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혈 (18) - 일보직전

NEOKIDS 작성일 11.07.01 21: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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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왜 그러셨어요?”


볼이 댓발은 나와 있는 초롱이의 표정을 보면서 참 난감하더군. 도깨비잡이라서 한솔이를 그렇게 껄끄럽게 생각하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지극정성인데 같은 남자로서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간 일이 더 꼬일 거 같고. 그래서 적당한 말을 찾았지.


“여기까지 너 보겠다고 찾아온 앤데, 얘기 들어보니까 그렇게 나쁜 놈 같지도 않고. 야박하게 내쫒을 수가 없더라고. 뭐 여차하면 미호랑 진윤이 있으니까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을 테고.”

“아....아저씨는 사람이 너무 좋아요.....그러면 절대 안된단 말이에요....”


초롱이는 온갖 용기를 짜내서 내게 뭔가를 말해주려는 것 같았어. 에휴. 그래봐야 애들끼리 문제인데 이 이상 더 변명을 한다는 것도 그렇고, 더 할 말도 없는 것 같아서 들어가려는 찰나, 초롱이가 내 팔에 매달려서 간절하게 말하더군.


“아저씨! 저 애....여기에 두면 안돼요.....제발 내보내요. 저 애는 도깨비잡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미호도 있고 진윤도 있으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답답하다는 듯 초롱이가 말했어.


“그 애가 도깨비잡이라는 건, 그 애의 모든 것이 환웅과 웅녀에 연결되어 있다는 거에요. 우리들은....원래 호녀의 뜻에 동조하여 낙오된 신선인.....그런 존재를 잡는 인간들이라면 어떤 사람들이겠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초롱이가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날 걱정하고 있는 거라는 걸 눈치 챘지. 참으로 바보 같은 놈이로세 나는. 


“저 애는 아저씨가 승천혈이라는 걸 알면 분명히 마을 사람들에게 연락할 거에요.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해치러 올 거에요. 그럼 아저씨는 지난번처럼 또 그렇게 변할 지도 모르고, 또 목숨을 잃을 지도 몰라요.”


확실히, 얘기를 듣고 보니 보통 일은 아니었어. 그럼 이제 말을 번복해서 내쫒아야 되는 건가? 하지만 그건 또 맘이 내키질 않았어.


도깨비잡이라고는 하지만 일단 초롱이를 보고 맘을 바꿔 먹었다고 했고, 또 나름 마을에서 커오며 현실세계에 적응했다고는 하지만 꼬락서니를 보아하면 인간 세상 어디에서도 돈이 있다 한들 제대로 받아줄 것 같지도 않고. 고민 고민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지.


“잠깐만 있는 거니까, 그냥 있게 두자.”

“아저씨!”

“괜찮아. 초롱아. 들킨다 한들, 뭐 어때. 마을 사람들 전부 부른다고 뭐 어떻게 될 일도 아니고, 그들도 인간이니만치 미호나 진윤, 그리고 네가 나서면 어떻게든 될 일이야. 그리고 중요한 건, 아직은 한솔이가 내 정체를 모르잖아. 그럼 떠날 때까지라도 모르게 하면 되지.”

“아저씨! 안돼요!”


팔에 매달려서 징징거리고 있는 초롱이를 미소와 함께 바라보면서 난 핵심을 찔러봤어.


“그보다도, 한솔이가 그렇게 싫으니?”

“네? 그건, 저, 아니, 그보다도.....”


우물쭈물 어버버버 하는 표정.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아직 이 꼬마는 자기 맘이 어떤지 감도 못 잡고 있었던 게야. 낄낄낄낄낄.


“한솔이가 그렇게 싫다면, 초롱이도 한솔이를 내쫒는 거 도와줘야 할 텐데에에에?”

“에에엥....”

“내쫒는 거 도와줄 거지? 초롱이는?”


고개를 숙이고 초롱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어. 착한 애를 데리고 어른이 꼼수나 부리는 게 미안했지만, 뭐 어쨌든, 해피엔딩이면 된 거야, 라고 생각했지.


“그래, 그래, 이제 저녁 먹자.”



숟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밥을 퍼 넘기고 있는 미호를 한솔이는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어. 큰 맘 먹고 두 봉지를 사서 다 만들었던 동그랑땡이 고작 하나 남아버린 상황. 미호가 오고 나서는 밥을 먹을 때 적게 잽싸게 빨리 먹는 게 습관이 되어놔서 망정이지, 제대로 못 먹을 뻔 한 게 몇 번인지.

