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을 하는 중에도 어머님의 말이 귓가에 은은한 종소리처럼 울려왔어. 한 번 하면 되는거야아아아 지후구우우운 응응응? 그러다 아버님이 드래곤 브레쓰를 쏘는 광경을 다음 컷으로 떠올리면 황홀해진 기분은 생명의 위협에 대한 긴장으로 훅 쫄아 들었지.
에이, 그래도 아버님이 먼저 수영이를 들여보냈잖아. 어떤 풍경이 될 지 뻔히 알면서. 그럼 용서해주실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닐까? 이렇게도 생각해 봤었지. 하지만 아버님이 그걸 단순한 치료의 의미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면 나의 이런 생각은 완벽한 오산이 되어 갈고리형을 당하든가 드래곤 브레쓰를 쳐맞든가 양쪽 중의 하나겠지.
(그리고 나중에 물어보니 내 추측은 틀리지 않았더구만......휴....목숨 건진 거지.....)
힘을 얻기 위해서라지만, 이제 수영이랑 이런저런 일로 겨우 사이가 좋아진 상황에 초를 치는 것은 아닐까? 아니, 만약 내가 끌어간다면 그녀가 따라와 줄까? 따라와 준다는 것은 으흣, 으흐흐흣. 에잇, 되도 않는 꿈은 꾸지 마라. 아직 우린 결혼도 안했고 법도도 지켜야 하고, 하여간 그런 거야.
이런 식으로 천사와 악마가 치고받고 싸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연습도 그만두고는 들어가서 더러워진 옷을 벗었어. 벗고서 가만 생각해 보니 그 전투복장은 그 때부터 줄곧 입던 것이라서 여기저기 찢어지거나 헤어진 곳들이 많았지.
하지만 이 옷을 버리지는 않기로 했어. 처음으로 이 옷을 입고 목숨을 걸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쉽사리 버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어쨌든 그런 옷이라도 세탁은 해야 하니까, 편하게 두루마기 같은 놈을 하나 걸치고 옷가지 주섬주섬 손에 들고서 욕탕 쪽으로 고고씽.
그렇게 가서 문을 호기 있게 열어 제친 나머지.
수영이가 목욕을 끝내고 나처럼 입은 채로 긴 머리에서 물기를 없애고 있는 모습이 눈에 쏙 들어오네.
더운물로 홍조를 곱게 띄운 뺨과 긴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 아직 물기를 덜 닦은 몸이 두루마기의 천을 적시면서 뭔가 아주 달라붙은 것도 아니고 아주 달라붙지 않은 것도 아닌 적당한 모양새를 한 모습. 그리고 좋은 향기.
그 0.05초 찰나의 순간. 또다시 어머님이 악마의 모습을 한 2등신 꼬마가 되어 머리 위에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거야.
‘힘을 얻기 위한거잖아요오오오 한 번 해요오오오’
천사의 모습을 한 나는 사력을 다해 맞서고 있었고.
‘안 돼 지후야! 아버님의 드래곤 브레쓰를 떠올려 봐!’
나의 음욕에 사로잡힌 두뇌는 일순간, 천사를 써머솔트킥으로 날려버렸어. 그래, 이건 힘을 얻기 위한 거야. 단지 그것 뿐이라고, 그럼 수영이를 잘 지켜줄 수도 있잖아? 안그래? 으흐흐흐......
내 손에서 전투복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어. 수영이가 내 눈빛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기 시작했고.
“수영아. 저기, 잠깐.....”
“뭐....뭐야! 야! 저리 가! 안 가?”
“아니, 그게 아니라......가만 있어봐......이건 단지, 힘을 얻으려고.....”
눈알이 풀린 채로 다가서면서 손을 뻗었고, 수영이가 웅크린 몸 때문에 젖은 두루마기가 한층 수영이의 몸을 휘감기 시작하면서 굴곡을 드러냈어. 나의 숨결은 팝핀하는 호르몬과 헤드스핀하는 욕망의 배틀로 거칠어졌고, 내 두루마기도 앞섶이 풀려 흉측한 존슨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등.
좌우지간 총체적으로 수영이를 껴안고 부드럽게 ‘한 번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다가가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에 닿은 그 때.
젠장.
기억했어야 했는데. 이모님 집에서의 교훈을......
꺄악 하는 소리로 주변의 공기가 압축되기 시작하면서 고막이 갑자기 압력을 받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난 수영이가 내지르는 드래곤 브레쓰를 정통으로 쳐맞았어.
