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재조명 궁예

제우스민이짱 작성일 08.06.20 21: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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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의 출생기록은 정확하게는 모르나 신라47대 현안왕 아님
48대 경문왕 아들로 전해지고 있다.궁예는 기훤산적부터 북원의 양길까지 자기세력을 어떻게
키웠는가를 알면 그를 진정한 난세의 영웅이라 부르는데에
그 누구도 망설이지 않을것이다.
삼국사기에 다소 궁예에게 불리한면이 많이 적힌책에서도
궁예는 병사와 먹고 자고 입는 것을 같이 하였다고 한다.



왕건의 애기에도 이런 애기는 없다.
즉 전쟁의 승리와 영웅적 애기는 많으나 실상 이런 애기는 없다.얼마나 궁예가 병사들과 동고동락을 같이 했는지 단적으로 알수 있다.삼국사기에서 궁예에 대해 깎아내리기 바쁘데 이 같은 일을 쓴것을 보면
그 당시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인것이다.
그 어느 병사가 이같은 장군을 따르지 않겠는가?
궁예는 그렇게 자기세력을 키우고 한나라의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궁예를 조명한 학자들이 재조명한것중에 본인이 보기에 타당한다는것을
적으려한다.
궁예의 오류를 흔희 철원으로 도읍 이전
강씨부인과 두태자살인 관신법 등을 든다
이제 그의 오명을 서서히 벗기려 한다.
궁예 북원의 양길마져 제압한 궁예는 이제 견훤처럼
한나라의 황제가 되려할것이다.
근데 궁예는 군사적인 기반에 비해 경제적인 기반이 턱없이 약했다.
그때에 왕건의 아버지가 송악에 막대한 돈을 투자
한나라의 도읍으로 만든다.
그리고 궁예에게 바친다.
궁예는 여기서 얼마나 반갑지 않겠는가?



그 당시 궁예가 막강하였다고는 하나 송악뿐만 아니라
그 일대 패서인이 모두 뭉쳐 대항하였다면
궁예가 그리 빨리 기반을 잡지 못했을것이다.싸우지도 않고 그 지역을 흡수함을 물론 이렇게 도읍까지
힘 안들이고 생기니 물론 서로의이해관계 맞았다고 보아야 할것이다.그러나 훗날 이것이 궁예에게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경향을 나타낸다.아직 나라의 체제도 바로 잡히지 않고 과거제도도 없는 시점에
당연히 송악중심적인물들로 정계가 채워지기 마련이다.



궁예가 보았을때 궁예가 원하는 신하들이라기보다는 왕건 세력인
송악과 그 주변 패서인들로 채워지기 시작한것이다.그리고 왕건은 그주위 호적들에게 힘으로 잡기보다는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주면서 안정적인 정치기반을 굳힌다
그해 비해 궁예는 자신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호적들을
규합하기를 원했고 이해 잦은 마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것이다.
이에 궁예는 송악에서 자기정치의 한계성을 느끼고
그나마 호적의 세력이 미약한 철원에 자기의 정치의 뜻을 세우려한다.
즉 궁예가 쓸때없이 백성들을 부역에 쓴것이 아니라
더이상에 송악에서의 정치는 자기기반마져 위협을 받을수 있기에
필수악적으로 천도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한 예로 묘청의 난은 개경파 김부식의 진압군으로 진압이 된다.
서경으로 도읍이 옮겨지면 개경의 정치인들은 그들의 입지가
사라지게 되니 자연히 반대하는것이다.
이에 송악의 정치인들은 무리한 공사로 규정
단호히 반대를 하지만 끝내 시행된다.
궁예와 호족들간에 살기위한 보이지 않는 전쟁인것이다.
즉 궁예가 시간이 남아서 돈이 남아서 국민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왕건방송처럼 그런 왕건영웅적묘사를 위해서 천도를 한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두에 적은바 같이 궁예처럼 백성과
자기병사들에게 애착이 강한 사람도 없다.
왕건 영웅일대기에 영웅적묘사는 많으나
이같이 궁예같은 말은 적히지 않듯이 궁예는 백성을 사랑하고
병사를 사랑한 군주이다.
그 군주가 무엇때문에 천도를 하게된가를 사실적으로 바라보아야한다.
살기위한 마지막 보류였던것이다.



