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혈 (4) - 놀이공원

NEOKIDS 작성일 11.05.23 20: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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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데려갈 데가 없겠다 하고 심드렁해지는 순간, 난 서울 시내에 있는 놀이공원이 생각났어. 일단 짧은 시간 안에 웬만한 것들을 가르쳐 주기엔 거기가 적당할 것도 같더라. 그래서 집에서 지갑 좀 챙긴 후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곳으로 향했지. 생활비 계산하면 돈이 좀 빠듯하긴 했지만, 뭐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그렇게 둘이 걸어가는 내내, 좀 재밌는 일들도 있긴 했어. 어떤 남자든 간에 일단 우리 쪽을 돌아보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미호 쪽이었지.

 

밤에 같이 자면서 내 생기를 빨아먹어서 그런지 머릿결에선 항상 윤기가 흘렀고, 예쁜 거야 누가 봐도 그랬으니까. 여자와 같이 가던 남자들은 어김없이 멍하니 미호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가 같이 있던 여자에게 승룡권 내지는 그에 버금가는 불꽃싸다구 작렬이나 갈굼을 당하기 일쑤였고, 그런 모습을 미호는 킥킥대면서 훔쳐보고 있었어.

 

그러는 거 아니야, 하면서도 나도 조금은 우쭐해지는 걸 느끼긴 마찬가지였어. 이래서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사귀고 싶어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뭐 구미호는 구미호니까. 이건 여자가 아니잖아. 그게 좀 슬프긴 하지만 별수 있나.

뭐 그런저런 일들을 거쳐서, 우린 놀이공원에 입장했어.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놀이기구의 소음이 뒤섞인 큰 공간에 들어오는 순간 나도 조금 흥분되기 시작했어. 미호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패닉의 도가니탕.

 

사실 나도 놀이공원이란 데는 처음이었어. 어렸을 땐 집이 가난했었고, 그 뒤로도 친구들과 갈 일도 없는 등 여러모로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냥, 애인이 생겼을 때 가보면 좋겠다, 뭐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던 장소일 뿐이었어. 역시 직접 겪어보는 것도 좋은 거야.

내가 이 지경인데 이런 광경을 말로도 잘 못 들었던 미호야 어떻겠어.

 

“와! 아빠도 이런 데는 말 안 해줬는데! 이게 다 뭐야!”

 

그러면서 온 사방으로 달려가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신기해하기 시작했어. 나는 아이스크림도 두 개 사서 미호에게 하나를 주었어. 그것도 신기해했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뭐 나도 신이 나니 그닥 신경 쓰이지가 않았달까.

미호는 돈에 대해서도 배워가는 눈치였어. 뭘 하든 간에 내가 지갑에서 꺼내는 돈에 대해서 유심히 바라보고, 숫자개념도 눈치 채는 듯 했어.

 

“돈이라는 건 어떻게 얻는 거야?”

“내가 아침에 출근이란 걸 해야 한다고 했잖아. 일터에 나가 일을 해서 얻어야 해. 사업을 하는 사람은 얼마를 주겠으니 와서 일해 달라는 거고, 나 같은 사람은 그 일을 해주고 돈을 받는 거야.”

“흐으음~”

 

미호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말했어.

 

“그럼 승천혈 넌 돈이 많은 사람이야?”

 

커허억.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너랑 여기 와서 노는 돈만으로도 내가 몇 끼를 굶어야 할 지 계산이 안서는 상황이란 거 당연히 모를 테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라 그냥,

 

“많지는 않지만, 여기서 쓸 정도는 있어.”

 

라고 답해줬지. 그리고 신경 쓰이는 것도 하나 덧붙여서.

 

“저, 그리고 내 이름은 승천혈이 아냐. 나도 이름이 있다고.”

“그래? 이름이 뭔데?”

“이성수라고 해.”

“이성수?”

 

미호는 이름을 알아서 기쁘다는 듯 앞으로 막 달려가서 한바퀴 몸을 휙 돌리며 말했어.

 

“이성수! 이성수! 마음에 들어! 꺄하핫!!”

 

이거야 원.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말 취소. 평일날이라 사람이 많이 없긴 하지만 그 적은 사람들의 주의마저 다 끌어당기는 녀석이라니. 숫제 어린애 같잖아. 거기다 그 녀석이 앞으로 갈 적마다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화아아아악 쏠리는 게 너무 심한 것도 위험했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느끼면서 시선은 땅에 고정하고 잽싸게 미호 옆으로 가서 미호의 손을 잡아끌었어. 여우의 손이란 건 원래 이렇게 부드러운 건가?

 

그 순간이었어.

뒷목으로 뭔가 싸늘하고 가시처럼 날카로운 느낌이 다가온 건.

 

난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어. 거기엔 푸른 색 원피스의 조금 마른 체형의 여자가 하나 서 있었어. 머리카락이 허리를 넘어가서 미호보다도 엄청 길어 보이는. 그 여자도 뭔가 깜짝 놀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고.

 

“아, 저기요.......”

“네? 왜 그러세요?”

