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겨울의 기울어져 가는 햇빛을 등지고 서있는 여자를 보면서 나는 말했어.
“방금....뭐라고.....?”
“하등한 생물 같다고 했어.”
아까 전의 뭔가 수줍던 기운이라든가 하는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원래부터 추운 겨울이라 옷을 껴입었는데도 불구하고 피부를 타고 들어와 아예 혈관까지 얼려버릴 듯한 냉기가 온 사방에 휘몰아치기 시작했지. 그러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어. 이건 마치,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린 그런 기분 같았다고나 할까.
“그런 존재를 데리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부주의할 수가 있는지, 아니, 애초부터 왜 그런 존재를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데리고 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뇌기능이 상실되었거나 아예 뇌 자체가 없는 거 아닌가? 그렇게밖엔 생각이 안 될 정도네? 이 멍청이는?”
냉기보다도 머릿속을 더 차갑게 얼려버리는 그 폭언에 난 입만 헤 벌린 채 뭐라고 대꾸할 말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어.
“단지 힘을 주기 때문에 이런 인간의 생기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슬퍼질 정도지만, 이만큼 영기를 강하게 풍기는 인간도 만나기는 어려운 법. 영광스러운 줄 알아. 그 생기는 내가 잘 쓸 테니. 후훗.”
그러면서 갑자기 그 여자의 얼굴이 내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 거. 또 이런 패턴인가. 하지만 내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기운은 이 여자가 더 강했어.
가만, 다음에 내가 만날 존재가 뭐라고 했더라....그게...
“너.....넌, 처녀귀신?”
얼굴 쪽으로 다가오던 얼굴이 흠칫 하고 멈춰섰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뭐......어떻게라고 말한다면.....이야기가 좀 길긴 하지만.....”
“그럼 됐어. 듣고 싶지도 않고.”
다시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어. 눈동자는 이미 푸른색의 귀광(鬼光)으로 파르르한 불꽃이 일고 있었고, 얼음덩어리가 내뿜는 냉기는 코웃음을 칠 정도의 시린 공기마저도.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아버린 그 순간.
“야! 야! 야! 거기 귀신! 멈춰!”
마치 사자후처럼 미호가 단박에 소릴 질러버리면서 그 여자애가 내게 걸었던 속박 같은 게 단숨에 부서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나는 벤치 옆으로 자빠지다시피 주저앉았어. 이 존재들이랑 만나고 난 후에 나, 왠지 길바닥이랑 무지 친해지는 느낌이 왠지....그리고 미호가 던진 생수통이 바닥에 같이 뒹굴고 있었어.
“어디서 감히 내 껄 넘봐?”
흠? 이 대사는 뭔가 삼류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 아닌가. 그것도 뭔가 불륜의 현장을 들킨듯한, 하는 생각을 하던 중 난 또 새삼스러운 나의 모습을 정의하고 있었어. 항상 공포에 질리면 뭔가 생각이 안드로메다로 가는 버릇이 있었던 거야. 나란 놈은 그랬던 거구나. 커헐헐헐.
직빵으로 생수통 스트라이크를 얻어맞은 여자애는 잠시 비틀거리면서 일어났어. 그와 동시에 이마에 생수통을 얻어맞은 자리가 살갗이 벗겨져서 피가 흐르고 흐물흐물한 젤리 같은 꼴이 되어 있는 걸 보고 까무라치기 일보직전이었고. 너무 상황이 초현실적이어도 정신이 말짱해지는 것도 있구나 싶었지, 나란 놈은. 커헐헐헐.
“흥, 꽤나 헤매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군.”
“그런 게 나한테 통할 것 같아? 되려 그 기운 때문에 여기까지 더 빨리 왔다구! 그것보다 너, 지금 짓거리로 완전히 저승으로 발 하나 들여놓은 거 알아? 안 그래도 흉측한 존재를 완전히 지워내 줄까?”
