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전기 헤로스 외전 - 쥬마리온 (10)

NEOKIDS 작성일 12.04.22 09:5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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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준비는 훔족이 그들의 표지를 100케타 선에 세우기 전에 끝났다. 완전무장을 한 채로 성벽의 경비를 서던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눈이 좋은 사람들은 다섯명의 훔족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표지를 들어 땅에 내리꽃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다이슨도 망원경으로 그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자마자 곧장 병사들의 현황을 점검하기 위해 병영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무기나 식량들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가운데를 지나 막사로 들어 왔을 때는 마침 팔크람을 비롯한 병사들이 작전을 점검하고 있었다. 팔크람만 제외하고는 전부 예를 차리기 위해 일어났고, 다이슨은 곧장 팔크람에게 물었다.

"민병대는 얼마나 소집됐습니까?"
"오늘까지 1000명 정도입니다."
"시 소속 병사가 3000명....도합 4천인가...."
"적의 정보는 아직 없습니까?"
"방금 100케타 앞까지 표지를 세운 것을 보았소. 에지간하면 다 보일 지경이더군. 우리 척후병사들이 살펴보고 있지만 아직 그들 부대의 움직임은 없는 것 같소."
"이상하군...."

팔크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과 같은 훔족이라면 부대의 정비태세 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 막바로 밀어붙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100케타 앞까지 여보란 듯이 표지를 세운다는 것도, 표지가 거기까지 세워졌다는 것도 뭔가 석연치 않군요."
"그렇다면?"
"누군가, 머릴 잘 쓰는 지휘관이 생긴 것 같습니다."

다이슨은 신음을 내뱉었다. 대체로 훔족의 전술과 생활방식으로 볼 때 그들에게 높은 지능이 있다고 볼 순 없었다. 그것 하나 때문에 모든 함정과 장애물의 준비가 가능했던 것이다.

칼레아 시는 험준한 카나이 산맥에서 뻗은 고지가 200케타 정도를 간격으로 점점 평지로 변해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카나이 산맥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이 산재한 산지로 진군해온다는 무식한 발상을 하고, 정말 그 발상을 행동에 옮겨 그들의 진군 기동력을 포기하는 상황이 되지 않고서야 카나이 산맥 - 칼레아 시로 이어지는 축선의 길만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우회기동이 이뤄진다면 이런 준비들은 허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팔크람은 그런 걱정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다이슨에게 말했다.

"어차피 카나이 - 칼레아 축선의 외길을 택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저 표지는 부대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는 기능의 것이고 다른 여러 갈래로 세우진 않으니까요. 다만......"
"다만?"
"이 모든 행동에는 압박의 목적이 보입니다. 세를 과시함으로서 이쪽이 공포에 질려 이성이 마비되도록 만드는 술수죠. 제국군도 자주 써먹던 방법입니다."
"그 말은....."
"야수족일 뿐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의 방어전은 힘들어지겠습니다."

데미앙은 버니를 찾아 병영 안을 걷고 있었다. 메리니가 이불을 가지고 갔다면 버니도 거기 있을 것이었다. 모든 물자들이 민병대와 시 소속 병단의 주둔지로 모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데미앙의 곁을 무심한 눈길로 지나치며 각자의 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훔족의 태세를 본 뒤로는 흥분은 많이 줄어든 편이었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비장함과 절박함의 분위기였다.

버니가 데미앙의 눈에 띄었을 때는 이불을 몸에 두른 채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앉은 채로 가이스나드를 손질하고 있는 자는 로카치오였다.

"아저씨!"

버니가 팔을 들어 흔드는 걸 보고 로카치오도 가이스나드에서 시선을 들어 데미앙을 보았다. 그리고는 의외라는 듯 버니외 데미앙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괜찮니?"

데미앙이 다가가 버니의 머릴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직은 버틸만 해요. 누나 불러올까요?"
"아니, 괜찮다."

그 사이 로카치오는 엉거주춤 일어나며 가이스나드를 칼집에 넣었다.

"다행이군. 애 보는 데는 소질이 없어서. 아는 사이라면 맡기겠어."
"왜요. 로카 이저씨도 재밌는데."
"야임마!"

로카치오는 버니에게 짐짓 화가 난 척을 하고 있는 틈에 데미앙이 물었다.

