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창전 - 4. 푸름가문 (4)

NEOKIDS 작성일 08.05.20 10: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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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환이 함께 탄 시운의 차가 서서히 본가 앞에서 멈췄다. 머리를 붕대로 살짝 싸 맨 적환과 시운이 함께 내리는 것을 보는 창해의 얼굴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창해 역시 가문의 비록을 보며 화산이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 어릴 적부터 배워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구파일방 중에서도 가장 요원하고 어떤 때는 적대적이었던 관계. 각종 실록에서 화산파는 이 한반도를 침공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여러 가지로 침공군에게 도움을 주었던 집단이었다. 그러한 기록까지 모두 적혀 있는 것이 바로 푸름 가문의 비급이었다.

“어인 일로 화산의 제자가 여기까지 납시었는가?”

달갑지는 않다는 얼굴로 창해가 묻자, 적환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화산의 제자가 푸름 가문의 스승님을 뵙습니다.”

“한국말은 나름대로 익히셨군그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배워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한국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흐흠. 신기하군그래. 하지만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네만.”

“화산과 바름, 푸름 가문의 관계는 화산의 1대 제자로써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저의 존재 또한 그리 탐탁치는 않게 여기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화급을 다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화급을 다투는 일?”

“아마, 창해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그 흑검에 관한 상황입니다.”

창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급의 맨 앞에 나와있는 흑검의 이야기. 그리고 구파일방과의 그 이후 주고받는 긴 역사. 모든 사태의 시작이 되어버린 그 흑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탓이다.

“사미의 상태로 미루어 짐작은 했지만, 역시인가?”

“그렇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우리가 앞서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대강 그동안의 상황을 여쭙고 도움을 청하고자.....”

“아직 도와준다고는 하지 않았네!”

창해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화산이라 하면 대대손손으로 우리 푸름과 바름을 노려 그 영험한 뜻에도 불구하고 속가나 다름없는 행태를 저질러 온 바, 그러한 과거를 뒤에 묻어두고 급하니까 도와달라? 이것은 무슨 어이없음이란 말인가?”

“그러나 흑검은......”

“어차피 그대 중원인들이 만든 악의 씨앗. 그것을 스스로 감당하는 것도 업보라 생각하면 괜찮을 일 아닌가?”

옆에 있던 시운이 궁금하여 창해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흑검이란 대체 어떠한 존재이길래 도움을 청하려고 여기까지......”

“넌 잠자코 있거라.”

창해는 적환을 노려보며 시운의 질문을 제지했다.

“이번에도 도와주면 힘이 떨어진 틈을 타서 나의 제자를 도륙하려는 속셈이 아니던가? 입이 있으면 말해보게. 믿었던 개에게 물리는 짓을 다시 반복하긴 싫으니 말일세.”

적환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창해의 일갈이 끝나자 말했다.

“외람되오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게.”

“저는 화산의 1대 제자로써, 화산의 최고 장로님께 무공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 최고 장로님께 이 동쪽 나라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최고 장로님은 항상 죄송함을 품고 계셨죠. 두 가문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구파일방의 일원으로 흑검의 봉인을 책임지는 역할에 대해서도 자랑스러워 하셨죠. 그리고 만약의 경우, 여러분들이 저희의 힘이 되어줄 거란 사실에 마음 든든해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화산의 초대부터 했던 저희의 원죄가 너무나 큰 때문에 이제껏 말씀을 드리지 못한 것이지요. 그리고 화산 내부의 반발도 컸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사실들만은 제 목숨을 내어놓고 보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적환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했다.

“이런 모습을 저희 사부님에게 전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상황도 상황이니만치......이렇게 못 믿으시겠다 하시면........”

창해는 잠시 눈썹을 꿈틀했다. 시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다. 이런 모습이라는 건 과거사에 묶여있는 옹졸한 모습이라는 뜻일 터. 어떻게 보면 일종의 도발이라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적환의 검이 등 뒤에서 뽑혀지며 챙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란 시운과 싸울아비들은 그가 검을 뽑은 찰나에 뒤이어 검을 뽑으며 응전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적환의 검은 싸울아비와 창해를 겨누지 않았다. 검의 끝은 적환 자신의 왼쪽 어깨를 겨누고 있었다.

“이 보잘것없는 저의 팔 한 짝이나마, 저의 진심을 전달하고 화산과 여러분 사이의 은원을 해결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잠깐만! 멈추시......”

