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건, 그래서 구르고 있는데, 정욱씨가 보기에도 도저히 안 되겠던지 잠깐 휴식하자고 하더라고.
알잖아. 꿀맛 같은 휴식~ 산바람이 솔솔 시원하게 불어오면서 땀을 식혀주는데 그제서야 반란을 일으키던 몸이 살살 말을 듣기 시작하는 거야. 쑤시고 저리는 건 여전했지만.
막간의 휴식에 정욱씨도 옆에 앉길래, 아무 말 없이 둘이 앉아만 있는데, 그러고 있기도 뭔가 민망스러워서 잠깐 물어봤지.
“도대체 이 짓을 얼마나 해야 할까요?”
“낸들 압니꺼. 어쨌든 마 지금까지 했는데도 이렇게 체력이 안좋으믄, 마 신체능력은 아닌갑다 해야지예.”
뭐든 해보는 게 낫다지만, 이건 아닌 것 같더라. 이러다간 어느 철년에 내 능력이란 걸 발견할 수 있을까도 걱정되었고.
내 표정을 읽었는지 정욱씨가 한 마디 넌지시 하더군.
“너무 초조해하지 마소.”
낭패감을 지우려고 나는 허리춤에 달아놓은 수통의 물을 마셨어. 의외로 장비나 옷들은 다 있었기에 챙겨 입기는 했어도, 이거 무게가 장난 아닌데. 수통의 물만 해도 허리가 배기기까지 하는 게 죽겠구만. 이걸 전에 군대 있을 때는 도대체 내가 어떻게 허리춤에 달고 뛰었을까 싶었다.
“능력이 있다카면, 알아서 튀나오겠지예. 그기 아니더라도, 지후씨 노력은 칭찬할만한 깁니더. 마, 그래도 일단 체력이란 건 모든 것의 기본이니까네 말이지예. 적어도 제 한 몸은 건사해보겠다는 이야기지 않십니꺼?”
“그렇죠, 뭐.....”
“전에는 뛰댕기는 거나 하시는 거나 억수로 못미더울 정도였는데 알아서 이렇게 스스로 단련한다카니 깜짝 놀랬십니더.”
못미더워 보인다는 그 말을 듣고, 이참에 정욱씨한테는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어. 계속 맘 속에 남아있는 앙금이 있다면 나 자신이 견디기 힘들거고, 정욱씨도 날 계속 못믿을 테니까.
그래서 안해도 되는 타이밍인거 알면서 굳이 드라켄 야거 때부터 명함을 불태우며 결심한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 했어.
“난 지금 여기 분들과 가족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움직이고 노력할 거에요. 입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변할 거라구요. 그러니까 많이 도와주세요.”
내 이실직고를 듣고 완전히 돌처럼 굳었던 정욱씨의 표정이 내 결심 이야기와 마무리에서 살짝 풀어지더니.
“그럼, 지금은 그 마.....”
“전혀. 난 드라켄 야거와는 연락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제부터 적인 거죠. 이건 정말 믿어주세요.”
“그거도 그거지만 그......”
“뭐가요?”
“그럼 이제 마 수영 아기씨랑 잘 해보겠다 카는....그런 말씀이지예?”
얼랄랄라. 이야기를 해놓고 보니 그렇게 되었네. 갑작스런 질문에 난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피했어. 정욱씨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옆구리를 툭툭 치네?
“에에에~ 얼래리꼴래리~”
“왜 그래요, 민망하게.”
“알문서 와 이캅니꺼, 큭큭큭~”
호오라. 그렇게 유치만빵하게 나오신다 이거지. 그럼 나도 할 말이 없는 게 아니지. 그래서 설마 속에 묻어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어 휘둘러봤어.
“그래서, 저도 ‘이모님을 사모하는’ 정욱씨처럼 그렇게 열심히 해볼려구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정욱씨가 무슨 고양이가 놀랜 것처럼 화들짝 점프를 하더라.
“무.......무슨 말도 안되는 얘기라예! 누....누누누누가 마님을 좋아한다꼬.......마 생사랍 때리잡는 소리 하지 마이소!”
아라라? 이거 설마가 아니었잖아? 그 부리부리한 눈썹이 부끄러움으로 파르르르 떨리기까지 하는데? 난 마치 안방마님에 대한 연정을 들킨 조선시대 돌쇠 같은 정욱씨의 모습 보면서 속으로 무진장 고소해했지만, 이때까지는 깨닫지 못했지. 내가 지금 훈련교관을 놀렸다는 사실을.
“마......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인제 일나소 고마! 오늘은 해지기 전까지 뛰는 깁니더!”
오메 젠장. 해지기 전까지? 그래도 오후 4시쯤엔 항상 그쳤는데, 어째서! 왜! 갑자기! 이렇게 말할 수도 없었지. 자업자득이니까. 이눔의 주둥아리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 편히 살긴 글렀구나 하면서 난 또다시 일어나서 오냐 이새퀴 너죽고 나죽자 하는 몸뚱아리의 반란을 예감하며 다시 뛰기 시작했어.
