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밥을 먹을 때조차도 그녀를 보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어. 그렇게 맞이한 다음날 아침. 다시 이모님이 불렀을 때는 반정욱과 함께 정장차림의 떡대들이 열 명 정도 와서 대기하고 있었지.
“국정원 요원들이고, 믿을만한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이 이제 모든 걸 도와줄 거고, 앞으로 이 집 근처들에도 배치될 거고, 자네와 관련 있는 쪽들은 거의 다 배치될 거야. 그나마 자네가 회사랑 집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배치할 곳이 적어서 다행이지. 물론 정욱이가 같이 움직여 줄 거고.”
대강 인사가 끝나자 이모님은 귀에다 대고 속삭였어.
“갔다 오거든 수영이 좀 잘 위로해봐. 여기서 그럴만한 사람은 자네 밖에 없으니까.”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제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어. 그녀는 나를 완전히 싫어하고 있었으니까.
처음엔 그 좋아한다는 대학교 선배 때문에 내가 싫었을 거고, 지금은 완전히 나라는 인간의 밑바닥을 봐서 싫어할 거고. 운명의 인간치고는 참 내가 봐도 바보 같고 비겁한 놈이니, 도대체 어떻게 다가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고.
국정원 요원들이 몰고 온 차에 타려고 문 밖으로 막 나갔다가 뒤돌아봤을 때, 내 눈에 툇마루 쪽으로 나온 수영 씨의 모습이 들어왔어. 전의 트레이닝복 차림과는 달리 도포 같은 하얀 자락을 입고 있는데 너무 아름다웠어. 하지만 얼굴은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고.
그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뭐라고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달싹거려보다가, 그냥 고개만 꾸벅, 해버렸고, 수영은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모님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어.
난 세 대의 차량 중 중앙의 차량에 탔고, 반정욱이 바로 내 옆에 앉았어. 국정원 요원들도 전부 차에 탑승하고나자 차는 곧바로 이모님 집앞을 빠져나와서 큰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어. 차들은 먼저 회사에 가서 내 개인물품을 정리할 동안 너무 큰 소문나지 않게 사장에게 말을 해주게 되어있었고, 그 다음은 내가 살고 있던 숙소로 가서 간단한 몇 가지 필요한 물품들 챙겨서 나올 예정이었어.
군데군데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서 덜컹거리는 차체 속에서, 난 계속 수영씨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지.
재수가 없다면, 아마도 그건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수영씨의 모습이 될거라 생각하니 안타깝고, 내 자신에게 화도 나고, 뭐 그런 상황이 되어 있는데, 무뚝뚝하게 있을 줄 알았던 반정욱이 넌지시 말을 꺼내더라고.
“아기씨가 마, 말은 그리 해도 나쁜 분은 아닙니더. 어릴 때부터 얼매나 참한 아기씨였는지 모립니더.”
“어릴 때부터요?”
“하모예. 지는 마 수영아기씨 오래 전부터 모셨심더. 수영 아기씨 막 어린 시절부터 봐 왔으니까네 근 한 20년 됐지예.”
“.......”
난 잠시 말을 꺼낼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퍼뜩 생각나서 물었어.
“그럼, 용의 수명은 인간하고 비슷한 건가요?”
“마, 그건 지도 잘 몰겠심더. 다만, 어느 정도 성인이 되는 시절들은 비슷한 거 같심니더.”
“이모님을 언제부터 모시고 계셨는데요.”
“지 나이로 한 12살 때부터 모셨지예.”
“그런데 이모님은 그대로시고?”
“글치예.”
말수가 없을 줄 알았는데 쾌활하게 말을 꺼내면서 내 기분을 풀어주기도 하고, 또 나름의 정보들도 알려주는 정욱씨가 고마웠어.
정욱씨는 어릴 적 산사태로 죽을 뻔한 걸 이모님이 구해줬대. 그것도 이모님의 본 모습이 드러난 상태에서. 그런데 처음 봤는데도 이모님이 무섭지 않았더라는 거야.
“그 땐 머랄까, 그냥 절 구해주는 그 손길이 마냥 포근하고 좋았십니더.”
