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시각 6시 30분. 회사엔 어떻게든 말해 놓을 터이니 염려 말라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나는 광속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섰어. 출근 시간 9시. 아직까지는 시간이 괜찮을 것 같았지. 한 2시간 여 정도는 있으니까 버스를 타고 지하철 역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거든.
그런 나의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어머님은 아름다우신 입술로 단박에 재로 만들어버리셨지.
"여기 버스 오려면 9시나 되어야 오는데......"
주여. 저는 이제 정녕 끝장난 것이옵니까. 다음날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의 몸냄새에 홀려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데 대한 벌치고는 참으로 가혹무쌍하십니다요, 라는 원망을 좌절포즈와 함께 시전하고 있는데, 어머님께서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집안으로 달려가셨어. 하지만 이미 좌절의 나락에 빠진 내게 그런 사정이 눈에 들어올 리는 없었지.
그런데 다음 순간, 어머님은 그녀, 수영씨의 손을 잡고 나오시더라고. 아직도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녀를.
"아, 글쎄, 난 싫다구요!"
"어머, 얘. 한 번 좀 네 차로 태워다 줘라.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러니?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그래도 싫어요. 절대 안할래요."
"얘도 고집은 참?"
그 상황을 혼이 나간 채 바라보고 있는 나도 참 나였지. 어쨌든 수영씨와 실랑이를 벌이던 어머님이 가만히 뒤로 돌아서시더니 나직하게 읊조리셨어.
"지후군, 네가 끌고 왔잖니?"
그 말에 수영씨가 움찔하더구만.
"그것도 목을 수도로 내리쳐서 납치해온 거지?"
내가 있는 쪽을 외면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수영씨가 죄책감 같은 것에 휩싸여 오그라들고 있다는 상황은 눈칫밥으로 깨달을 수 있었지. 그 때의 솔직한 내 심경은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지.
어머님 나이샷~
"멀쩡한 사람 이렇게 출근도 못하게 만들어놓고......지후군은 아마 회사에서 짤려서 거리를 떠돌다 거지가 되어 엎드려서는 동전푼이나 받으며 연명하다가 너를 원망하며 악성폐렴에 그만 몸이 망가져 피를 토하다 죽게 될지도 몰라....불쌍한 지후군.....흑....."
어이, 어머님. 너무 디테일이 심하신데요.
하지만 그 디테일함은 꽤나 수영씨한테는 먹혀들었던 것 같아. 수영씨는 갑자기 돌아서서는 빽 소리를 지르더군.
"알았어요! 데려다 주면 될 거 아니에요!"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집안으로 다시 들어갔어. 어머니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면서 말씀하셨지.
"우리 애가 아직도 사춘기 같은 풍랑의 시절을 못 벗어나서 버릇이 좀 없으니 이해해요."
이해고 뭐고를 떠나서, 이런 변태 짐승놈에게 그런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니 나로서는 엎드려 어머님의 발등에 키스라도 하고픈 충동이 일었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는 없었어. 그녀 역시 완전히 광속으로 준비를 마쳤더군. 그래봐야 기초 화장 조금 하고 머리 묶은 정도고, 트레이닝복은 그대로였지만.
"따라와."
그녀는 마치 개구리 정도에게 말을 거는 듯한 거만함으로 날 일관되게 압도하면서 차고로 인도했어. 따라가는 동안 트레이닝복 엉덩이 쪽에 야실야실 드러나는 팬티라인이 뭔가 나의 심장을 더욱 불끈하게 만들었지만, (확실히 말해 두는데 심장만 그랬음) 차고에 들어선 다음 순간은 그런 생각이 언제 머릿속에 있었냐고 할 정도로 놀라버렸어.
"뭐해? 얼른 타!"
그녀는 윙도어를 열어 운전석에 앉으면서 외쳤어. 나는 턱이 빠진 것처럼 헤벌레하면서 조수석 문을 열었어. 역시 윙도어가 위로 슥 올라가 주는 게 영 느낌이 신기하고 재밌었지.
그녀의 차는 무려 빨간색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였던 거야.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