정말 뛰다가 보니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해가 완전히 저물려고 하더라. 난 아예 바닥에 뻗어버렸고, 훈련복은 완전히 소금기와 흙으로 버무려진 꼴이 되었지만, 모든 걸 말하고 인정받은 기분이라서 그런지 파김치가 된 몸과는 달리 계속 가슴은 뿌듯하기만 했지. 이런 마음이 수영이한테 전해졌으면 좋으련만 하는 심정도 느끼고.
집으로 돌아와서 녹초가 된 몸을 씻고서 잠자리에 들까 하다가, 수영이가 보던 꽃나무들이 눈에 들어왔어. 잠시 그걸 구경해볼까 하면서 난 미등이 켜져 있는 마당으로 나왔고.
처음엔 잘 몰랐는데, 지금 피어있기엔 제철이 아닌 것 같은데도 꽃들은 이상하게 활짝 피어서 잎들을 흩날리고 있더라고. 그런 꽃나무들과 미등이 어우러진 속에 우두커니 서있는 조그만 정자로 가서 앉았어.
가만히 앉아서 보니, 이건 뭐 피곤한 와중에도 무릉도원이 따로 없더구먼. 왜 수영이가 그 곳을 구경하고 있었는지 알 것도 같았고.
그렇게 하얀 목욕가운 같은 것 한 자락만 걸친 채로 멍하니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좋았어. 생명의 위협이니 드라켄 야거니 용이니 뭐니 아무 것도 머릿속에서 건져지지 않고 그저 안락하고 평안한 밤의 온기와 색채들.
그렇게 얼마쯤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뭔가가 시야에 잡히면서 누군가가 날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기 시작했지. 그건 수영이였어.
수영이 한 번 보고, 내 꼴 한 번 보고, 난 황급히 옷섶을 여미면서 시선을 피해서 돌아앉았어. 뭐, 그 때까지의 패턴이면 아마도 알아서 들어가지 않을까 싶었지. 그러면 이렇게 시선도 안 마주치면 될 거고. 한 발자국만 내밀면 될 것 같기도 했지만, 수영이가 싫다고 하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친해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뭐, 물론 남자는 그런 거 모른척하고 온니 대쉬! 대쉬뿐이다! 하며 노발대발할 선수들도 있겠지만, 난 그런 선수될 주제는 못 된다는 거, 내가 더 잘 알거든.
그래서, 이젠 가겠지 하고 있는데, 되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는 거야. 그리고는 등 뒤쪽으로 수영이가 앉는 소리가 들렸어.
“안 자?”
목소리 톤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묘한 것이 맘에 걸렸지만, 난 그냥 대답했어.
“잠이 안와서요......”
“그렇게 늦게까지 훈련하고 피곤할 텐데.”
“견딜 만 해요......”
말 듣고 있는 니가 봐도 좀 답답하지? 나도 그랬다. 그냥 확 말 놓고 편히 지내고 올라타고 그러면 그냥 홀라당 넘어온다고! 라는 선수의 노발대발, 분명히 주제 안 된다고 얘기 했잖아. 그거 말고 내가 답답했던 건,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 자신이었어.
“그날 밤 같다. 이러고 있으니까.”
갑자기 그날밤....이라고 하면 뭥미?
“그날 밤.....이라면.....”
“왜, 내가 너 때려서 기절시켜서 끌고 온 밤.”
아아아. 그 밤.
아아아아아악!!!!!!!
황당했던 그 때가 떠올라 부글부글 지옥유활 끓듯 끓는 속을 잠깐 가라앉히고, 말 나온 김에 한 번 강하게 내쳐 달려보기로 작심했는데.
“그런데, 그 땐 왜......”
“뭐?”
“그 뭐냐......그.....”
“뭐!”
“벌거벗고 있었.....”
수영이 버럭버럭 화를 낼 기세로 돌아보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어.
“변신해서 날고 있었으니까.”
“아.....”
“그게 나한텐 산책이거든. 밤에 아무도 없을 때라야 안심하고 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날 쫒아오던 놈이 갔나 확인도 해야 했고. 그런데 웬걸. 버스 정류장에서 노숙자처럼 신문 덮고 자고 있잖아? 깔깔깔~”
그 때 산길고생을 생각하면 안 그래도 핏대 서는데, 참 표현이 껄적지근 쌈싸먹길래 완전히 관자놀이 혈관회선 오픈되더군. 콧김을 한 번 뿜은 후 난 말했어.
“그런데, 왜 반말이냐?”
“뭐?”
수영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았어.
“너 인제 스무 살이라며. 대학교도 이제 들어갔다며. 근데 이게 어디서 스물 여덟 오빠한테 반말이야.”
헐. 여덟 살 차이면 사실 아저씨인데.