강씨부인과 두태자살인 이같은 말에 다소 여러가지 모순이 발견된다.강씨부인이 원래 왕건의 여자였다고 적힌것과 궁예가 정말 죽였겠는가?
하는말이다.
이부분이 학자들 사이에 제일 분분한 상황이지만
첫째적으로 강씨부인과 두태자는 싹을 자르기 위해
궁예를 처단하고 후에 왕건세력이 죽였다는 설과
설사 궁예가 죽였다고 해도 그만한 이유를 있을것이라는 말이 적지않다.왕건의 여자인것을 후에 알고 왕건의 밀애후에 태어난 자식
미륵이라고 자처하는 궁예가 강씨부인과 그리 많은 잠자리를 하지 않을것이다.



그로인해 실제로 왕건의 자식이고 강씨부인또한
태자들에게 은밀히 그리말하고 왕건에게도 그렇게 전했다는말이다.
이에 궁예는 왕건과 대립을 지기보다 강씨부인과 두태자를 죽이는 정치적인 상황이라는것이다.
그때에 왕건은 이미 호적들의 우호적 인물로 그 세가 궁예와
거의 대등하게 되었을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전에 금성공략으로 왕건은 이미 궁예를 능가하는
친송을 백성들에게 들었으며 호적들은 궁예보다
그와 혈연적으로 맺어지를 원했기 때문에 얼마나
왕건의 권력이 강했는지 이부분 또한 단적으로 알수 있는 부분이다.



후백제의 견훤처럼 호족들이 황실과 혈연적관계를 맺지않고
왜 왕건과 그런 관계를 맺는가는 이미 그의 권력이
황제를 능가했다는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수 있는 문제이다.
이미 조정에서는 왕건과 궁예의 파워대결이 시작이었고
그세력에 호족들이 보기에 자기쪽 사람인 왕건이
황제가 되는것은 당연한것이기에 점점 궁예는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는다.그리고 신라황실이라는 점도 점점알게됨에 따라 그의 입지가 더욱더 좁아진다.그래서 그는 신라인을 이유없이 탄압한것이 아니라
그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탄압을 할수밖에 없을을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돌파구를 찾기위해 궁예는 고심하였을것이다.
관심법에 대해 궁예가 *사람처럼 이유없이 사람들에게 대물었다고 전한다.과연 *것일까? 아닐것이다.
궁예는 자기가 살기위한 돌파구를 찾은것이다
난 미륵이니 너희들의 마음을 뚫어 볼수 있다.
즉 반란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란할지도 모른다는 심증이 있어도 왕건과 그 세력들은 
증거가 없음 그리쉽게 궁예라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그러나 이 관신법은 궁예가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지 알수 있다.
지금이야 다소 웃기고 말도 안되게 볼수 있지만
미륵으로서 같이 먹고 자고 입고 한 궁예가 미륵으로서 당연히 관신법이
있다는 것은 아무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다소 무리수적인 부분도 있을것이다.
대립적 왕건세력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해
시험적으로 죄를 물어 처벌하고 엄중히 하였을것이다.이에 위협을 느낀 왕건세력은 어차피 어찌될지 모를 운명에
칼을 들고 끝내 궁예는 역사속 저편으로 사라진다.
역사는 승리자의 입맛에 따라 쓰여진다.
왕건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세력을 어느정도 갖춘 사람이라고 하면
궁예는 맨손으로 밑바닥부터 그세력을 키운 황제이다.과연 철원천도가 북방을 치기 위해서일까?
밑에 후백제가 있는데? 
학자들의 조명뿐만 아니라 잠시 생각해 보면 하나하나 맞지않는 부분이 드러난다.
호랑이 새끼를 키운게 죄라면 죄인 궁예 
최소 왕건의 고려를 부정하지는 않아도
궁예의 오명은 벗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것이 후세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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