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구요?”
“대통령을 테러할 겁니다. 사실 계획도 다 세워놨지요. 일제시대 때 몸바친 순국선열들의 방법대로, 사제폭탄을 던질 겁니다.”
나는 박장대소를 했다. 입에서 씹고 있던 것들을 주체하지 못해 사방팔방으로 날렸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싸움이 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여긴 선술집이니까.
“아~나, 이 아저씨 이제 보니 개그맨 되려는 분이셨구만. 엣끼. 그게 지금 뭐하는 소립니까.”
“내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내일 오후 3시. 그게 결행시간이구요.”
“아~ 푸낄낄낄~ 그게 진짜 사실이라고 치자구요. 아저씨 혼자서 뭘 어떻게 한다고 그래요. 대통령은 방탄차에 경호원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을텐데.”
“물론 결행하는 건 나 혼자지만 실제로 내 뒤에는 동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폭탄도 그들이 줄거구요.”
나는 이 어이가 없는 소리에 점점 말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술김인가 싶어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아유, 그래요? 그럼 그 쪽 조직에서 한 것들 좀 대 보슈.”
“믿지 않으시겠지만 아주 많아요. 우리 뿌리는 엄청나게 깊게 닿아있죠. 우리 조직의 시작은 과거 6.25때부터 시작합니다. 북파공작원이란 것도 우리 조직 중 하나였어요. 그 때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당시 수많은 빨갱이들을 잡아들인 것, 5.16 당시 광주의 빨갱이들을 쓸어다가 묻어버린 것, 그리고 수많은 노동운동 현장에서 빨갱이들에게 철퇴를 내려준 것 등등 일일이 소개하자면 이 밤이 새도 모자랄 겁니다. 내가 가입하게 된 건 아마도 94년 경이었을 겁니다.”
“아~ 그럼 지금 대통령도 빨갱이라서?”
“조직 내에서는 그런 판단이 선 모양입니다. 사실 우리는 대통령 휘하의 조직은 모르게 기능해왔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 이후로 더 이상 행정부가 이런 꼴로 돌아가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요근래 최소 3개월 동안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대통령 경호단 내에까지 우리 조직원이 있구요.”
나는 다시 한 번 미친 듯이 웃어댔다.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 볼 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오늘 이 사람과는 처음 만난 거다. 어쩌다 서로가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길래 이야기동무나 되어볼까 하고 동석을 청해본 것이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과정이다.
“푸하하하~ 환장하겠네. 그럼 이야기 좀 해보쇼. 왜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을 벌인 후면 나는 어쨌든 살게 되지 못하니까.”
“!”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다. 현장에서 테러를 한다면 즉시 현행범으로 체포되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무기징역 정도는 되겠지.
“아니, 그럼 내일 3시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겁니까? 여기에 대통령이 오기라도 한답니까?”
“근처에서 개간작업과 새로운 고속도로 건설 등을 동시에 작업하는 큰 건설 프로젝트의 식이 있습니다. 거기서 일을 치룰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제서 또 생각이 났다. 이 근처에서 공사를 하게 된다고 한창 시끌벅적 했던. 부동산 사기꾼들이 와서 마을들을 휘젓던 것들도 생각났다. 점점 이 남자,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술이 깨는 것 같아 술잔에 술을 다시 붓고는 한 번에 들이키면서 짐짓 긴장했다. 들이켰는데 술이 취해오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정말 대통령이 온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그 스케쥴도 우리 조직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대외적으로 알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술을 또 한 잔 급하게 들이키고 난 후 또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 때가 올 것 같아 조직에 들어가고 난 후에도 결혼조차 하지 않고 이날 이때껏 살았습니다. 이제 할 일을 해야겠지요. 하지만 한 편으론 죽는 것도 두렵습니다. 잡혀서 어떤 고초들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박정희 시절 때 했던 고문 같은 것들을 당할 지도 모르죠. 그 때의 기록을 보고는 더욱 놀랐죠. 재판정에서 말을 하지 못하게 혀를 자른 후 약을 놓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딱 그렇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식으로 될 지도 모릅니다.”
