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서의 사투로부터 3개월 여 후. 나는 수영이네 집의 방 안에서 거울을 보고 있었어. 결혼예복용 턱시도가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지. 목에 달린 나비넥타이도 그랬고. 매무새야 그럴싸했지만, 그런 옷을 입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랄까. (많은 게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만.....) 사실, 그 때의 일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아. 핵융합로가 터져오는 빛이 비춰오고, 어르신들의 역장이 몇 초 버티다 못해 깨어진 그 순간부터. 난 솔직히 그 때 죽는 줄만 알았거든. 나중에 어르신들이 해주신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나와 수영이는 껴안은 채로 폭발을 맞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르신들의 힘보다 더 강력한 역장이 폭발하는 공간을 묶어버리고는 엄청난 힘으로 압축하기 시작했대. 그 역장의 힘은 나와 수영이에게서 나오던 것이었지만, 우리가 정신을 차린 채로 그 힘을 쓰고 있던 건 아니었던 것 같고. 그 압축된 공간은 점차로 찌그러들면서 마침내 손에 들어올 만한 조그만 빛덩어리 모습이 되더니 끝내는 완전히 소멸되어버렸다는 거야. “그 때 우리가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지. 자네는.” 그 말과 함께 아버님은 너스레를 떠시면서 내 어깨를 툭툭 치셨어. 하지만 그런 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감흥도 없고. 오로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을 감사하고 있었어. 다만, 그 때 그 힘이 가져다주었던 수많은 역사의 기억들은 아직도 간혹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지. 모든 걸 다 말해줄 수는 없지만. 그 일 직후, 해군이 도착했었대. 그것도 무려 그 때 막 취역한 최신예 양륙함 독도함을 위주로 한 편제가. 대통령은 우리에 대해서 엄청 많이 걱정을 했었다더구만. 이후 국정원장의 행동에 대한 추적으로 인해 그가 배신했다는 걸 눈치 챈 대통령이 아예 고속정급의 편제 투입 방침을 바꾸어서 이지스와 독도함까지 편대에 넣은 것이었어. 그러고보니 거기서부턴 좀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려서 주위의 사물이 눈에 들어올 때쯤엔 독도함의 갑판에 있었어. 속속 다른 인질들이 헬기와 LCAC(호버크래프트)등을 통해서 독도함으로 수송되어 오고 있는 와중. 수영이가 곁에 있었고. 주저앉아서 모포를 둘이서 같이 두른 채로. “일어났어?” 수영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나는 수영이의 손을 꼭 잡았어. 비바람도 그 때 쯤에는 거의 개어서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고 있는 풍경이 정말 죽여줬던 기억이 나네.
그리고 3개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그 중의 하나가 뭐냐면 말이지......
“시간에 늦겠습니다. 어르신들이 기다리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부장님.” “부장님이라뇨. 비서입니다. 비서. 정확히는 이모님의 비서죠. 호칭에 주의해주세요.” 머리를 긁적이는 내게 정윤아 부장님이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어.
다른 사람들이 국정원에서 나름의 교육을 받고 이 일에 대해서 절대 발설하지 않기로 함과 동시에 일종의 정신적 피해보상금까지 챙겨서 나왔을 때, 정윤아 부장은 그런 것은 필요 없으니 당사자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댔대. 김지후씨를 비롯한, 그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그랬다더군. 그래서 어차피 처리할 일도 많고 인력은 적고 해서 시험 삼아 용과 관련된 부서에 1주일 투입시켜봤는데, 업무처리 능력이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는 거야. 엔간하면 보내고 싶지 않았다고 대통령마저 엄살을 피우더군. 하여간, 그 1주일 이후, 정윤아 부장은 이모님을 만날 수 있었어. 이모님은 정욱씨가 없는 공백의 상태를 해결해야만 했고, 정윤아 부장은 그런 목표가 있었으니 어느 정도 윈윈이었지. 그보다 더 고약한 사실은, 이모님이 대강 정윤아 부장의 마음을 알면서도 비서로 들여왔다는 거야.