 

뭔가 말을 걸어보려고 하다가 난 뒷머리만 벅벅 긁어댔어. 내 느낌이 그렇다고 해서 뒤에 서있던 여자한테 ‘그냥 제가 댁한테 싸늘한 느낌을 느꼈거든요’이럴 수는 없잖아. 여자는 말을 건 나를 멀뚱하게 쳐다만 보고 있었지.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하하.....”

 

머쓱하게 웃는 나를 잠시 무섭다는 듯 바라보고 그 여자는 나를 피해 급히 앞서 걸어갔어. 이게 무슨 어이없는 상황인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어. 곧이어 미호가 내 팔을 붙잡고 놀이기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난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겨우 균형을 맞추며 따라가기 시작했으니까.


조금 후, 나는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어. 놀이기구를 쉬지도 않고 거의 연타석으로 타다 보니 뒤집어지고 흔들리고 거꾸러지고 회전하는 장속에서 얼마 들어가지도 않은 음식물들이 분노의 역류를 하려고 준비하는 중이었지. 하지만 미호는 멈추지 않았어. 그 특유의 높은 꺄하하하 소리를 내면서 이번엔 자이로드롭 쪽으로 달려가는 거야.

 

평일이라 해도 역시 이 놀이기구는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한참 줄을 서야 했어.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70미터 위쪽에서부터 내려오는 건 몸이 편한 사람들에겐 또 다른 흥분거리였겠지만, 분노의 역류를 잠재우기 바쁜 나로서는 또 하나의 공포일 뿐이었어. 미호의 눈은 완전히 황홀감에 물들어 반짝거리고 있었고.

 

“아하!! 아하하!! 진짜 재밌겠다! 인간들은 왜 이렇게 재밌는 걸 만드는 거야 정말!!”

 

감탄사들을 거푸 연발하면서 미호는 자이로드롭을 바라보고 있었어. 줄이 길다보니 기다리는 내내 폴짝거리면서 좋아하고 있었고, 또 뭇남자들의 뜨거운 시선이 마구 쏟아지는 것도 계속 심해지고 있었고. 겨우 울렁거리는 속을 잠재운 나는 아무래도 이건 포기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 속도 속이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점점 희한해지는 게, 오래 있다간 아무래도 뭔가 큰일이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지.

 

“저기, 잠깐만. 이건 타지 말자.”

“왜? 싫어!”

 

제발, 말 좀 듣자.....

 

“여기 더 있다간 위험해질 것 같아. 다른 남자들 분위기가 별로 안좋아 보여.”

“싫어! 탈거야!”

 

숫제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미호는 도리질을 쳤어. 이거야 원. 난감하구만. 하면서 한 번 더 말려보려는 찰나.

 

“줄은 또 왜 이렇게 긴거야? 에잇!”


그러더니 갑자기 땅을 박차서는 허공으로 뜨더라구. 올라가고 있는 자이로 드롭 위로.


곁에서 돌풍이 이는 찰나, 잠시 얼굴을 가린 새에 그렇게 되어 있는 꼴을 보고 히이이이익! 소리를 낼 틈도 없이 자이로 드롭은 하염없이 올라가고 있었고, 사람들도 뒤늦게 그 광경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어. 어어어어~하고 사람들이 미호를 주목하고 있었고, 미호는 마치 고양이처럼......은 좀 그렇네. 여우니까. 마치 여우처럼 빙글빙글 올라가는 자이로 드롭의 좌석 위쪽 골조에 턱하니 손으로 아래쪽을 턱 붙잡고 앉아서 여전히 눈을 반짝거리고 있더군. 이윽고 그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라갔을 때.


자이로 드롭이 떨어져 내렸어.


아무리 지가 구미호라고 해도 이건 글렀다 싶었어. 빠른 속도로 내려오면서 분명히 중심을 잃거나, 골조를 꼭 붙잡고 있는대도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리면 가속도를 못이겨 쳐박혀 버릴 거고. 그럼 고공낙하로 땅에 쳐박혀 말 그대로 사망한 여우가 되든가 온몸이 가속도를 못이겨 으스러지든가 하겠지. 나는 더 볼 수가 없어서 눈을 가려버렸어.


후웅 하고 떨어지는 소리, 곧이어 브레이크가 걸리는 낮은 유압의 음,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들려왔어. 그 비명은 타고 있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가 질러댔던 거야.

 

모든 게 끝났다. 끝났어. 이젠 조용히 모른척하고 집에나 가야 하는 걸까. 그래도 생애 처음 온 놀이공원인데, 그게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으로 망가져야 하다니. 아니, 그게 지금 문제가 아니잖아. 그래도 명색이 같이 잔 사이인데 시체는 수습해줘야 하는 거 아냐. 잠깐, 시체가 꼬리 아홉 달린 채로 죽어있으면, 뭔가 수습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거 아님?


전기선이 뒤죽박죽 된 것 마냥 얽히고 섥히는 생각들을 헤치고 현실로 돌아오니, 주변이 너무 조용해진 것 같았어. 그래서 살며시 가린 손을 풀어보는 순간,

 

미호의 얼굴이 갑자기 다가오는 거야.