이런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그 시절의 만행들에 빠삭한 나조차도 듣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시절의 만행에 빠삭할 수밖에 없는 건 이유가 있었다. 사실, 이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나야말로 그의 이념상에서 보면 진짜 빨갱이였다. 대학생 당시 학생운동 등은 물론이고 각 대학 지부마다 이론 설파도 앞장섰던 나. 몇 번이나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렸고, 겨우 턱걸이 식으로 법학과 졸업한 후 이 깡촌에서 자잘한 법률상담이나 해주면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 나. 그런 내게 이 남자는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다. 자신의 비밀에 대한 고백을 자기가 그토록 싫어하는 빨갱이에게 해주는 자라니.
남자는 다시 한 잔을 털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그렇게 조직 일만 하다 보니 정작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챙겨놓지를 못했더군요.....오늘 처음 만난 형씨 같은 사람한테 이런 고백이나 해야 할 정도로, 나는 어떤 친분도, 어떤 추억도 만들어놓지를 못했습니다. 그게 후회스러워요. 다른 조직원들도 형편은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조직원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터놓을 수도 없습니다. 비밀 유지란 게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하니까. 하지만, 이젠 형씨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들 다 털어놓았으니, 나도 내일 그 시간엔 홀가분하게 죽으러 갈 수 있겠구료. 법조일 하신다고 하셨죠? 나라 좋게 만들어놓으시길 빌겠소.”
그리고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를 일어났다. 나는 황당해져서 그를 쫒아가려 했지만, 술값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쫒아나온 술집 주인에게 덜미를 잡혀서 계산을 치뤘다. 가만 보니 어느새 내 주머니에 돈까지 넣어놓았다. 그리고 그 짧은 사이에 남자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정도면 그를 믿어도 되지 않나 하는 의혹이 솟았다. 그렇다면 정말 내일 오후 3시 경에 대통령에 대한 테러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하지만 또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이건 정말 미친 생각 같았다. 저 사람 술김에 무슨 소설 쓴 거 아냐, 하고 흘려들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정말 그 남자의 말대로라면. 그렇다면 나는 법률상으로는 중대범죄를 알고도 막지 않은 죄가 성립될 수 있다. 아니, 그런 쪼잔한 생각은 떨어버린다 치더라도, 이걸 막아야 하나 막지 말아야 하나, 그 선택은 전적으로 내게 달린 셈이다. 술값의 거스름돈이 손바닥 안에서 구겨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의 강한 햇볕을 받으며 출근하는 버스 속에서, 숙취에 시달리면서 나는 어젯 밤의 그 남자가 한 이야기들을 헛소리로 치부하기로 다짐했다. 사실일리도 없다. 서로 소주를 9병 정도나 마셨고, 그런 상태에서 제정신으로 그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었다. 소설가나 뭐 그 쯤 되는 정신병자 정도겠지. 그래, 그런 거야. 그렇게 그것을 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그 사실을 안 내게 지워진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이유도 강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겨우겨우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발을 들여놓고, 계단을 겨우겨우 올라서 숨을 몰아쉬며 사무실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내 귓전에 울리는 말. 차라리 그 말을 듣지만 않았더라도 이 다짐은 더 오래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까지 온다는데?”
그 말에 핏기가 싹 가시는 듯 했다. 숙취로 엉망이 된 몸에도 아랑곳 없이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마구 다가가 다짜고짜 물었다. 그 말을 한 건 사무실의 사무원이었다.
“뭐? 그 소리 어디서 들었어!”
“예? 아니, 김 선배님 왜 이러십니까?”
“시끄럽고, 그 이야기 어디서 들었냐고!”
“아는 친구가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 비서지 않습니까. 어떻게 우연찮게 들었습니다.”