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게 너무 밋밋하면 안 되지. 때로는 좀 굴곡도 있고 그런 게 긴장도 되고 좋은 법이지 않은가? 이를 테면 삼각관계 같은 것도 오히려 정신적으로 발전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 은근히 텔레비전 연속극이라도 보려는 듯 흥미진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시는 이모님......하아......수영이 어머님과 자매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내가 바보지..... 아, 대강 설명하느라고 중요한 걸 한 가지 빼먹었네. 프란데르트에 관한 것. 그 난리법석이 끝나고 보니, 녀석은 사라져 있었대. 생각보다 내가 중상을 입힌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또 용의 힘이 주는 회복력이란 것도 있을테니 탈출이 어렵지 않았을 테고. 하여간 그 놈이 용은 아니었다는 사실에는 어르신들도 공감하고 있었어. 진짜 용이라면 머리를 보호하려 한다거나 하는 등의 짓은 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였지. 그렇게, 이모님의 집이 새로 지어지고, 나는 그동안 정욱씨가 가르쳐준 무기 수급처들을 돌아보면서 다시 챙기고, 수영이는 다시 학교에 다니고,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갔어. 숙식은 수영이네 집에서 해결했고. 람보르기니도 수영이만큼은 몰지 못하지만, 어쨌든 폼나게 몰고 다닐 수는 있게 됐어. 어쩌다 윤미선을 보고 길거리에서 손만 들어 인사했는데 윤미선이 기겁을 한 채로 구두를 벗더니 달리기 선수가 스승으로 모실 정도의 스피드를 내는 모습도 넋을 놓고 보았고. 그렇게 평안한 날들이었지만, 이것들이 사상누각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어. 결과적으로 드라켄 야거들을 없애지 않는 한, 나와 나의 가족들에게 진정한 평안이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거,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잖아. 그래서, 진짜 가족이 되기 위해서, 프로포즈도 했고.
“그러니까, 저기.....” “응?” “나와, 결혼해주겠어?” 나는 수영이네 집 마당의 의자에서 반지를 빼들고 두손으로 받쳐들었어. 그 때 손에 들었던 반지, 정말 통장에 있던 남은 돈 탈탈 털어서 턱이 빠지도록 비싼 가격의 놈을 하나 골라서 샀는데, 여자한테 처음 주는 반지를, 그것도 결혼반지로 사려니 어떤 게 좋을지 몰라서 일단 그냥 뭐 아무거나 하나 집었는데. 그걸 본 수영이 왈. 진짜 심드렁하고 하찮다는 듯이...... “쳇. 센스 꽝이네.” 이러는 거야. 또다시 마당 땅바닥에서 내 전매특허 OTL 자세...... 그러고 있으려니 수영이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바닥으로 내려와 앉더라고. “이런 나라도 좋은 거야?” “그러믄입셔.” “쳇, 바보.” 코를 한 번 꼬집더니 수영이는 얼굴을 붉히면서 이야기했어. “바보랑 결혼하려는 나도 바보지 뭐.” 나는 그 말에 입이 그만 귀까지 찢어지고 말았어. ㅎㅎㅎㅎㅎ
썩 멋있지는 않은 프로포즈였음에도, 우리는 그렇게 미래를 약속했지. 그래서 결혼식 날이 온 거고.
식장이 마련되어 있는 마당으로 걸어나가면서, 나는 정윤아 비서에게 물어봤어. “그런데 정말, 그 일을 계속 하실 건가요?” “그렇습니다.” “예전에 그런 일도 있고 해서 제가 좀 불편하긴 한데....” “아, 그 일이라면, 아직도 잊고 있지 않습니다.” “네?” “말 그대로입니다.” “아니, 그럼......” “나, 아직도 지후군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웃는 얼굴로 윙크를 하는 정윤아 부장님. 하필이면 결혼식 날에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적잖이 당황해서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면서 정윤아 부장은 갑자기 박장대소를 했어. “깔깔깔깔! 지후씨의 그런 얼굴을 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지? 수영이도 물론 알고 있겠지?” 네, 네. 제 주위의 여자분들은 하나같이 저 놀려먹는 재미로 날이 새는 줄도 모를 지경이시겠지요. 흑. 정윤아 비서는 한동안 짓던 미소를 거두고, 다시 비서의 본연으로 돌아와 정색했어. “일단은,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준비는 해놓았습니다. 유사시에는 단상 앞에 준비된 걸 쓰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정 비서.” “별말씀을.” 