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전기 헤로스 외전 - 쥬마리온 (11)

NEOKIDS 작성일 12.04.24 20: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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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한 시각. 초병들의 외침이 울리면서 성의 모든 인간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급히 횃불들마다 불이 붙었고 병장기들의 덜그럭거리는 소리, 자신의 병단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들이 위험을 알리는 종소리를 묻어버렸다.

모두들 성벽으로 붙어 저 너머를 바라보았고, 곧이어 누군가가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저기 있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훔족의 안광과 가죽갑옷. 처음 수십만 보이던 안광이 점점 늘어났다. 누군가 촛불을 한꺼번에 켜대는 것 같이 순식간에 양옆으로 늘어나던 안광들은 카나이 산맥에서 칼레아 시로 이르는 넓다란 평지를 거의 다 채우다시피 했다. 훔족이 흥분하면 체온이 급격히 높아지는 탓에 뜨겁게 내뱉는 숨결이 찬 밤공기를 만나 입김이 되어 모락모락 오르는 것들도 달빛을 타고 보일 지경이었다.

저마다 웅성거림과 두려움의 한탄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을 보며 팔크람은 전달령을 내렸다.

"흥분하지 말 것, 쓸데없는 행동하지 말 것."

전달령이 계속 말을 전달하며 사기를 다스리는 동안 다이슨은 그 광경을 보며 중앙의 지원군이 한시바삐 오기만을 바라고 있었고, 그 성의 한구석에서, 벽에 붙어서 구경을 하던 메리니는 두 손을 합쳐 쪼그려앉은 채로 기도를 시작했다.

"제발........살아남게 해주세요......제발......."

훔족이 바로 덤벼들어오지 않은 채 새벽의 동이 카나이 산맥을 밝혀오는 걸 확인하며 팔크람은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누군가 대단한 지휘관이 있었다. 쉽게 흥분해서 진열을 무너뜨리고 바로 돌진해 올 수도 있었건만, 전혀 그러지 않고 오히려 이쪽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일사분란함과 여유. 그런 것은 전의 훔족에겐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룻밤의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창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들이 민병대 속에서 속출했고, 그런 옆사람도 팔꿈치로 툭툭 쳐 깨우기를 거의 포기할 무렵.

훔족의 얼굴위로 드러난 엄니와 그들 특유의 회색 피부마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해가 뜬 시각.

훔족이 진군을 시작했다.

"온다!"

소리를 낼만한 것들이 모두 위험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고, 그게 아니라도 훔족의 진군 북소리가 크게 온사방을 울려 솔솔 찾아오던 잠들을 쫒아냈다.

"성의 삼면, 경계태세 강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팔크람은 잽싸게 슈파스를 집어들고 일어나 성 정면의 병사들에게로 달려나갔다.

"정신차려라! 지금부터 전투다! 돌과 끓는 기름 준비!"

그 말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기름솥과 돌더미로 달라붙어 성벽 쪽으로 그것들을 끌어왔다. 다른 사람들도 병장기를 부서져라 쥐면서 각자 팔의 근육을 팽팽하게 했다.

훔족의 진군 북소리는 느린 박자로 울리다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고, 그것에 맞춰 그들 선발대의 발울림 소리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궁수들 준비!"

궁수들이 화살을 먹여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는 소리가 일제히 들려오는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길 봐!"

그 사람이 가리키는 곳에, 순백색의 망토와 갑주를 빛내는 자가 뚜벅뚜벅, 2차 도랑을 건너 훔족 대군이 진군해오는 그 정면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산전수전 다 겪어본 팔크람이라도 미소를 지으며 흥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저 머저리 같은 자식이!"


데미앙은 술병에 남아있던 마지막 한 모금을 비우고 술병을 내던져 깨버렸다. 알기로는 붉은 갈기 여관에 남아 있던 마지막 러그라인주였다.

칼집을 땅에 박아 꽂아놓고 데미앙은 앞을 바라보았다.

진군이 일으키는 거대한 먼지구름. 인간족의 1.7배는 되는 훔족들의 큰 신체가 일으키는 땅의 울림. 엄니와 입술 사이에서 지저분한 침이 흘러나오는 광경들,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파도처럼 다가오는 그들의, 그 무지막지한 광경. 환상이라도 보는 것처럼 느릿하고 아득하게 다가오는, 그 힘의 돌진.

그것에 쓸려나가 버릴 것 같은 공포와 또 그것이 가져다 줄 공백의 허망함.

"내가 미쳤지."

신경을 타고 흐르는 두려움으로 인해 떨리는 손을 한 번 흔들어 맘을 다지면서 데미앙은 땅에 박힌 칼집으로부터 브라이거트를 뽑아 쳐들었다. 긴 브라이거트의 검신이 햇빛을 받아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묘한 곡선을 그리는 아름다운 검날로 호를 그리며 데미앙은 외쳤다.

"나 제국 검사 데미앙 페르마이어! 이 칼집 뒤로는 너희들을 한발짝도 보내지 않는다!"

곧이어 데미앙은 주문을 외치면서 빈 한 쪽 손을 앞으로 내뻗고 자세를 취했다.

"샤이닝 앤 스파크!"

빈 손으로부터는 불꽃폭죽이 일어났고 검신에서는 섬광이 일었다. 그 두 마법이 동시에 일으키는 강한 교란은 성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에게마저 영향을 끼칠 지경이었으니, 달려오고 있던 선발대에게는 시력을 파괴할 정도에 이르렀다. 거기에 불꽃폭죽이 날아가 청각마저 교란시키고 있었다.