 

“까하하하!!!!! 재밌었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점프에서 또 바로 내게 안겨드는 녀석의 기세를 이기지 못해서 난 같이 자빠져 버렸어. 나도 머리가 아프고 했지만 혹시 이 녀석이 다치지 않았을까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매만졌지.

 

그러느라고 주변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거야. 이 때만 눈치 챘어도 아마 일이 크게 벌어지지 않았을까 지금도 좀 후회되지만.

어찌됐건 다친 데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미호의 머리통에 꿀밤을 한 대 쥐어박았어.

 

“아야! 왜 때리는 거야!”

“너 이 자식.....누가 그런 짓 하랬어!”

“기다리기 지루해서 그랬어. 나쁜 짓이야?”

 

되려 자기가 왜 맞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려고 하는 얼굴에 대고 더 뭘 말하려다, 그래, 니가 사람이면 그런 짓도 안하겠지 하는 생각에 아예 체념을 해버렸지. 그래도 한 마디는 더 해줘야 겠더라고.

 

“그런 짓 하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걱정했잖아!”

“걱정?”

“그래. 걱정.”

 

어라? 눈빛이 이상하네?

 

“나를....걱정해 준거야?”

“그.....그럼 안하게 생겼냐?”

 

갑자기 이놈이 또 입을 맞추네. 두 번째 키스마저 우부부부붑. 아놔 이녀석 진짜. 하지만 뭔가 생기를 빨아들인다던가 하는 느낌이 아닌 그냥 몰캉몰캉 부드러운 키스일 뿐이었어.

 

“고마워.....걱정해줘서....”

 

그렇게 길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뭐 그대로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지만 큰일은 여기서부터 나기 시작했지. 나를 노려보고 있는 남자들의 시선을 느낀 그 순간부터.

 

그러지 않아도 미호에게 홀려있듯 하는 분위기 때문에 안좋았던 주변 사람들의 감정이 베수비오수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한거야. 나와 미호가 키스하는 것을 보자마자 남자들의 질투심이 폭발해 이성을 잃었고, 그 옆의 여자들은 남자친구의 시선을 거둬간 미호에게 분노가 폭발해 이성을 잃기 시작했던게고.

 

순식간에 주변은 완전히 전쟁터가 되어 있었지.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남자친구를 붙잡으면서 설전을 벌이려고 하고 있는 한편으로,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나에게 한 방 먹이려고 대동단결한 것 같았어. 그 때 사람들의 눈빛, 정말 무섭더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어.

 

거기에 호루라기를 불면서 내부에 파견된 경찰과 안전요원 등등등이 합세해서 우리를 붙잡으려고 쫒아오기까지.

 

온 사방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리는 건 순식간. 그 사람들은 우리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이미 흥분한 군중들 사이에 갇혀버린 꼴이 되었고, 군중들은 군중들 나름대로 우리를 잡으려고 난리를 쳤지만, 이 모두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었어.

 

미호가 내 뒷덜미를 잡고 전력질주를 해버렸거든.


 

잠시 뒤.

놀이공원을 완전히 탈출해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한적한 곳까지 도망쳐온 우리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만.

 

“케헥! 이녀석....좀 살살.....”

“음? 아픈 거야? 그런 거야?”

 

이번엔 이녀석이 ‘걱정’이란 걸 해줄 차례인가 보다 싶었지. 목도 막 만져주고 어쩌고 하는 사이 목도 말라왔는데, 마침 저쪽 어딘가 쯤에 편의점이 하나 보였어.

 

“저기 가서 물 좀 사다 줄래? 물건 사는 건 아까 전에 봐서 알지?”

“응? 응! 나 해볼래!”

 

완전 유치원생 같은 느낌으로 대답하고는 달려가는 미호를 보면서, 앞으로 고생길은 훤하겠구나 싶더군. 이걸 또 누구한테 이야길 해야 하나 하고 심란하기도 하고. 세상 그 누구도 구미호를 데리고 산다는 경험은 해보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뭐 이러쿵저러쿵해도 얘기를 해 줄 누군가도 없잖아, 이런 생각도 들었고.


그렇게 목을 쓰다듬고 있던 순간에,

다시 싸늘하고 섬뜩한 느낌이 또!

이번에야말로 도대체 뭘까 하며 뒤를 돌아봤는데,


아까 전과 같이 또 그 푸른색 원피스의 여자애가 서 있는 거야. 이번엔 아주 자세히 볼 수 있었지. 많이 봐줘야 중학교 3학년이나 고1 정도의 느낌. 정갈하게 생겼고 앞머리는 일자로 잘랐는데 그 밑으로 눈빛이 뭔가 냉랭하거나 우울해 보이기도 하는 느낌.

 

뭐 어찌 됐건, 뭐라고 해보려다가 또 할 말이 없어져서 머리를 긁어볼까 하고 손을 올리고 있던 찰나.


“하등한 생물 같아.”


그 여자애의 입에서 싸늘한 냉기와 함께 그 말이 내쏘아져 나왔어.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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