시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환의 칼끝이 맹렬하게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들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시운도 말릴 틈이 없었던 것을 창해의 경공이 빠르게 쇄도해 바로 검을 잡은 손을 비틀어 버린 것이었다. 비틀어진 손에서 떨어져 나간 검이 바닥에 소리를 내며 저만치 뒹굴었다.

창해는 잠시 적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 진짜 잘라낼 셈이었구나.”

“그렇습니다.”

창해의 손이 장으로 바뀌어 적환의 싸대기를 날렸다. 힘을 덜 주었다고는 하나 무공과 공력이 결코 적지 않은 적환의 무릎이 확 꺾어질 정도였다.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는 적환이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창해를 바라보았다.

“멍청한 놈. 누가 네 말처럼 그 보잘것없는 팔을 원한다 하였더냐? 네 사부는 너에게 자신의 몸을 그렇게 함부로 하라고 가르쳐 주더냐? 거기다가 흑검이 뛰쳐나오려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막는 것이 우선일터, 한 팔 가지고 어떻게 해볼 수 있을 정도로 세상사가 만만해 보이느냐?”

적환이 꿇어앉은 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시운은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창해는 그런 적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하핫!!!!!! 이거야 원. 이렇게까지 나오는데야 나도 더 할 말이 없다. 네 놈을 믿도록 하지.”

그러면서 창해는 탄지를 한 번 시운에게 날렸다. 시운의 이마에 손가락을 퉁겨 치는 듯한 아픔이 작렬했다.

“악!!!!!!!!!!!!!!!”

“모자란 놈. 그 순간에서 네가 제일 가까이 있었으니 막았어야지 되려 당황하면 어떻게 하느냐? 저 놈은 내 모자란 손자 시운이라고 하네. 자, 손님을 모시고 오너라. 여기 모인 모든 싸울아비들도 똑똑히 들어 두거라. 오늘부터는 화산과 연대하여 공동으로 싸울 것이니라.”

적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창해는 적환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는 싸울아비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모두를 데리고 본가 안으로 향했다.


한편, 중국 허난성 덩펑현 쑹산. 그 중 소실봉 중턱에 위치한 소림사. 발타와 달마, 혜가 이래로 고래의 신비로운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땅 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장소가 소림사에는 있었다. 역대 고승들의 무덤을 탑처럼 만들어 그것들이 숲을 이룬 탑림. 그 밑 지하에는 또 다른 넓은 공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꼬불꼬불한 미로에 수많은 암기가 설치되어 있는 통로들 사이로 불규칙하게 퍼져 있는 지하기지 같은 공간. 이 곳은 발타 선사가 효문제의 명으로 소림사를 세울 당시, 30년간 머무르며 설계했었다. 효문제는 발타 선사에게 단지 절만 세우라는 명을 내린 것이 아니라 유사시 자신이 피신할 수 있는 비밀의 장소까지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 수록 이 공간들은 다른 용도들로 활용되었다. 예전 중국공산당의 문화혁명 시절에는 소림사의 중요한 인사들을 비롯한 몇몇 정치적 인사들이 피신하기도 했고, 또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중국공산당의 중책에 올라가 소림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다른 용도로는 무공비급을 보관해 두는 것도 있었다. 물론 장경각이라고 하여 불경과 무공비급을 함께 보관하긴 했으나, 그 곳의 비급들은 전부 일반인 정도나 익힐 수 있는 초보적인 것이고, 실질적인 내공을 키우는 법이나 중요한 것들은 모두 그 지하에에서 계율원과 나한전에서 파견된 나한들의 엄중한 경계 하에 보관되고 있었다. 구파일방 역시 문화혁명 등의 힘든 시절에는 전부 이 곳에 비급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지금, 그 지하보관소-중추각이라 불리는 곳의 바닥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시신들과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사지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거나 돌벽에 짓이겨지듯 붙어 있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나한이 자신의 목숨을 짜내어 그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이것을 알려야만.......”

그러나 단 한 번의 빛이 나면서 그 육체는 다섯 동강이로 갈라져 다른 시신들과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 어찌나 심하게 찢어졌는지 입고 있던 법복마저 단지 헝겊 쪼가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나한을 시신으로 만든 무기가 뱀이 기어가듯 바닥을 훑었다. 자잘한 금속편이 하나의 줄에 묶여 어느새 검이 되었다. 그 검을 쥔 자의 얼굴은 온통 시신에서 튄 핏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그는 얼굴에 흐르는 그 피를 혀로 핥아 먹으며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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