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슨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가 알기로 데미앙 페르마이어는 현재 범죄자의 신분인 것이다. 그를 잡을 여력도 겨를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어떤 생각들이 다이슨의 머리에서 빠르게 오갔다. 그는 병사에게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는 다짐과 함께, 타레크가 근무를 끝내면 자신에게 오라고 일러두었다.
"이 지역에서 나는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차라네."
스케루니가 따른 찻잔에서 김이 오르고 있었지만 데미앙은 선뜻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 전 친위기사단장께서 여기는 웬일로 행차하셨는가."
"호칭이 거북하니 그냥 페르마이어군 정도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러신가. 알겠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여기서 메리니라는 애가 돈을 빌려갔을 겁니다. 그걸 탕감해주시오."
"허허, 이런."
스케루니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메리니에 관한 이야기라니. 내가 그 애라면 잘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그냥 복잡한 사정일 뿐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알다시피, 고리대금업이란....."
백발 사이로 스케루니의 눈이 빛났다.
"이쪽이 뭔가를 받아야만 빚을 없앨 수가 있는 것이지."
데미앙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지고 온 지갑을 통째로 꺼내놓았다.
"지금 있는 재산 전부요. 금화 57기네온. 모자라면 더 가져올 수도 있소. 그래도 안된다 하면...."
데미앙은 단검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것이 그 단검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겠다는 분위기도 함께 보여주면서.
"허허허, 이런이런."
다시금 스케루니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네. 하물며 방금 본 자네의 무시무시한 실력도 직접 경험하고 싶진 않군."
"그럼 무엇을?"
"내가 이래뵈도, 학자 나부랭이였었다네."
"하아?"
데미앙은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믿기지 않아도 할 수 없지. 카노트 왕국의 현자 가르바가 내 다른 이름이었지만."
데미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썹이 치켜올라갈 정도로 놀랐다. 그의 스승 길가메쉬가 항상 말하던, 그리고 5대륙에 널리 알려져 훔족까지도 그 위명을 알고 있는, 그리고 카노트 왕국을 제노스 제국이 명말시켰을 때 행방이 묘연해진 그 현자 가르바가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데미앙은 덥석 믿지는 않았다.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까.
"제 스승 길가메쉬께서 현자님을 만난 곳을 저에게만 말씀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어디였습니까?"
"카르마의 언덕이었지. 길가메쉬는 그 때 어린 병사였고, 내게 물을 갖다 주었었네."
"현자님을 뵙습니다."
데미앙은 의자에서 내려와 즉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것이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이사람아, 그럴 것까진 없네. 일어나 자리에 앉게."
"예."
데미앙은 즉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스케루니, 아니 가르바는 연신 미소를 지었다.
"길가메쉬가 보여주고 싶은 제자가 있다고 하고는 전쟁에서 세상을 떴기에 잊고 있었는데,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하군."
"스승님께서....."
"그렇다네. 천년에 한 번 나올 인재라더군."
데미앙은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스승은 자신이 죽은 뒤에도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 같았다. 검과, 말과, 인생을 섞었던 데미앙 인생의 단 하나 진정한 스승.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전당포를....."
"말하기가 좀 그러니, 늙은이의 괴벽이라고 해두지. 어쨌거나, 아까 전의 이야기 말이네만....."
가르바는 두툼한 책뭉치를 꺼내들었다.
"늙은이의 심심풀이로 쓰고 있는 책이 있는데, 자네의 마법 운용력이 아주 특이하다 들었네. 그에 관해서 좀 이야기를 나눌까 싶었고.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라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허허허, 잘 됐구만. 그럼 이제 메리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본인과 나눠보게."
하고 가르바가 등을 돌리자, 문간에 메리니가 서 있는 것이 데미앙의 눈에 들어왔다. 메리니의 표정이 짜증과 분노로 뒤범벅인 것도.
메리니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든 채 성큼성큼 앞서가고 있고 데미앙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 뒤를 따라갔다. 계속 어색한 거리의 산책이 계속 되다가, 메리니가 홱 돌아서면서 데미앙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