“이.....이런 제길......”
어리둥절한 표정의 사무원을 등 뒤로 하고 내 자리에 앉은 채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작은 바늘이 9시. 아직은 6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나는 다짐한 것을 떠올렸다. 잊자. 잊어야 한다. 그게 편한거야.
하지만 시간의 시침이 하나, 둘씩 옮겨갈수록 머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자, 넌 알고 있어. 어떻게 할 거야. 그 사람 하나뿐이라면 넌 막을 수도 있어. 어제 그 남자를 봤잖아. 체격도 별로 크지 않아. 충분히 해 볼만 하다고. 어라, 이제 3시간 정도 남았네. 차도 없는 네가 그 근처까지 가려면 택시 타고 어쩌고 해도 2시간 족히 걸리는데. 너만이 알고 있고, 너만이 막을 수 있는 거야. 잊을 수도 없잖아. 인정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으압!”
나는 벌떡 일어나서 법률사무소의 사무장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그런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는 내게 사무장은 심히 당황한 듯 했다.
“김 대리. 왜 그래?”
“저.....잠시 볼일이 생각나서, 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아주 급한 건데 제가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 무슨 일인지는 묻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대강 이유를 둘러 붙이자 사무장은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당연히 황당하겠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 마구 다가와서는 하는 말이 그런 말이니. 한숨을 내쉬면서 사무장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 사람. 그렇다고 이렇게 사람 놀래키면 되겠어? 그렇게까지 말하는 거 보니 그거 되게 급한 모양이네. 얼른 갔다 와. 아. 부탁한 건은 다 정리해 놓았나?”
“예. 책상 위에 있는데 갖다드릴까요?”
“아니, 됐어. 내가 볼께. 얼른 갔다 오라고. 하지만 적어도 퇴근 이전까지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야 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야 해. 내가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상념이 잠시 얼핏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그러마 하고 나오는 길로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식장까지는 현재 교통 사정상 그다지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밟는다고 해도, 시간이 약간 빠듯할 것 같다.
겨우겨우 그 곳에 도착했을 무렵, 내 앞에는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다.
“누구십니까? 여기에는 이 마을 사람들 외에는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오실 수 없습니다.”
앞에서 검문을 하는 경호단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 택시의 뒷좌석에 앉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경호단원의 매서운 눈을 피해서,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연단에 보이는 화환, 그리고 그 밑에 써진 **건설 이**....
“이**씨께서 뭘 잊어버리셨다고 전달할 것도 있고 해서 왔습니다. 사실 좀 늦었습니다.”
“직원증 같은 것 가지고 계십니까?”
“직원증을 깜박했습니다. 이건 급한 건이라서....죄송하지만 좀 양해 바랍니다.”
그 매서운 눈이 나를 아직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그런데 그 매서운 눈의 소유자에게 갑자기 무전이 온 모양이다.
“예, 접니다. 예? 예......예. 알겠습니다. 그 쪽으로 통제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내밀었던 주민등록증을 다시 돌려주면서 말했다.
“다음부터는 좀 잘 챙겨주십시오. 원래가 이런 건 비공식적인 행사라서 이런 부분에는 저희가 민감합니다.”
“예~예~ 감사합니다~”
택시가 다시 식장 입구 근처의 주차장까지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남자를 잡기도 전에 먼저 뻗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꽤 많은 것 같고, 그렇다면 남자를 미처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 근처 동네 주민들까지 나온 식장이어서 그런지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가운데를 헤치고 나가는 것도 꽤 힘들었다. 하지만 천천히 헤쳐나가면서 나는 그 남자를 찾았다. 그러면서 나는 연단 쪽을 보았다. 만약 대통령이 들어오면 어디로 오게 될까. 분명 그 뒤의 작달막한 골목이 분명했다. 대통령이 깜짝 이벤트 식으로 나타난다면, 그 길목이 유력할 것이고, 나라도 그런 곳에서 기다리다가 폭탄을 던질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거기 있을지도 몰랐다.
