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소리를 내며 탁자에 내려진, 낡은 나무 물컵. 안에 담긴 물이 사방으로 튀자 데미앙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실거라고는 물밖에 없으니 그거나 마시고 가버려요."
메리니는 쌀쌀맞은 말만 남기고 부엌으로 가버렸다. 데미앙은 그 물컵에 손도 대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흙과 통나무로 지은 집. 깨끗하게 해놓고는 있지만 군데군데 낡아빠져 수리가 필요한 곳이 많았다.
문득, 그것을 해 줄 부모님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데미앙은 그 호기심을 이내 눌렀다. 어른의 자취랄까,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공간을 보며 대강 짐작한 탓이다.
"아직도 안갔어요?"
메리니가 부엌에서 물통을 들고 나오면서 말했다.
"할 얘기가 안끝났거든."
"무슨 얘긴데 귀찮게 굴어요?"
데미앙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방의 문간에 기대고 서있는 남자아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누나, 손님이야?"
"버니! 누워있지 않고!"
메리니가 바닥에 물통을 놓고 급히 달려가 남자아이를 부축했다. 메리니가 얼추 16-17살 정도 되어보인다면 동생은 이제 7-8살 정도 되어보였다.
"이제, 정말 가세요."
데미앙은 물통을 집어들었다.
"물은 어디서 떠오지?"
뉘엿뉘엿 져가는 해를 등지고 데미앙은 해온 나무들을 내려놓았다. 그 나무들 중에는 집을 고칠 부재감도 있었다.
흙을 물에 개어 근처의 풀지푸라기와 섞고, 벽의 금간 데 중에서 시급하게 틈을 메꿔야 할 부분에 발라 짓이긴 후, 나무를 덧대고 다른 나무에 붙였다. 다른 공구가 없었으므로 좀 튼튼한 나뭇가지를 고른 후 단검의 검격으로 그것을 때려넣자 나뭇가지가 못처럼 깊게 파고 들어갔다.
"왜 집은 고쳐줘요?"
구경하던 메리니가 여전히 토라진 표정으로 시비를 걸었지만 데미앙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그냥 내버려둘까?"
메리니는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샐쭉함이 조금은 누그러든 목소리로 데미앙에게 말했다.
"다 되거든 씻고 들어와요. 집을 고쳐준 댓가로 저녁은 먹고 갈 수 있겠네요."
데미앙이 길어온 물로 세수를 할 때쯤엔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사실 데미앙 자신도 자신의 행동에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왜 집을 고쳐준거냐. 알량한 죄책감과 양심의 발로인 건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산발 머리채 속의 뇌를 괴롭혀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땐 식사가 모두 준비된 후였고, 버니도 식탁에 나와 있었다.
"침대로 갖다 주겠다고 했잖아. 들어가면 안되겠니?"
"안돼. 손님이 있잖아. 그건 예의가 아닌걸."
버니는 꿋꿋이 버텼고, 메리니도 더 이상은 막을 수가 없었다. 버니의 간만에 보는 싱글벙글한 표정이 메리니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직접 구운 빵을 찢어 수프에 적시는 동안 데미앙은 버니의 계속되는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 메리니가 실례라고 주의를 주고 또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며, 데미앙은 꿋꿋이 저녁을 먹었다.
데미앙에겐 왠지 모르게, 그 저녁은 전쟁에서 이긴 후의 승전회식이나 그동안 수없이 먹어봤던 만찬회의 음식들보다 맛있었다.
저녁을 먹고 버니는 데미앙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 잠깐 밖으로 나갈건데 들어주세요."
메리니도 이젠 더 못참겠던지 제대로 폭발했다.
"버니 윌킨슨! 이젠 안 돼! 너 지금 몸도 안좋은 애가! 거기다 손님한테도 실례잖아!"
데미앙은 바로 버니를 들어올려서 머리 위에 무등을 태웠다. 버니는 신이 나는지 데미앙의 장발을 휘어 잡고 깔깔거렸고,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메리니에게 데미앙은 한마디만 던지고 나왔다.
"다녀올께."
달은 굉장히 밝게 떠 있어서 비록 밤의 숲 근처라 해도 잘 들렸다. 밖으로 나와 어느 정도 집과 거리가 떨어지자 버니의 행동이 갑작스레 얌전해졌다.
"달이 참 밝아요. 전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렇구나."
묵묵히 숲의 언저리를 걷던 중 버니는 갑작스레 물었다.
"우리 누나 어떻게 생각해요?"
"그게 무슨 뜻이냐?"
"그.....뭐랄까.......결혼상대로요."
데미앙의 발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버니는 놀랄법도 하건만 조용했다.
"글쎄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남자 대 남자라는 약속법을 가르쳐 줬어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이랬어요."
버니는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으면 우리 누나 좀 아저씨한테 부탁할께요. 남자 대 남자로."
데미앙은 뭔가 부정하려다가 그만 두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약으로 버티는 아이.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를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는 아이. 그런 세상. 그 생각의 무게는 데미앙이 목 언저리에 얹은 버니의 무게보다 훨씬 더 데미앙을 짓눌렀다.
"싫으세요?"
"약속하마."
"감사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아저씨가 좀 나이가 많아보여서 걱정도 되네요."
데미앙이 일부러 점프를 하자 버니는 또다시 깔깔거렸다. 달빛은 여전히 크고, 둥글며, 휘황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