허허허허. 그게, 그 땐 진짜 어린 용이었기에 망정이지. 지금 제대로 아버님으로부터 드래곤 브레쓰의 기술을 계승받은 수영이였다면 난 진짜 저 우주의 외로운 인공위성 꼴처럼 뭐 하나 남김없이 새하얗게 불태워졌을 거야.
입고 있던 두루마기가 완전히 작살나서 벌거벗고 반쯤 구운 바베큐 꼴이 되어 엉덩이를 하늘로 쳐든 포즈로 엎어진 채 헤롱대는 나. 수영이는 벌써 자기 방으로 도망.
그 꼴을 보고 놀라서 뛰어온 어르신들. 이모님은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쩔 수 없는 놈이라는 표정, 어머님은 킥킥대면서 재미있다는 표정. 아버님은 앞뒤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이해하면 난 그 때 이미 두 번 죽는 거임- 민망한 모습을 멍하니 살펴보는 아버님.
하아......개망신도 유분수.......
다음날.
수영이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새벽에, 어르신들은 일찌감치 전투복장으로 갈아입으셨어. 어머님이나 아버님은 용으로 변해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헐렁하고 큰 망토 형태의 겉옷을 입으셨지만, 이모님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피부를 청룡의 검푸른 비늘로 덮은 형태로 계셨지.
이모님은 나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당부하셨어.
“알아서 하리라 믿네. 응?”
아마도 어제의 그 망신스런 모습을 떠올리시니 도저히 믿음이 안가서 그러시리라 생각하면서, 안 그래도 피부가 선탠을 한 것 같은 꼴이지만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어.
“에휴, 바보.”
어머님이 미소를 띄우면서 날 놀렸어.
이게 다 어머님 때문이라구요.
“그럼, 뒷일을 부탁하네.”
아버님도 세게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어.
나는 세 분이 용으로 변해 공중을 가르는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지었어. 이제부터가 문제였지.
어떻게든, 일단은 수영이의 기분부터 푸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어. 수영이가 차려주는 밥술이라도 얻어먹으려면. 그렇게 생각하고는 수영이 방 앞까지 갔는데, 거기서 우왕좌왕 망설이고 있었던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나, 하고.
에, 또,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지. 내가 눈이 뒤집혀서 그만 짐승이 되어버렸다고.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 될 거야. 그래. 이것밖엔 없어.
이렇게 마음먹고 수영이 방문을 두드리려고 하는데, 그 때 수영이 방의 미닫이문이 벌컥 열리면서 수영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
그 수영이의 모습에 난 그만 이제까지 세운 계획들을 홀라당 까먹을 정도로 놀라버리고 말았다지?
수영이 또한 부모님이 입으셨던 전투복장을 입고 있었거든.
“너, 지금 뭐하려는 거야?”
따져 묻는 나에게 수영이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어.
“몰라서 물어? 가야 할 거 아냐?”
“가긴 어딜 가.”
“그 섬에.”
“네가 거길 왜 가.”
“여차하면 힘이 되어드려야지.”
하아......이게 모르는 처억 하면서 다 알고 있었던 거임. 난감해진 난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막아섰어.
“수영아, 내 말 들어봐......”
“이모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난 안 들을 거야.”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우리 얘기 좀 하자.”
“어젯밤 욕망에 눈이 벌개져서 날 덮치려던 사람이 더 어린애 같은데? 아니지. 그냥 짐승이지. 훗.”
이마에 잠시 핏대가 솟았지만, 내가 달리 할 말은 없으니만치,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보려고 했어.
“그러니까, 어제 일은 잠깐 놔두고....”
내가 부드럽게 잡은 팔을 수영이는 세차게 밀쳐냈어.
“이거 놔!”
그녀의 거친 반항에 나 또한 맘이 팍 상해버렸어.
“아빠 엄마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너랑 엮여져서 용족을 이을 생각이나 하란 거야? 너처럼 강제로 여자 하나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변태 더하기 바보랑 같이 살아남으라고? 내가 미쳤지. 이런 놈을 조금이라도 좋아했었다니. 웃기지 마! 아빠 엄마가 없으면 나도 살 의미가 없다구! 나도 갈 거야! 너랑 같이 사느니 가서 거기서 죽고 말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 그냥, 싸대기를 날렸어.
아마도 물리적인 타격이야 심하진 않았겠지만, 내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 때문에 수영이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더라고.
“너.....너!”
수영이가 충격을 받건 말건 난 계속 쏘아붙였어.
“넌 내가 왜 그랬는지 알기는 하냐?”
“뭐?”
“알기는 하냐고!!!!!!!”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니까 수영이도 움찔했어.
