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이
이런저런 일로 싸늘한 기운의 겨울이 가고 따뜻한 기운이 충만해지려는 5월 초.
대문을 열어본 나는 위협감과 기묘함과 코믹함이 뒤죽박죽이 된 채로 대문을 두들긴 존재를 바라보고 있었어. 딱 봐야 초롱이만하게 중학생. 그 중에서도 좀 발육이 덜 된 것 같은 크기의 녀석. 부리부리한 눈매와 댕기머리, 소가죽을 연마한 것 같은 옷차림새와 넝마주이 같은 망토. 하지만 등에 맨 도(刀)는 그녀석만큼이나 커다란 크기.
이건 흡사
베 X 세 르 X 의 코스프레 미니 버젼이 아닌가. 댕기머리만 제외하면.
이렇게 생각하자 일단은 웃어야겠다고 방향을 잡았지만, 그래도 실례가 될까 하여 겨우겨우 웃음을 참으며 무슨 일 때문에 왔냐고 물어보자, 그 대답이,
“소생은 한솔이라고 하며, 도깨비잡이 마을에서 왔소이다.”
라고 하잖아. 헐.
순간 나는 초롱이를 떠올리며 웃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어.
“그래서, 여긴 무슨 일로?”
“여기 있다고 알고 왔습니다. 초롱 처자가.”
히에이에이이익! 이거 진짜 긴장 타야 되겠구만! 나는 침을 꿀떡 삼키며 대답했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도깨비? 그런 거 잘 모르겠는데. 그럼 이만.”
이라고 하고 대문을 닫고 뒤돌아서서 몇 걸음 걷자마자 굉음이 들려왔어. 한솔이 그 놈이 등짝의 그 도로 대문을 빗금져서 두동강을 내는 소리였던 거지. 몸이 얼어붙어서 마치 시계 초침처럼 덜컥대며 뒤를 돌아다보니 놈은 시멘트 먼지가 부옇게 일어나는 사이로 나를 노려보며 들어오고 있었어.
“장난치지 마십시오. 초롱 처자가 여기 있다는 걸 다 알고 왔소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숨겨두신다면 안위를 보장하지 못.....”
놈이 말을 끊고 휘둥그래진 눈으로 앞을 보고 있는 사태를 보고서야, 안에 있던 미호, 진윤, 그리고 초롱이가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지. 그리고 초롱이가 곧이어 한솔이를 보고 공포의 나락에 사로잡힌 표정을 짓는 것도 눈에 들어왔고.
너무 짧은 거리. 놈이 도를 휘두를 것처럼 뒤로 한껏 제끼면서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서 몸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던 거야. 놈은 다람쥐처럼 빠르게 내 옆을 지나서 초롱이에게 다가서고 있었어.
아, 죄송합니다. 제가 몇 번을 죽어도 할 말이 없네요, 초롱이 아버님. 하지만 그 험악한 도깨비 방망이로 절 내리쳐 죽이는 일만은 제발. 이런 생각으로 보호하려고 다가서면서도 내 동작은 그 녀석의 동작에 비하면 슈퍼 슬로우 모션 같은 상황이었고, 미호나 진윤도 갑작스런 상황에 전혀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초롱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내게 달려오려고 하고 있는 순간.
그렇게, 모든 것이, 최악이 될 것만 같았던 그 순간.
“사귀자!”
도는 등의 칼집에 벌써 집어넣고 어디서 꺼낸 건지 꽃다발 한 묶음을 초롱이에게 들이밀고 한 쪽 무릎을 꿇은 전형적인 포즈로 놈은 연애신청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초롱이가 이미 자리를 피하고 있던 덕에 꼴은 미호와 진윤에게 꽃을 들이미는 꼴이 되어 있었고, 초롱이는 어느새 내 뒤로 와서 내 등의 옷깃을 붙잡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어.
“우릴 놀라게 하고 대문을 부순 댓가는 치러야 겠지?”
미호가 주먹마디를 우두둑 하고 꺾었고 진윤은 귀기에 어린 눈으로 손을 쳐들고 있는데, 그 다음은 참혹해서 말로 다 못하겠고.