"패거리들은 다 어쨌나."
"피난민 틈에 껴서 도망갔어. 원래 그런 놈들이지."

이번엔 로카치오가 물었다.

"그래, 칼레아 시를 구해주러 오셨나."
"난 참전하지 않는다."

로카치오는 데미앙의 그 말에도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기는 커녕, 코웃음을 한 번 칠 뿐이었다.

"훗. 그럴 줄 알았어."
"무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은 내가 예전에 한 번 봤던 그 빛나는 데미앙 페르마이어가 아니었거든. 눈은 썩어있었고 마음엔 공허함만 가득한 것처럼 보였지."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나?"

데미앙의 나지막한 말에도 로카치오는 여전히 개의치 않고 말했다.
"내가 그런 모양의 낯짝을 하나 알고 있었거든."

로카치오는 칼집에 넣은 가이스나드를 옆구리에 고쳐 달면서 말했다.

"거울을 보면서 항상 보던 그 얼굴. 그게 당신한테도 있었어. 거울 속의 내 얼굴은 미래도, 즐거움도, 그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지. 공허와 절망만이 가득했다고. 그런 단어도 나중에 좀 글깨나 읽었다는 놈에게 배웠지만."

현자 가르바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데미앙이 깨닫고 있는 순간, 로카치오는 등을 돌리면서 말했다.

"내가 이런 얘길 왜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군가에겐 얘기하고 싶었어. 그게 당신일줄은 꿈도 못꿨지만.이번 전쟁에서 나는 그런 내 자신을, 아니, 모든 걸 버려 볼거야. 그러고도 남은 게 있다면, 그걸 붙잡고 살아야겠지. 그 전에, 살아남아야 할라나......"

로카치오는 여운을 남긴 채 병영의 한가운데 쪽으로 사라졌다. 데미앙은 그런 로카치오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버니를 숙소의 침대에 데려다 놓고, 버니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대고 한참을 망설이던 데미앙은 결심을 하고 가르바를 찾아갔다. 정리되어 노끈으로 묶은 노트 몇 권과 몇 가지 단촐한 짐을 꾸리고 있던 가르바는 데미앙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왔는가. 피난민들의 일에 대한 정리가 되어서 나도 떠나려던 참일세. 얼굴을 못보고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야."

가르바의 반가운 얼굴을 보며 데미앙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말했다.

"선생님."
"흠?"
"전 아무래도 선생님의 말씀대로, 아무것도 벗어나지 못했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벗어나지 못한 채로 움직이려 합니다."

가르바는 데미앙을 멀뚱하게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면서 데미앙의 양 어깨를 따스한 느낌으로 두드려 주고는, 갑자기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자네를 위한 게 아직 남아있었다네."

가르바는 단촐한 짐 중 한 묶음을 끌렀다. 길쭉한 것이 좋은 천에 둘러싸여져 있었다.

"자네가 쓰던 검은 현재 수도에 봉인되어 있다 들었지. 이건 자네 스승 길가메쉬가 내게 맡긴 것이라네. 그에겐 나도 놀라울 뿐이라네. 마치 이런 때를 위해서 맡겨놓은 것 같지 않은가."

데미앙은 삐져나온 검 손잡이 모양새를 보고 급히 천을 벗겨보고는 탄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길가메쉬가 가장 아끼던, 그가 죽으면서 행방불명되었던 전설의 가이스나드, 브라이거트였다.

길가메쉬의 수많은 전설을 칭송하는 노래마다 나왔고 데미앙도 몇 번 보지 못해 어렴풋이 기억만 하고 있는, 마법전도율 사상최고 최강의 검.

"검 손잡이도 살펴보게."

데미앙이 그 말대로 살펴보자 작게 길가메쉬가 직접 새긴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미래의 훌륭한 제자를 위하여, 이 검을 남긴다 -

"선생님....."

습기를 눈에 채우는 데미앙에게 가르바가 여전히 인자한 미소로 답했다.

"자네의 선택대로 하게. 그리고 그것에 후회는 하지 말게.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그런 후회 말일세."

가르바는 그 말을 남기고 단촐한 짐들을 나귀의 안장에 얹으려 옮기고, 데미앙도 그 일을 돕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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