하나 남은 동그랑땡으로 문전쇄도하는 미호의 젓가락을 태클로 막은 것은 바로 진윤의 젓가락. 둘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어.


“왜 이래. 내 거야.”

“진윤이 너, 해보겠다는 거야? 지지 않겠다!”


서로의 젓가락이 마찰해 용접봉처럼 불꽃이 튀길 정도의 공방전이 벌어지는 걸 보고 한솔이의 턱은 완전히 땅바닥으로 떨어지려 하기 일보직전이었어. 결국 젓가락이 다 녹아버렸고, 내가 꿀밤 한 대씩을 먹여서 둘을 떼어놓기 전까지는 그 싸움은 계속 될 것 같았어. 나는 공평하게 칼로 동그랑땡 하나를 반으로 갈라서 나누어 주었지. 이건 뭐 유치원도 아니고.


초롱이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밖으로 나가버리는 모습이 맘에 너무 걸리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이 설거지부터....라고 생각하다가 그러고 보니 이것들이 눌러살기 시작한 이후로 설거지를 한 번도 안하잖아. 나는 승천혈이 아니라 식모?


“저기, 이제부터 설거지를 좀 순번을 정해서 해보자.”

“응? 설거지? 그래!”

“알았어, 성수. 맡겨만 줘.”


그렇게 꺼낸 제안은 10여분 만에 눈물을 머금고 철회해야 했어. 잠깐 옆에서 보니 미호는 이런 자잘한 힘조절은 안되는지 냄비를 우그러뜨리고 그릇마다 깨먹으려 하질 않나, 숟가락을 휘어놓질 않나. 그런 미호 보고 비키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싱크대 앞에 선 진윤은 퐁퐁으로 비누거품을 만들며 정신을 안드로메다 관광 보내고 있다가 내가 물을 잠그면서 뭐하고 있냐고 묻자 한다는 말이


“아....거품은 너무 좋아 성소.....”


라는 말과 함께 얼굴에 홍조를 띄고 몽롱한 표정으로 만화책을 집어들질 않나.

그냥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흑.

 

그런 걸 한솔이도 돕겠다고 해서 나와 함께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문득 한솔이가 내게 물어왔어.


“그런데, 저 누님들은 대체 누구십니까? 젓가락으로 싸우는 것도 그렇고, 절 때릴 때도 그렇고, 인간의 힘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는 누님들이네요?”


그릇을 닦다 말고 우뚝, 멈춰버린 나는 돌덩이를 쪼갠듯한 어설픈 미소를 지으면서 연기에 돌입했어.


“응? 으으으응......뭐 인연이 좀 있어서, 우리 집에 잠시 지내고 있는 애들이야. 좀 있으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그런 것 치고는 뭔가 여러모로 수상합니다. 초롱이를 데리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의혹의 눈길을 지우지 않는 한솔이 녀석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 나는 막 오버를 해댔지.


“자자자, 이거 비눗기가 덜 가셨잖아. 잘 좀 행궈봐. 응?”


겨우겨우 그 눈빛을 가시게 하고 나서, 방 청소도 하고 여러 가지 같이 하고 나자, 이제 슬슬 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어.


“힘들었지?”


초롱이가 몰래 앞뒤사정들을 설명했고, 미호와 진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나와 초롱이를 보호할 것인가 머리를 짜내는 그 틈새에 한솔이와 나는 마당에 나와 있었어. 일단 한솔이의 잠자리는 싱크대 앞 부엌 바닥으로 정해놓았지만, 일단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뭔가 생각을 해야만 했지. 그래봐야 뭐 이불이나 치고 자는 거지 뭐 별 수 있겠나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나는 커피를 건네며 말을 걸었지.


“아닙니다. 묵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커피는 마실 줄 알지?”

“몇 번 마셔봤습니다.”


둘이서 홀짝거리며 커피믹스를 마시다가 나는 넌지시 물어봤어.


“초롱이가 그렇게 좋아?”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어이구, 그렇구나. 그런데 하필 도깨비잡이라서 이 일을 어떻게 하.....”


아차, 밥을 먹은 포만감에 방심하여 말이 허투로 나왔구나. 잠깐 눈치를 보니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닌 듯 했고.


“그렇겠지요......제가......도깨비잡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요....이럴 때만큼은 고향이 좀 원망스럽습니다.”