근데 뭐 그게 중요하겠어? 일단은 수영에게 카운터펀치를 먹였다는 게 중요한 거야. 뭐 고소하고 통쾌하고 그랬냐고? 아니 절대 네버. 그 작은 체구에서 뻗어 나오는 용의 힘이 장난이냐고. 한마디 한마디에 목숨과 마이 존슨 앤드 볼스를 와방 걸고 내뱉었지.
그런데 의외로, 수영은 단호한 내 표정과 그 말투를 보면서 당황하고 놀랐는지 말도 못하고,
“우우우....”
이러면서 있더라. 흠, 좀 더 쐐기를 박아볼까.
“이제부터 넌 깍듯이 오빠라고 부르고, 난 반말 쓸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렇겐 못해!”
“이게 근데.....”
“너처럼 비리비리하고 바보 같고 소심하고 이기적인 오빠가 어딨어. 인정 못해! 내가 너 싫어한 이유도 첫인상이 딱 그래서였는데!”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허어엉. 그러니까 똥배는 안나오도록 신경써서 관리한 몸매인데 어째서 이런 말까지. 거기다 소심하고 이기적인거야 뭐 내가 보여준 밑바닥이니 더더욱 할 말도 없고. 오늘은 할 말이 없는 날이 되는 것인가.
하여간 카운터펀치 먹이려다가 되레 어퍼컷을 먹은 난 아무 말도 않고 계속 수영에게서 등을 돌린 채 저 너머 어둠만 보고 있었지. 조금 그렇게 침묵이 흐른 후.
“그런데......”
하면서 수영이가 말문을 열더군.
“오늘은 조금.......멋졌어.”
홍얄홍얄홍얄......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어깨를 붙잡고 흔들면서 묻고 싶었어. 도대체 얘가 나한테 뭐라고 말한 거여요? 멋지다고 말한 거 맞죠? 네? 네?
앉은 자리에서 녹아내려버릴 뻔한 걸 가까스로 참고, 최대한 쿨한 척을 유지하며 물어봤어.
“뭐가 어쨌길래?”
“그........정욱 아저씨가......얘기해줬어......”
이런 우락부락하면서도 알흠다운 큐피트 같으니라고. 오늘 이야기한 것들이 다시 떠올라서 나는 못내 고개를 숙였어. 결심의 무게감이 그걸 알아준 그녀의 태도와 겹쳐서 한층 새삼스럽게 다가왔지.
“방금 말은 사과하지만, 정말 오빠라곤 안 부를 거야. 흥.”
호오.....이것이 바로 그 이웃 섬나라의 세간에서 말하는 ‘츤데레’라는 것이옵니까. 이거건 저거건 간에 이미 수영이가 어떤 마음인지를 알아챈 내 심장이, 처음 봤던 그 때처럼 뛰기 시작했어.
그리고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지.
몸을 일으켜서 수영이 옆으로 가서는 턱 앉았어.
그리고는 손을 잡았지.
여전히 수영이는 고개를 돌린 채였지만, 내가 쥔 손을 거부하지는 않았어.
(벌써부터 자! 키스! 키스! 이러는 자식 보인다.......월드컵 응원 같네.......)
내친김에 키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어깨까지는 꽉 잡았는데, 아놔 무슨 놈의 용이 애완강아지처럼 품에 착 앵겨오네. 덜덜덜.....
잠깐 그렇게 있으면서, 감격의 도가니탕을 끓였지. 환희? 황홀? 뭐 그런 단어로도 표현이 다 안 되는 기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 거구나 싶더라니까.
옆의 존재가 내는 여전히 달콤한 냄새, 따스한 온기, 부드러운 손, 살이 맞닿는 감촉,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통하고 있다는 느낌. 그 모든 것이 토네이도가 되어서 교감신경 부교감신경 말초신경 중추신경 두루두루 자극해주는데, 히야아아아아~
(말했잖은가 나 동정마법사였다고.....)
그래서 진짜로 내친 김에 키쓰하려고 수영이의 눈을 지긋이 바라봤어. 용의 심장이 뛰는 느낌이 쿵쾅쿵쾅 와닿기 시작하고, 그것에 맞춰 내 심장도 같이 뛰기 시작하고. 그렇게 서로 박동의 리듬이 맞닿을 때쯤, 서서히 입술을 가져가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난 퍽 소리와 함께 아구창을 제대로 쳐맞고 화단에 굴러 박혔어.
수영이는 화급하게 탁탁탁(?) 발소리를 내면서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돌아간 아구창을 매만져 제대로 붙이면서, 이건 또 무슨 예수부처마호멧의 장난이실까 하는 망연자실함과 의아함에 젖어서 어디서부터 잘못한 건지 생각해봤는데,
잘못한 건 내가 아니더라고.
정욱씨가 아주 능글맞으면서도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나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잽싸게 안채로 들어가더군......
이쒸......큐피트라고 한 거 취소.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