제발, 이런 행동이 나만의 바보 같고 우스꽝스러운 짓이기를 바랬다. 어떤 술 취한 놈팽이에게 속아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라고. 그럼 난 사무실로 돌아가서 다시 업무를 보고 퇴근을 하고 오늘의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완전히 잊을 수 있는 거야. 이렇게 긴장했던 한 때가 있었다는 걸 평생의 우스개 소리로 모두에게 말하면서. 그러면서 술도 한 잔 또 걸치겠지. 그 때 그 남자와 마셨던 그런 소주를.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래, 바로 그런거야.
하지만 그 생각은 내 눈에 그 남자의 모습이 비치면서 모두 무너졌다. 정말 그 남자는 가드레일 맨 앞쪽에서 스스로가 말한 대로 무슨 가방 같은 것을 가지고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 가방에는 비죽이 끈 같은 것이 가늘게 나와 있는 것도 보였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그 수많은 움직임 속에서, 나는 그것이 유독 뚜렷하게 보였다. 아마도 저걸 당기고, 던지면. 그 뒤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었다. 사람들의 숲을 헤치면서, 나는 한걸음씩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떻게든 그 사태를 막고, 이 불쌍한 남자를 일단 여기서 끌어내는 생각만으로 온 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겨우겨우 나는 그 남자의 옆에까지 가는데 성공했다. 사람들의 아우성이 한층 높아져갔다. 아마도 대통령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다.
내가 어깨를 치자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니, 형씨가 어째서 여기.....”
“긴가민가 해서 왔는데 진짜였던거요?”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진짜라구요.”
남자의 입가에 실소 비슷한 것이 스쳐갔지만 내겐 그런 것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혼자 왔습니다. 사실은 말할 시간도 없었다는 게 더 맞겠지만. 어쨌든, 일단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갑시다. 우리,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도 인생 끝난 거 아니잖아요. 그 뭐야, 형씨가 말한 그런 친구, 내가 되어주겠소. 그러니까....”
“말리러 오셨다면 이미 늦었소. 그리고 어떻게든 끝장을 볼 셈입니다. 혹시나 생길 사태에 대해 이런 것도 가지고 왔죠.”
남자가 팔소매에서 천천히 사시미를 꺼내보였다. 빛나는 날이 아주 잘 서 있는 듯 했다. 그걸 보니 더욱 숨이 막혔다.
“이걸 가지고 형씨 다치게 하고 싶지 않소. 저리 가시오.”
“하지만......”
“이미 줄도 당겨놨습니다. 지연신관이라서 조금 있으면 터지게 될거요. 어차피 늦은 겁니다. 마지막으로 얘기 나눈 사람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에게 알리면 그만큼 더 많이 사람들이 다치게 될 거요. 저리 가시오. 얼른.”
남자가 사시미를 배에 들이댔다. 이미 말로 해결할 시간마저 다 지나버린 뒤였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 참상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등을 돌리는 척하면서 바로 남자의 사시미 쥔 손을 잽싸게 잡았다. 내딴엔 꽤 빠르게 몸놀림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면서 남자와 맞섰다. 이 멍청한 인간이 쥐고 있는 걸 내동댕이치고, 여기서 멱살을 잡고 끌어낸 후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어버릴 것이다. 꼭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다. 내 강한 집념이 사시미를 사이에 두고 남자의 완력과 맞섰다. 사람들에 가려 우리의 실랑이는 아직 경호대에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제발, 경호대가 이런 꼴을 보고 달려와 주기를, 그리고 우리를 떼어놓고 밖으로 일단 데리고 나와주기를 바랬다. 저 폭탄을 멀리 버리게 할 시간도 충분할 테고. 아니, 정말 그런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상황을 누가 좀 해결해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그러던 중, 팔이 순간 미끄러졌다. 그리고 손바닥에 이상한 감촉이 왔다. 뭔가를 푹 찌른, 그런 것 같은.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그 실랑이의 결과는 결국 남자를 내가 칼로 찌른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사시미는 남자의 심장 께에 아주 깊이 박혀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칼을 뺐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짓이었을 뿐이었다. 내 옷과 얼굴에 남자의 피가 한 됫박은 뿜어져 나와 범벅이 되었다. 남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원망하는 듯한 눈동자,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형씨.......”