“이 저주받은 체력으론 너 하나 지키는 것도 개지랄을 떨어야 해서, 그래서 네가 치료해주는 것처럼 한다면 힘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너랑 그 짓을 하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널 지키려고, 널 지킬 힘을 얻으려고 변태가 되고 욕망에 휩쓸렸다. 왜? 그런데 그런 내 앞에서 부모님이랑 같이 죽겠다는 말이나 해? 이 머저리야!!!!!!!“
“그래서 날 강제로 덮치려 했단 거야?”
“그래! 안 되냐?”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린 채 난 계속 내뱉었어.
“널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치겠다고 말했다. 진심으로, 이모님에게 그렇게 맹세했어. 널 지킬 힘만 얻을 수 있다면 악마한테 혼이라도 팔아버리고 싶은 지경이야. 넌 그런 내 맘 알기는 했냐? 알면서 이래?”
“됐어. 갈 거야.”
“못 가!”
사람이 빡이 도니까 정말 정신이 없더라고. 날 뿌리치고 가려는 수영이의 힘을 강제로 버텨내면서 난 수영이를 뒤에서 껴안고는 손으로 깍지를 껴버렸어.
“난 죽어도 이 손 안 풀 거야! 가려거든 나 죽이고 가라. 그래, 어저께 네 힘이면 쉬울 거야! 나도 너 못 지킬 바에야, 그냥 여기서 죽는 편이 낫고! 그래, 그냥 죽여라!”
내가 말하긴 했어도 지금 생각해보면 이 대사.....왠지 텔레비전의 삼류 드라마에서 자주 본 모습 같더구먼. 버림받기 직전의 마누라가 악다구니 하는 모습의 느낌. 쩝.....
뭐가 어찌 됐든 꼭지가 돌아서 그러고 있는 나와, 나를 뿌리치려고 그래도 힘조절 하면서 앙탈을 부리는 수영이와 그렇게 실랑이가 잠깐 벌어지고 난 직후.
수영이가 울기 시작하더라.
“어어어엉~~ 나 갈 거야!!!! 놔!!!!!!!! 놓으란 말야!!!”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삼류 드라마네 이거......
좌우지당간 죽어도 못 놓는다고 꽉 잡고 있는 상황에서 거의 주저앉아서 발버둥을 치다시피 하면서 수영이는 울고 있었고, 그런 수영이를 나는 꽉 잡고 놓지 않고 있었어.
완전히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한 것처럼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고 있는데, 나도 괜시리 눈물이 나더라고. 에잇.
깍지 낀 손가락들이 부러질 뻔한 고통 때문은 아니었어. 늑골이나 명치를 팔꿈치로 얻어맞아서 생긴 고통으로 울려는 것도 아니었고.
그랬다고. 흠흠.
대성통곡을 하고 나니 몸에서 힘이 빠졌는지 수영이가 주저앉아서 훌쩍거리기만 하더라. 난 살며시 깍지를 풀고, 수영이를 돌려 앉혀서 다시 껴안아주었지. 생각해보면, 수영이의 맘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 내 인생만 봐도 그런 맘을 이해 못한다면 인간이 아니고.
나는 자세를 바로 고쳐서 수영이의 얼굴에 범벅질이 된 눈물을 소매로 닦고는 코에다 손을 대서 흥, 하고 코를 풀게 하기도 하는 등, 마치 어린애 다루듯 했어. 뭐 어쩔 수 없잖아. 어린애 짓을 하고 있으니.
나도 같이 눈물지으면서 보다보니, 이 애가 도대체 처음 만났을 때 그 날선 칼같이 벼려져 있고 거만이 하늘을 찌르던 그 애가 맞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푸하하핫!”
하고 울던 채로 너털웃음을 터뜨려버렸어.
“왜 웃어.....변태 아저씨.”
“에이구 에이구. 나보고 어린애라 그러더니, 네가 하는 짓 좀 봐라. 누가 더 어린애냐?”
“칫.”
수영이가 얼굴이 팅팅 부어서 미소를 짓는데, 그 이후론 그런 수영이의 귀엽고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보기가 힘들었어. 뭐 그렇게 울 일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언제 한 번 울려볼까 생각중임.....흐흠)
“그런데....흐흐흡....정말 나 지키려고 그랬던 거야?”
“응?”
“욕실에서.....그......”
“아. 그럼! 당연하지.”
아니, 사실은 욕망에 쩔은 것도 좀 있었.......다니 뭐라니 말해봐야 분위기 망칠 듯 했고.
“그럼, 우리 엄마아빠도 지켜주면 안 돼?”
“이모님이 당부하신 거야.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나, 엄마 아빠 없어지면, 나, 어떻게 살아. 응?”
또 울먹 울먹 울먹. 하지만 아까 전에도 말했지. 그 심정 이해 못할 바가 아니라고.