큰 도를 방의 벽에 기대어 놓고 가부좌를 하고 있는데 댕기머리는 다 틀어져서 산발이 되어 있고 얼굴은 멍과 혹으로 엉망진창이 된 한솔이를 보면서 계속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느라 복근이 땡길 지경이었지. 한솔이를 그렇게 만든 미호와 진윤은 나름 대문을 고치느라고 사람 부려대랴 힘쓰랴 많이 바쁜 상황이었고.
“그래서, 처음부터 어찌 된 건지 좀 말해봐.”
“마.....말해도 되겠소이까?”
한솔이는 두리번대고 눈치를 보면서 말했어. 푸하하하 귀여운 놈 같으니라고. 난 미소를 지으면서 허락했지.
그리고 나서 이야기를 들은 걸 정리할작시면,
한솔이는 청귀동이라는, 어려서부터 도깨비잡이를 천직으로 하던 사람들의 마을에서 자랐다는군. 도깨비는 보통 두 종류가 있는데, 바닷가에서 부를 가져다주고 고기몰이를 해주는 존재로서 추앙받는 부류와 내륙에서 인간들에게 못된 장난을 일삼는 존재들이 있다는 거지. 그런 사람들의 마을 치고는 용케도 지금까지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마을의 진짜 이름도 하는 일도 철저히 숨기고 현실에 적응해 온 결과.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도깨비잡이 따라다니면서 목숨 잃을 고비도 여러번 넘겨서, 이제 드디어 한 사람 몫을 하게 될 정도가 되었는데, 그렇게 맡은 첫 임무가 천보, 즉 초롱이 아버지에 관한 일이었다는 거야. 마을 사람들의 판단 상으로 천보 정도는 한솔이에게 맡겨도 될 일이었다는 거지. 헐. 천보 정도라고 할 정도면 얘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거야.
그리고 같이 떨어진 임무 하나가, 인간과 도깨비의 피가 섞인 존재도 같이 없애라, 즉, 초롱이를 죽여라, 이거였대.
“하지만 초롱이를 본 순간, 소생의 마음은 그 임무를 할 수 없다는 쪽으로 굳혔습니다. 도깨비잡이 하면서 여러 가지 잔혹한 모습들도 봐왔고, 제 마음도 그만큼 단단해졌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달라지게 만들어 준 게 저 초롱 처자올습니다.”
그러면서 넌지시 초롱이를 훔쳐보는데, 초롱이는 방구석에서 히이이익 하면서 더욱 몸을 벽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고. 이런 이런. 짝사랑의 폭풍이구만. 뭐 왕년에 짝사랑 한 번 지독하게 해봤던 나로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그 마음. 암.
“저렇게 가녀리고 힘없고 아름다운 존재를, 제가 어떻게 없앨 수 있겠습니까. 저는.....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마을에선 알고 있어?”
“그건.....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 사정은 딱하게 되었지만, 일단은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도 되고 해서 이런 저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었지.
“그럼, 오늘은 잠깐 물러가고, 내일 좀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초롱이도 저렇게 겁에 질려 있고.”
“그런데, 저.....죄송합니다만.....”
“왜?”
“이 집에서 신세를 좀 질 수 있을까 합니다만...”
헐. 남의 집 대문을 개박살 내는 소란을 피우고도 이런 소리가 어느 구석으로 나오는지 원. 하지만 뭐 어쩌겠어. 그렇게 밉상인 놈도 아니었고. 나는 난감해져서 초롱이를 쳐다봤어. 초롱이야 당연히 고개를 절레절레 하고 있지.
“대신 시키시는 잡일이라면 제가 정성을 다해 하겠습니다. 초롱 처자에게도 누가 되지 않도록 할 터이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초롱 처자가 저를 무서워 하는 것도 제가 도깨비잡이인 즉슨, 제 진심을 전달하려면 역시 가까이 있는 것이 최상이겠기에......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립니다!”
이번엔 아예 큰 댓자로 절을 하고 있는데, 돈을 쥐여서 내보내려 했던 계획도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가 없잖아. 하아,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나는
“잠깐 동안 만이다?”
라고 허락해버렸지. 초롱이의 원망스러운 눈빛이 뒤통수를 찔러대고 있다는 것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