잠시 침묵의 시간. 아 민망한 상황. 한 편으론 안쓰러움도 느껴졌지. 어떻게 되어쳐먹은 인간들이길래 이런 애들까지 도깨비잡이로 몰고 간다는 건지. 환웅과 웅녀를 섬기는 자들은 하나같이 다 그런 몹쓸 것들인가 하는 분노도 들다가, 조심조심 분노를 삭이고.


“걱정마라.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뭐. 나름 가슴 아플 각오도 좀 해야 하고.”

“성소.....님이라고 하셨죠? 성소님도 저같이 누군가를 좋아했던 경험이 있으셨습니까?”


한솔이의 질문에 난 불현듯 그 애를 떠올렸어.


내가 짝사랑했던, 긴 머리 소녀를.


“응. 있었지. 얼마나 옛날 일이 된 건지 모르겠다.”

“그 땐 성소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음.....난 너에 비해서는 열심히 했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냥저냥 말이나 좀 나누는 사이였지만, 나 같은 놈이 사귈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못 꿀 상황이 되어버려서. 그냥 내가 포기했지.”

“이해가 잘 안갑니다.”

“뭐, 그런 것도 있는 거야.”


또 다시 침묵의 시간. 또 다시 민망. 이런 민망함은 좀 참기가 힘들어서, 또 나는 말을 늘어놓았는데.


“뭐, 재미난 이야기 없냐? 너 정도면 경험도 많을 것 같은데?”

“재미삼아서 말씀드릴 만한 게 없어서....”

“괜찮아, 괜찮아. 뭐 알고 있는 거면 뭐든 얘기해봐. 도깨비를 잡는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좀 신기한 일인데, 얘기할 게 뭐든 없겠어?”


한솔이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눈치더니 말을 꺼내기 시작했어.


“전설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긴 합니다만...”

“그래, 그래. 말해봐.”

“음....일단 잘 모르실 것 같아서 얘기해드리는데, 이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웅과 웅녀를 모시고 있는 일족인데, 원래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려고 했을 때 사실 호랑이도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헐. 


잠깐. 그거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었지. 호녀를 섬기는 무리는 부정한 무리들로써 절대로 이 세상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

하지만 난 지루한 티를 내지도, 그 말들에 반박하지도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써야 했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말하면 이래저래 엿 제조 코스 되잖아. 반박이라도 하면? 그날로 게임 오버.

그렇게 알고 있는 얘기가 막 이어지고 있다가.


“그래서 저희는 호녀를 모시는 부정한 무리들을 없애는 기술들을 익혀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었던 전설 중에 희한한 전설이 있더군요.”

“무슨?”

“그 무리들을 조종하던 족속의 피를 이어받은 승천혈이라는 자가 세 가지 존재를 모으고 현세에 나타나는 순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싸워야 한다....구요....”


어째, 그 말을 하면서 이녀석이 점점 눈빛이 변해가는 것 같았어. 점점 미호나 진윤, 초롱이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앞뒤를 맞춰보는 것 같았지.


“첫번째가 구미호고.....”


한솔이의 눈이 점점 휘둥그래지는 걸 느끼며 나는 낭패감을 느꼈지. 젠장. 이걸 어떻게 빠져나간다.


“그 다음이 사람을 조종하는 처녀귀신이고....”


그 다음부터는 내 눈치를 슬슬 살피기 시작하는 녀석. 태연해야 한다. 태연해야.


“세 번째로 인간의 피가 섞인 도깨비가......”


완전히 전투태세가 되려는 녀석. 어색하게 쪼개지는 미소. 나도 이젠 더 이상 통제가 안되는 상태. 아 누가 제발.


그 때 타이밍도 기똥차게 대문이 끼이이익 하고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어. 양복을 입은 뚱뚱한 남자 세 사람 정도였지. 그리고는 우리 앞을 지나쳐서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천천히.


그러는 동안 우리는 멀뚱하게 그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고, 다 들어가고 나자 한솔이가 또 묻더군.


“아는....사람들이십니까?”

“응? 응, 응. 뭐 그럭저럭.”

“인간관계가 참 폭넓으시군요.”


아니, 사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인데?


“이제 들어와도 돼!”


미호가 크게 외치는 소리에 우리는 들어가려고 엉거주춤 일어났어.


“저, 성소님.”

“응?”


들어가려는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녀석.


“......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 승천혈이 나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어쨌건 급한 불은 꺼졌지만, 덕분에 심장 크기가 확 줄어들어버린 것 같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나는 한솔이와 함께 들어갔어.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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