“그렇게, 부모님을 지켜드리고 싶은 거야?”
수영이가 고개를 끄덕였어.
“거기 가면, 일들이 쉽지 않을지도 몰라. 가장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 전부 다 죽을 수도 있어. 그런데도, 가겠다는 거야?”
또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휩쓸리면 안 돼. 이성을 지켜야 해. 정말 거기서 다 죽으면 누가 가족을 만들고 누가 용족을 이어갈 거냐? 이모님과의 맹세를 기억해. 또 다른 한 편으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어. 너는 네가 겪었던 아픔을 이 애까지 겪게 만들 거냐? 이 애까지 고통스러움을 마치 공기처럼 마시면서 살아가게 내버려둘 거냐고.
“그래. 그럼 거기로 가자.”
나는 말했어.
“정말?”
“그래. 정말이다. 그 대신 잠깐만. 나도 준비를 해야 하니까. 그리고 절대, 내 말만 잘 듣는 거야. 위험하면 모두와 함께 도망쳐야 하고.”
“알았어, 오빠!”
어헐헐?
순간 또 이게 무슨 러브리한 시츄에이션이냐 하며 헤롱대는데 정신줄 미처 챙겨 당길 새도 없이 연속기 들어오시고.
“그리고......나......오빠가 힘을 가지는데 꼭 그렇게 해야 한다면.....”
수영이가 전투복장을 살며시 내려서 어깨선을 드러내면서, 두려움쯤이야 어떻게든 참아준다는 결의의 표정으로 말하는 거야.
“나.....해도 좋아.”
당신의 연속기로 인해 나의 심장은 또다시 쿵쾅 머릿속은 새벽종이 땡땡땡 으쨌거나 오만가지 난리가 내 몸 속에서 일어나면서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 모습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귀여워서 난 그만 허겁지겁 수영이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 포갰어.
부드럽고 몽실한 입술이 내 입술에 닿고, 수영이의 혀와 내 혀가 서로를 강하게 찾기 시작하는 순간.
그 다음이야 뭐......너무 뻔하지......않게도.......
그냥 뒈지는 줄 알았다.......
단순히 키스만 했을 뿐인데도, 아직 어려서 기 조절이 잘 안 되는 수영이의 흥분된 파장이 순식간에 내 입술과 뇌파 속으로 밀려들면서 체력의 강도를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하는 거야.
심장의 근육이 파열될 듯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기 시작하고, 혈관은 그 벽이 갑자기 두꺼워지면서 확장을 계속하고 근육들은 미친 듯이 찢어져 다시 재구성되는 한 편으로 뼈들은 그 강도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는 등. 완전히 오장육부가 새로 탈바꿈하는 과정이 말초신경들을 간질이면서 폭주를 한 거지.
그건 뭐라고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상태였어. 굳이 꼭 표현을 하자면, 한 편으론 천국을 날아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지옥 유황불로 떨어졌다가 아무것도 없는 연옥 속을 헤메는 막막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하악. 하악. 하악.
우리 둘은 그렇게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입술을 뗐어. 수영이의 입술과 나의 입술 사이로 길게 타액이 늘어졌고.
그런 걸 찬찬히 돌아보면서, 나는 완전히 몸 내부가 개조되어 버렸다는 걸 깨닫고 있었어. 근원을 알 수가 없는, 끊임없이 넘치는 힘과, 뭐라도 부숴버릴 것 같은 느낌의 근력. 뭔가 근질근질한 게 한 번 제대로 폭력적인 힘을 써보고 싶은 내 무의식속의 욕망을 자극당하는 듯한 감정.
수영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볼에 홍조를 띄우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어.
거기서 더 나가고도 싶었지만, 수많은 것이 한꺼번에 떠올랐어. 지금쯤 어르신들도 그 섬 해역에 도착했을테고, 뭔가 사단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모든 것의 시간이 없었어.
나는 아직 흥분으로 떨고 있는 수영이의 몸을 껴안아서 진정시키듯 토닥거리면서 볼을 부볐어.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이 다음은, 우리 살아남아서, 꼭 하자.”
(어라, 야야야, 왜 갑자기 화는 내고 그래? 응? 흣흣흣)
구멍이 숭숭 뚫린 전투복과 따로 놔두었던 보조장비들을 다 챙겨 입고, 주머니마다 있는 대로 탄창 탄약을 챙겨 넣고, 주무장과 부무장, 바렛 저격총까지 울러맸는데도 가뿐한 이 느낌. 확실히 체력이 완전히 초인수준이 되어 있었어. 난 아예 그 장비들을 전부 울러맨 채로 바렛 저격총을 한 번 봉술 하듯 돌려봤지. 마치 장난감같이 다루고도 남는 힘이란. 그 10kg 가까운 대물저격총이 손 안에서 권총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너도 봤어야 했는데.