산사태 사고로 집도 절도 없이 호적에까지 죽은 것으로 되어버린 반정욱씨를 거두고 길러준 것이 이모님. 그리고 모시면서 자신이 듣고 보고 알게 된 용이라는 존재에 대한 동정심. 생명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이것저것 전투술까지 배운 부지런함.
“마, 싸나이가 되어서 마 여자 하나 못 지키면 말이 되겠십니꺼. 반은 그래 시작했는데, 죽다 살다를 반복하다 보니까 이젠 마 누구 하나 가르쳐줘야 안되겠나 싶을 정도지예. 국정원 쪽에서도 같이 자주 작전 나가고 한 일이 있어서 친구들도 많아지게 됐고예.”
반정욱은 작전 이야기를 꺼내자 신이 난다는 듯 앞의 운전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어.
“야 동욱아. 그 때 기억나나. 저기 캄보디아 갔을 때.”
“잊을 수가 있나요. 지금도 살아 돌아온 게 신기한데.”
“낄낄낄, 그 때 유탄발사기 찾아서 쏠라카니까네 그 누구더라 고문관 시키? 정환이, 맞다. 그놈아가 울 뒤쫒아오는 차 안에다가 그걸 다 놔둬가 킥킥킥킥~”
“그 새끼들이 그걸 우리한테 쏴댔죠. 낄낄낄~”
캄보디아라니.....도대체 무슨 말이야?
“베트남전때 얘긴가요?”
“아니라예. 이기 다 대외비라서 자세하게는 못 가르켜 드리지만, 대강 저 친구나 나나 한창 20대 때 쯤이라고 생각하시면 될낍니더.”
뭐 그 시절에 그런 짓도 하고 다녔냐는 복잡한 생각도 들긴 했지만 더 말을 하진 않았어. 앞으로를 생각하면 이제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잖아.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는 것도 어느 정도 가라앉고 조용히 차도를 달리면서 나아갈 즈음, 또 반정욱이 나직이 말했어.
“뭐, 어쨌든 각오 단단히 하이소. 여차하믄 마 총도 쏴봐야 될끼고, 사람도 죽여봐야 될끼고. 그래야 할낍니더.”
살짝, 어이가 없었어.
“사람을, 죽여요?”
“드라켄 야가인지 뭐시깽인지 하는 놈들, 장난 아입니더. 전에 이모님이 해외 나갔을 때, 딱 한 번 그 놈들이랑 붙어본 적이 있십니더. 이건 뭐 보통 사람들이면 목숨이 아까운 줄 알아야 하는데, 임마들은 마 뽕맞은 사람 맹키로 눈이 풀어져서 댐비는 거라예. 마 총알이 몸땡이에 박혀도 자빠지지도 않고 되레 이쪽으로 쏘면서 오는데, 그날 십년감수 했십니더.”
그렇게 해서 한 놈을 잡아놓고 족치니까 약을 물고 자살하더라는 말까지 하더군. 그러고 보니까 다시 생각이 났어. 폭탄이 터진 차 안에서 다리만 좀 절면서 나오던 그 미청년이. 충분히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겠다 싶었지.
“그런 놈들 상대로 우리가 10분이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동욱씨의 걱정에 반정욱이 호탕하게 말했어.
“걱정 하덜 마라. 글마들도 인간 아이가. 다리부터 조사뿔믄 지 아무리 겨오고 싶어도 못온다. 이거 다른 아-들한테도 전파해놔야칸다.”
“예.”
반정욱은 다시 비장한 얼굴로 말했어.
“이번엔 해외가 아니라 마 울나라 안에서 싸우는 거니까네 놈들도 많이 움직이진 못하겠지만, 온다카면 불리한 것은 우리라예. 그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모님 만은 지킬깁니더......”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걱정과 이모님에 대한 생각으로 정욱씨는 그렇게 말한 것이겠지만, 난 그 말투와 표정 안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꼈어. 그리고는 눈치로 그걸 정리해보고는 설마, 하면서 다시 차도로 고개를 돌렸어.
그건, 사랑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했지. 아마.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