“오호호호호호! 난 어차피 한 번 죽었던 존재인데? 너도 모자라는 지능을 숨기기엔 한참 부족하군 그래. 하지만, 아까부터 눈여겨봤지만 네가 가진 힘, 무시할 수는 없겠는걸. 내 주박을 깬 것도 그렇고.”
“잠깐, 잠깐만, 하지만 넌 여기 실체로 존재하고 있잖아. 발도 있고.”
귀신에 대한 짧은 지식을 늘어놓으며 용기를 내어 말을 가로막아본 결과는 더 안 좋았어. 꽤나 위험한 정보를 술술 내어놓기 시작한 거야.
“이 여자아이는 내가 빙의한 거야. 여자아이의 존재는 아직 내 안에 살아있어. 그 바람에 살이 썩어가고 있어서 생기가 필요하긴 하지만, 보통 인간으로는 이젠 2시진도 못 버티니 큰일이던 터. 이 여자아이도 참 불쌍한 아이지....아, 그래, 그렇군. 좋은 생각이 났어.”
그 여자애는 갑자기 핸드백의 안쪽에서 칼을 꺼내기 시작했어. 말이 칼이지, 왜 정육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날이 넓고 짧은 전용 식칼 있잖아. 그게 떡 하니 기어 나오는 거야.
“이 여자애의 머리통이 바닥에 굴러다니면 어떤 느낌일까?”
그러면서 그 여자애는 자기 목에 그 칼을 가져다 댔어. 어찌나 날을 잘 갈아 놨는지 지긋이 대기만 해도 살이 밀리고 얇게 피가 흐르더군. 원래 그렇게 날을 가는 칼은 아닐 텐데도, 칼의 날에서 푸르스름한 쇠의 기운이 뻗쳐 보일 정도로 제대로 갈아놓은 칼날이었지.
“이 여자애의 목이 잘려나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너, 이리로 와!”
미호와 그 여자의 무시무시한 기운들이 맞부딪히는 가운데에서, 나를 가리키며 명령하는 듯한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정신이 퍼뜩 돌아왔어. 이 대결에서 이제 더 이상 내가 피할 수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거야.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더 다른 방법이 없었어. 그저 순순히 가는 수밖에.
그저 순순히 걷는 동안, 내 머리는 내가 생각해봐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돌아갔어. 목숨을 건 또 다른 계획이 떠올랐지.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미호에게 틈을 만들어줄 수는 있을 거라는 계산도. 실패한다면? 일단 난 죽어서 이른 나이에 어머니 품속으로 돌아가겠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의 자신감도 있었어. 점쟁이가 해준 말 말이야.
그게 내 천명이라면, 내가 여기서 죽지 않고 도깨비까지 만난다는 게 되는 거잖아. 그러니 죽기야 하겠나?
굳게 먹은 마음도 냉기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 순간 조금씩 빛을 잃었어. 인생 최대의 도박 같은 느낌이었지.
“그래, 이리 와. 천천히. 좋았어. 후후후훗.....”
입이 귀까지 찢어질 정도의 괴기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그녀는 내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두 번 정도 손짓을 하고, 그렇게 계속 손짓을 하다가 안으로 팔을 당겨가는 그 순간,
나는 몸을 날려 그 여자애의 칼 쥔 손을 잡고 휘둘러 목으로부터 떼어놓았어.
같이 넘어지는 그 찰나의 시간동안, 나는 손바닥을 칼날에 힘줘서 휘둘렀고, 살은 적당히 베여서 (헐....아프더라고.....하지만 어떤 짓이라도 계속하면 둔감해진다고, 이후로도 계속 손바닥 그어대니 지금은 뭐 별로......훗) 피가 순식간에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어. 그 왼손을 그 여자애의 입에 틀어박아 주었지.
“읍!”
그 여자애의 입에서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지만 이내 혀가 마치 뱀처럼 손바닥을 이리저리 휩쓸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건 어렵지 않았어. 그와 함께 냉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느꼈지. 뒤늦게 미호도 합세해서 여자아이를 완전히 짓눌러 놓았어. 역시 생기가 들어가고 있는 동안에는 무방비상태일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예측했던 게 다행히 맞아들어 간거지. 그 뒤에야 난 겨우 여자애의 입으로부터 손을 떼놓을 수 있었고.