뿌듯해져 오는 한 편으로, 이 모든 것들을 챙겨준 정욱씨를 다시 한 번 묵념하듯 떠올렸어. 정욱씨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린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비장함도 다시 한 번 새기면서.
그런데 그 다음 문제.
바깥으로 나오면서 나는 두 가지 문제에 봉착했어. 첫째는 여기서 거기까지 어떻게 가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수영이가 없다는 것이었어.
기껏 장비 다 챙겨입고 왔더니 혼자서 가버린 건가,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이젠 북한군이랑 싸워가면서 월남해서 거기까지 가야 하는 건가. 사람은 안 무서운데 탱크나 비행기 같은 놈들은 어쩌지. 이런 저런 생각에 실망감과 혼란이 뒤섞여서 멍하니 서있는 와중.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려와 내 앞에 착륙했어.
그건 수영이였어. 하얀 비늘과, 하얗게 된 갈기와, 무엇보다도 진짜 껴안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느낌의, 네 장의 날개를 가진 길이 2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백룡(白龍).
먼지가 가라앉고 있는 뒤를 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직접 내 머리에 울렸어.
“오빠, 타.”
그녀의 녹색 눈이 나를 돌아보며 재촉하고 있었고, 나는 수영이에게 다가가서 황홀한 나머지 몸을 한 번 쓰다듬었어. 그런데 수영이가 무슨 소름이라도 돋치는 듯 비늘을 일으키며 막 몸을 배배 꼬는 거야.
“왜 그래?”
“.......”
“어디 안 좋은 거야?”
“아니.....그게 아니라......”
수영이의 말이 또다시 머릿속에 깊숙이 박혔어.
“부끄러우니까.....이런 모습은 제대로 처음 보여주는 거잖아.....그런데 만지기까지 하니까......”
아아아. 시간이여. 그대가 조금만 더 있어 주었더라면 나와 수영이의 운우지정은 바로 지금 오늘, 성사되었을 것이오나. 참으로 저주스럽소이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서 뺨을 수영이의 몸에 살며시 대고, 솔직하게 말했어.
“사실, 지금 막 널 껴안고 싶어.”
“그래도 돼.”
허걱. 바로 나오는 반응에 수영이의 눈을 보자 수영이는 긴 고개를 돌려서 눈을 피해버리더라고. 나는 포근한 이불이라도 껴안듯이, 수영이의 몸을 품안에 끌어안았어. 용 껴안아봤냐. 못해봤으면 말을 하지 말라고. 비늘들 때문에 상당히 차갑고 끈적하고 그럴 것 같은 느낌은 전혀 없고, 그 비늘들이 오히려 부드럽고 푸근한 느낌인데다 마치 각자 살아있는 것처럼 만지는 대로 반응하고 있었어. 수영이 또한 몸을 가만히 두고 내가 껴안으면서 생기는 그 느낌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지.
어느 정도 그러고 있었을까. 이젠 때를 망각하면 안 될 때가 온 거야.
나는 그녀에게 올라탔어. (응?)
그녀는 한 번 몸을 꿈틀하더니 날 태운 채 하늘로 치솟았어. 난 자연스럽게 수영이의 갈기를 붙잡고 승마자세로 그녀의 등에서 균형을 잡았지.
갑자기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바람에 조금 두려웠지만, 이내 수영이도 내가 균형을 맞추려는 데에 따라 몸을 적응해가면서 민감하게 움직였어. (뭔가 말이 좀 야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치솟았을까. 그녀가 수평을 유지하기 시작하면서, 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어.
우리의 밑으로 깔려있는 구름들, 밑으로 간혹 보이기 시작하는 산들. 모든 것들이 끝없어 보였고 모든 것들이 작게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이야호오오오오오!!!!!!!!”
나는 소리를 질러댔고 그녀 역시 기분이 좋은 듯 한 번 몸을 세차게 움직이면서 더 빠른 속력을 냈어.
청량감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나 시원해서 속이 뻥 뚤리는 것 같은 느낌. 맞받아쳐오는 강한 바람도, 아득해 보이는 저 땅바닥도 전혀 무섭지 않고, 아드레날린이 팍팍 솟아 상쾌하고 충만한 이 느낌.
나는 그녀의 갈기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섬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을 요청했고, 우리는 점점 짙어져가는 서해의 비구름층이 있는 상공으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어.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엄청난 난관들을 생각하지 못한 채.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