마당에는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이 다 와있었어. 나야 뭐 별다르게 아는 사람이 없었고, 수영이는 대학교를 다니느라 친구들도 많았지만, 다 초대를 할 순 없었어. 아마도, 하객이라고 초대를 받은 대통령을 보는 순간 다들 까무러친 이후에는 학교에 가서 소문을 다 내버릴 테니까. 그래서, 이모님, 대통령, 부모님 내외, 정 비서, 이 정도만의 사람이 모인 단촐한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이었어. 신부화장 등의 필요한 인원들은 전부 정 비서의 물색으로 철저하게 격리된 작업이 이뤄졌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주례는 대통령께서 섰거든. “에, 제가 이런 자리에 서면 안 된다는 법도 존재하지만서도, 다른 민간인 하객도 없고, 여기서 정치이야기 할 일도 없고, 무엇보다도 제가 기대하는 두 젊은이의 축복된 자리니만치, 뭐 남들 모르게 잠깐 위법을 좀 하겠습니다. 껄껄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 조금이라도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당장은 수영이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조금 참아줄 만은 했어. “그럼, 신부를 박수로 맞아주시죠.” 대통령의 손짓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어. 그리고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까무러칠 뻔 했지. 뭐가 무서워서 그랬냐고? 아니. 너무 황홀해서 정신을 잃을 뻔 했거든. 그녀의 웨딩드레스 차림의 모습. 어깨선을 한껏 드러내고 꽃과 수만 가지 레이스들로 장식된 채 허리선부터 한껏 넓은 폭으로 퍼져 나와 길게 끌리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나름 신부화장까지 한 그녀를 보니 천상에서 천사가 열두 장 날개를 단 채로 그대로 내려온 듯한 광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지. 그렇게 대통령님의 짧은 주례가 끝나고, 반지를 끼우면서 사랑의 서약을 하고, 키스를 할 때가 왔는데...... “자.....잠깐! 키스는 좀 있다 하면 안 될.....” 미처 말하려고 했던 것조차 끝맺음을 맺지 못했네? 수영이가 갑자기 와락 파고들어 목을 껴안고 키스를 해 버린 탓에. 앞에서 이야기해 줬을 거다. 얘가 아직 컨트롤이 미숙한 때였다고. 또 근육과 신경과 혈관과 피와 하여간 온몸이 막 그냥 개조되느라 난리의 활화산을 터뜨리면서 고통이 온 몸을 휩쓰는데, 진짜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참았다고!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 키스하다 쓰러진 인간이 되기 싫어서! 하여간 식은 땀이 흐르는 등줄기와 후달달거리는 다리를 달래면서 대강 이 두사람이 하늘 아래 부부의 연으로 맺어졌음을 어쩌구 하는 선포식이 끝나갈 무렵.
초대하지 않은 하객 하나가 나타났네.
또 검정양복. 그 자를 딱 보는 순간, 느낌이 오더군. 이번엔 프란데르트와는 달리 비단결같이 긴 흑발의 남자. “오, 이런, 실례. 즐거운 날이신데, 무례했군요. 그럼, 어차피 무례한 김에.....” 그 남자의 손짓이 이어지면서, 드라켄 야거 놈들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 거야. 그 무지막지한 터미네이터 같은 놈들이 떼거지로. 경호원들을 모두 처치한 건지, 사람의 찢어진 팔다리 하나씩을 어깨에 턱 메고 들어오더군. “계속 무례하게 굴죠.” 나와 수영이를 비롯해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모든 하객들이 하아.........하고 한숨을 쉬었어. 나는 수영이를 바라보면서 말했고. “이제 우리, 맨날 이래야 하는 건가?” “그런 지도.” 곧 수영이의 눈은 지겨움에서 서슬 퍼런 분노로 바뀌면서 진짜 용의 눈을 드러냈어. 나도 당연히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 일생의 한 번 있는 중대한 경사를 흙발로 짓밟고 들어오다니! 난 발로 주례 단상 앞의 공간을 있는 힘껏 찼어. 그와 동시에 지레처럼 앞이 들리면서 정 비서가 준비해두었던 바렛 저격총과 탄창 5개가 공중으로 튀어 올라왔지. 대통령은 벌써 정 비서의 안내로 비상탈출로로 이동하고 있었고, 어르신들이야 뭐, 이미 전투태세. 수영이는 웨딩드레스를 벗고 이미 아....알.몸.... (젠장....정 비서의 수완은 놀랍군. 어떻게 이렇게 단번에 벗겨지는 웨딩을 입혀놓았을까......) 그렇게, 나는 용의 남편이 되었어. 그러니까, 다음에 만날 때도 잘 부탁해.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