내 피를 마신 탓인지 상처입은 것들이 완전히 다 나아졌지만, 짐승모드로 변해서 귀와 꼬리까지 감추고 있지 않은 미호에게 머리와 온 몸을 짓눌리고 있는 여자애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
에로틱한데
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휘젓고는 피를 흘린 손을 남방을 벗어 둘둘 싸서는 지혈까지 마쳐놓은 후에야, 나는 미호에게 말했어.
“이제 됐어. 미호. 놔줘.”
“뭐?”
미호는 송곳니와 고양이 눈 마냥 변한 눈동자를 한껏 드러내면서 분노를 삭일 줄 몰랐어.
“성수에게 이런 짓을 했는데도 놔주라고? 영혼까지 와작와작 씹어 먹어 버릴 거야!”
“괜찮아. 어차피 인연.....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뭔가 연결되어 있는 존재 같기도 하니까. 괜찮을 거야. 놔 줘.”
완전히 해가 뉘엿뉘엿 져 가고 있는 어둑한 사위를 한 번 둘러본 후, 미호가 여전히 그르릉 거리면서 내 옆에 찰싹 붙어서 계속 여자애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 나는 안 다친 오른손을 내밀었어.
“이제, 괜찮아. 좀 나아졌지? 원래 내 피가 그렇대.”
“......”
“괜찮아. 너도 어차피 내 생기가 필요했던 거잖아. 미호도 그래서 온거고. 뭐 이래저래 이해한다는 건 지금도 잘 안되지만....”
“나도 대책 없이 멍청한 존재였군. 구미호에게 대들려고 했었다니.”
여자애는 입가의 피를 쓱 닦고는 내가 주는 손에 팔을 맡겨 순순히 일어난 후 여전히 미호에게는 적대적인 표정으로 말했어.
“섣불리 덤비진 않겠다. 그러니 그만 그르렁거리지?”
“널 어떻게 믿어?”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미호 너머로 여자애는 손가락질을 했어. 우리가 등 뒤 너머를 돌아보자, 척 봐도 한 50여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좀비처럼 흔들거리면서 서 있었지. 하지만 일정거리 이상은 다가오지 않았어.
“내가 영기를 훔치고서 조종하는 사람들이야. 인형이나 마찬가지지. 내가 맘만 먹었다면 저들과 합세해서 어떻게든 공격하려 했을 거야. 하지만 네 아홉 꼬리를 보곤 맘이 바뀌었어. 그리고, 너는 성수.....라고 했나?”
“응? 으응.....”
“저, 피는 좀.....메스꺼우니까......다음에 생기를 줄 땐......입으로......”
그러면서 아까 전과는 달리 또 얼굴을 붉히는데 이거야 원. 어느 장단에 놀아달라는 말인지. 하여간 이것도 나름대로 스위트하긴 하더군. 나는 어쩔 수 없는 수컷이로구나, 하는 걸 느낄 새도 없이 쏘아보는 미호의 눈초리.
“얼굴, 빨개졌네?”
“엉? 아니, 내가 무슨. 훗.”
아닌 척하면서 나는 일단 여기를 떠야겠다고 생각했어. 그 50여 명의 인간 인형들이 다시 정신을 찾아가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무슨 일이 났나 하고 구경하려는 사람들까지 더 몰려드는 상황도 좀 있었고. 여자애는 아까보다 훨씬 공손한 투로 말했어.
“난, 김진윤이라고 해. 호는 운초. 지금 이 몸으로의 신분은 강지은이라고 하지만.”
호? 왠 호? 이렇게 어리둥절하고 있을 새도 없이, 미호는 내 팔짱을 끼고 볼이 퉁퉁 부은 채로 앞서 나갔고, 나도 방금 들은 이야기가 헷갈려서 그저 손짓으로 강지은, 이라는 몸에 빙의된 김진윤을 부를 수밖에 없었어.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