걸치고 있던 옷이 작아져 몸을 가리지 못하자 언른 이불로 몸을 가렸다.
“저는 약간의 마법을 배웠습니다. 그날 살아 날수 있었던 것도 마법으로 모습을 위장해서 작은 구멍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아무튼 사정이나 듣고 싶네만, 아가씨, 아니 카에나 양. 덕분에 나도 역적이 되었으니 들을 수 있겠지?”
“저희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겨우 할아버지가 지방의 영주님 이라는 것이 역적으로 몰릴 이유가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이 일을 알려 왕께 억울한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을 상소하고 다른 지방의 영주들에게도 이를 알려 왕으로 하여금 사죄 받도록 하고 싶습니다. 용병이라 하셨죠? 제가 고용할 수도 있나요? 기사의 추적과 여러 용병의 추적을 따돌리신 분이라면 지방에 계신 저희 할아버지에게 저를 데려다 주실 수 있을 것 같아 부탁드립니다.”
“대가는?”
카에나는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게 없습니다. 후에..”
“용병은 말이야, 후를 보지 않아. 지금 현재를 보고 움직이지. 해서 대부분 돈에 움직이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너 같은 풋내기도 나를 고용할 기회가 있는 거야. 그런데 후라니? 무엇을? 부를? 명예를? 나는 지금 내 앞에 의뢰가 있다면 현재의 나에게 어떤 것이 돌아올지만 생각한다고.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너무 당차다는 생각은 안드나?”
“그럼..저라도...”
카에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빰이 붉게 물들었다.
“아름답기는 하군. 금발에 하얀피부라... 하지만 말이지.. 내가 그런걸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나? 나는 이래뵈도 1급 용병이라고. 전 대륙의 길드내에서 단 삼 십 명만이 지닐 수 있는 자격이지. 나를 움직이는데 적어도 하루 50 골드는 투자해야 한다고. 물론 최저 가격이 기도 하며 기본적인 경호일때만 그 정도이지. 사람을 베어 넘겨야 할때는.. 아무튼 계산은 치우도록 하지.”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가기만 한다면..”
“이봐 아가씨.. 충분히 예쁘다고. 나를 왜 고용할 생각만 하는거지? 일단은 나도 남자라 아름다운 아가씨의 부탁이라면 들어줄지도 모르잖아? 않그래? 무엇보다 내 검무의 구경꾼으로 꼽아 놨다고”
카에나의 담담하던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은 적우의 착각이었을까?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를 할아버지에게 되려다 주세요.”
“숙녀의 부탁이라면야, 기사는 아니지만 사내된 도리로 들어드려야겠죠.”
카에나의 눈에 적우의 투박한 얼굴의 표정이 잠시 바뀌는 듯했다. 적우 역시 사내된 도리란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자 뭔가 이상해서 말을 돌렸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카에나의 머리칼에 엉겨붙어 있는 피가 눈에 거슬렸다.
“찝찝하지? 일단 씻어. 그리고 음식은 후에 먹는게 낫겠지?”
“예. 그것도 그렇고, 옷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잠시만 기다리라고.”
적우가 방을 나서며 아래로 내려가자 카에나의 몸은 어느새 줄어들었다. 다시 열 살짜리 아이의 모습으로.
“휴.. 역시 사내를 홀리는 것은 조금 커다란 몸이 좋겠지?”
사실 카에나는 열 살의 꼬마다. 다만 엄청난 천재라 마법의 수재라는 것이 여느 열 살과 다르다면 다른 것이리라. 그리고 그녀의 비상한 머리란 여느 어른의 머리를 능가한다. 어떻게 보면 항시 멋대로 인데다가 약간의 광기를 지닌 적우에게 엮인 것이 카에나에게 불행일수도 있는 반면, 적우역시 카에나의 마법으로 커져버린 모습을 본 덕에 낚였다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