미친듯이 터져대는 굉음과 섬광이 선발대 앞의 전진선 100여 명을 한꺼번에 넘어져 구르게 만들었다.

"꾸에에에엑!!!!!"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까지 앞의 쓰러진 자들을 밟고 헛디디며 넘어진 수가 대략 300. 하지만 그것이 상황을 바꾸진 못했다.

여전히 전진의 속도를 늦추지 않으려 자신들의 동료를 곤죽이 되도록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훔족은 다가오고 있었다. 쓰러져 밟힌 자들의 뼈부러지는 소리들이 선명하게 들리고 밟힌 자에게서 뿜어지는 녹색 피가 마치 비 온 뒤 땅의 고인 물을 튀기는 것 같은 꼴이었다.

데미앙은 순간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브라이거트의 검날과 다른 손의 마법이 정신없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검날이 여지 없이 훔족의 사지를 잘라놓는 그 순간 흑마법의 검은 오오라가 사정없이 그 다음 놈을 휘감으며 두개골을 으깨놓았다. 파죽지세. 등을 타고 뛰어넘어 베는 즉시 뒤를 찌른 후 브라이거트에 마력을 주자 내장이 파열되어 등까지 뚫린 훔족 하전사. 그 시체가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하나, 둘 또 시체를 만들고 쌓아가며 데미앙은 싸웠다.

훔족의 대열은 오른쪽으로부터 다가온 데미앙의 공격 때문에 정신없이 쓸려나가며 그 진행방향이 조금씩 뒤틀어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쓰러진 자들을 밟느라 제대로 진군방향을 유지할 수도 없었던 터에 강대한 공격이 오른쪽으로부터 쏟아지자 훔족의 대열은 왼쪽으로 크게 휘어졌다.

단 한 사람이 훔족의 대열을 헤집어놓는 광경을 본 성 안의 사람들은 모두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을 뿐 어떤 단어조차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으로 그 피보라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뒤틀어지던 훔족의 진군대열이 다시 오른쪽으로 반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데미앙의 무서운 공격에도 아랑곳없이 데미앙을 제거하고자 하는 훔족의 집념과 투지가 만들어낸 상황이었다. 여전히 공포란 것을 모르는 전쟁종족. 그 모골이 송연한 상황에서도 데미앙은 검술과 마법을 흩뿌리며 대치했지만 조금씩 위치가 밀려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 그 뒤엔 천여 명의 훔족 하전사들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넓은 평지를 꽉 채우고 있는, 최소 수십만은 되어 보이는 대군인지라 이 선발대 천여 명을 다 없앤다 해도 치명적인 손해는 끼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사실로 인한 초조함이 스멀스멀 조여들어오며 여전히 밀려나기만 하던 때, 눈 앞의 하전사 한 놈을 처리하고 뒤를 방어하던 데미앙은 저멀리에서 다가오는 무언가를 보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말, 그리고 그 위의 붉은 망토와 갑옷과 창.

"우라아아아아아압!"

붉은 신체의 그림자가 한 번 공중으로 뜨는가 싶기가 무섭게 내려앉는 사이로 넓은 원의 빈 틈이 생기며 그 주변이 녹색의 피분수를 뿜었다. 전부 깨끗하게 목줄을 잘라내버린 것이었다.

팔크람은 귀기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배후를 보인 훔족 진형의 왼쪽편으로 짓쳐들어가 공격을 해댔다. 검의 그것보다도 더 우아하고 힘있는 창의 베기가 쉬지 않고 훔족의 사지를 노렸고, 노린 곳은 절대 놓치지 않고 잘라내고 찢고 부숴버렸다. 데미앙은 그 모습을 보며 씨익 미소를 흘린 후 기세를 올려 한층 더 가열차게 훔족을 몰아붙였다.

안그래도 오른편으로 틀어져 배후를 노출한 상황에서 팔크람의 왼편 공격까지 들어오고, 거기다 뒤에서부터 꾸역꾸역 밀려드는 진군의 관성이 더해지면서 훔족의 하전사들 진형은 여드름을 쥐어짜는 것 같은 형태로 성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닥에 말뚝을 잔뜩 박아놓은 2차 도랑 한가운데 지점이었다.

순식간에 함정처럼 만들어 놓은 2차 도랑으로 떨어져 뱃가죽을 비롯해 사지 한두군데가 여지없이 꼬치 꼴이 되어버린 훔족의 비명은 성 안에서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에게조차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민병대 병사 중에는 아예 귀를 틀어막고 쪼그려앉아 겁에 질려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이 뭔가 잠잠해진 기운을 느끼고 귀에서 손을 떼며 성 밖의 광경을 확인한 순간.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먼지가 가라앉은 2차 도랑 앞 데미앙과 팔크람의 전장 상황을 확인한 순간.

다이슨이 한 손을 높이 치켜들며
"우와아아아아아아!!!!!!"
하고 함성을 질렀다. 곧이어 뒤따른 수많은 병사들의 함성과 손짓이 성 안을 가득 메우며 흥분을 더했다.

먼지가 가라앉은 그 난전터의 안. 훔족들의 시체가 널려 둔덕을 이루다시피 한 그 꼭대기에서, 데미앙과 팔크람 두 사람이 굳건히 버티며 굳은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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