그리고 남자는 고꾸라졌다. 주위의 사람들이 내 피 묻은 몰골을 알아차리고 흩어지려 아우성을 쳐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리고 저 쪽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대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날 검문하던 매서운 눈매의 경호원도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내가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 남자의 폭탄에 정신이 설핏 들었다. 나는 폭탄이 든 가방을 들고서 그 자리를 도망치려 했지만, 곧 달려온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땅바닥에 깔아뭉개져 버렸다. 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폭탄이 여기 들어있다고. 먼저 이 폭탄부터 좀 던져버리라고......
내 앞에 있는 남자가 안경을 치켜 올리고 있었다. 내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다. 왠지 정신이 좀 몽롱하다. 그러니까, 교도소로 오게 된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왠지, 모든게 뒤죽박죽이다. 어쨌건 지금은 내 무죄를 증명해야 할 상황이다.
“그러니까....당신은 대통령에 대한 테러를 막았다는 이야기죠?”
“몇 번을 이야기합니까. 그렇다고요.”
“칼에 찔린 남자와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선술집에서 만난 겁니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전날이구요.”
“그 남자가 왜 그런 이야기를 당신에게 했습니까?”
“자기는 죽으러 가는데 이때까지 그런 말을 터놓고 할 사람을 한 명도 만들어놓지 못했다고 말합디다. 마침 내가 동석을 청했기에 그도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겠지요.”
“흠.....”
조사관처럼 보이는 내 앞의 남자는 서류를 다시 뒤적였다.
"그런데 그 사람의 가방 안에 폭탄은 없더군요."
"끈 같은 건 있었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그 끈을 당겨서 터뜨린다고 내게 말했었습니다. 지연신관이 어쩌고 했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나고.....하여간 누구든 그 상황에서는 그를 말렸어야만 했죠......."
내 앞의 남자는 서류파일을 접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날 보며 말을 이었다.
“계속 진술의 일관성이 있군요. 이 정도면 진실이라고 봐도 되겠는데요. 어쨌든 너무 오래 여기 계신 것 같습니다. 좀 선처해 드리도록 하죠.”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나는 이런데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구요.”
“예, 예. 알겠습니다. 반드시 나오시게 만들어 드리죠.”
안경 쓴 사람의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잠깐 눌러두었던 그 몽롱한 기분이 다시 나를 삼키는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일으키고, 다시 방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나갈 수 있을까. 나는 자꾸 의심이 들었다. 뭐 어때, 지금은 잠시 이대로 있자구. 모든 건 다 밝혀지고 편안해질 거야. 그러다 잠시 힐끗 뒤를 보았다. 복도의 저 쪽 끝에서 안경 쓴 남자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검은 양복의 남자. 귀에는 무전기를 꽂고 있는 남자. 그 매서운 눈매.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때의 그 남자다. 그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얼핏, 뇌리에 무언가가 스쳐갔다. 폭탄을 던지려던 남자가 전날 했던 그 얘기. 대통령 경호대에도 줄이 닿아 있다는......나는 몸부림을 치면서 그 매서운 눈매의 남자를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전히 뭔가가 몽롱했다. 내 팔을 붙잡고 있는 두 명의 사람들 또한 억지로 힘을 써서 날 돌려놓으려 했다.
그 때 나는 보고야 말았다. 나를 바라보던 그 남자의 입꼬리가 아주 교활한 미소를 짓느라고 한껏 올라가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