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족 하나를 베어넘기며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광경을 본 팔크람이 데미앙 쪽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네 미쳤나?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거야!"
"병력을 후퇴시켜. 지금 당장."
"자네 하나가 이런다고 이 전투가 끝날 것 같아?"
"지금이 아니면 안돼. 이 전투에서 승기를 잡으려면 이 방법밖엔 없어!"
"그렇다고 이 주변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를 짓을 하겠다는 건가! 아무도 흑마법과 백마법을 융합한 힘을 컨트롤해낸 적이 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잖아!"
다가오는 훔족 하나를 베어넘기며 팔크람이 윽박질렀지만 데미앙은 이미 결심을 굳힌 눈빛으로 양손의 오오라를 더욱 키웠다.
"빨리 병력을 내 뒤로 멀리 후퇴시켜! 어서!"
팔크람은 입술을 굳세게 깨물고는 병력 쪽을 돌아보았다. 이미 뒤섞인 난전 상에서, 로카치오의 지휘도 없이 정연한 후퇴를 바란다는 것은 이미 글러먹은 상황이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후방을 맡아 최대한 막아주기 전까지는.
팔크람은 데미앙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지옥에서 보자고."
데미앙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단숨에 알아챘지만 팔크람이 기합과 함께 앞서 나가는 바람에 더 말을 전하지 못했다. 데미앙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집중했다. 오오라가 퍼져나가자 다른 훔족 하전사들 몇은 더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그 오오라를 두려워 했었기에.
하지만 지휘관은 달랐다. 그는 난전의 와중에서 피어오르는 데미앙의 오오라를 보고는 포효를 하다 말고 엄니를 질끈 다물었다. 특별히 만들어진 쇠곤봉을 한 번 휘두르며 그는 데미앙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를 보좌하던 훔족 하전사들도, 그리고 난전을 거듭하던 놈들도 모두 지휘관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듯 진격하기 시작했다. 모두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뒤로는 한 발짝도 못 움직인다."
훔족 특유의 걸걸한 고함소릴 들으며 팔크람은 슈파스를 한 번 휘둘러 몸을 웅크리는가 싶더니 땅을 박찼다. 언제 봐도 일품인 공중 도약으로 팔크람은 단번에 수십 케타를 날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힘을 짜내고 있는 팔크람의 그 도약은 훔족의 진격을 약간 지체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공중으로 뭔가가 날아들면 그 누구라도 일단은 반사적으로 몸이 멈추게 되어 있었고, 그 틈을 노린 팔크람의 슈파스가 번뜩이며 대 여섯 구의 시체를 만들었다. 훔족은 순식간에 팔크람을 에워싸기 시작했고 진격은 완전히 멈췄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지휘관은 팔크람 따위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를 우회하여 데미앙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서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제길!"
어떻게든 놈이 있는 쪽으로 가보고 싶었지만 지휘관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팔크람을 노리는 훔족 하전사들의 진형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두텁고 집요했다.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겠다는 결의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에 팔크람은 의아해했다. 3차 대륙간 전쟁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투쟁본능 외에는 다른 것을 찾아볼 수 없던 들짐승의 무리를 이만큼이나 바꿔놓은 저 지휘관은 누구인가. 팔크람은 그와 겨루어 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마음 뿐이었다. 그보다는 빨리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수차례 적을 베어 넘기며 팔크람은 저 너머로 소리쳤다.
"후퇴! 후퇴하라!"
팔크람의 목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난전 중에서도 다시 진형을 갖추며 퇴각하려 애썼다. 로카치오가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 그 위기감과 함께 죽음에 직면한 생존본능이 그들의 이성을 더 철저하게 벼리기 시작했다.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서넛씩 짝을 지어 다른 무리를 도와주면서 병력들은 후퇴했고, 그 진영은 팔크람이 있는 곳까지 왔다.
팔크람은 남아있던 마지막 하전사의 목줄을 쳐버린 후 후퇴하는 그들의 앞으로 나섰다. 병사들의 후퇴가 더 용이할 수 있도록 팔크람은 병사들의 후퇴와는 반대로 오히려 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베어 넘길 때마다 이제 예전같지 않은 자신의 근력을 실감했다.
'훈련은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도.....나이는 못속인다는 건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며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나아가고 있을 때, 평소 같으면 들리지 않을, 누군가가 구조를 요청하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나....나 좀 일으켜 줘....."
팔크람은 그것이 로카치오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데미앙의 양쪽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오라는 각각 사람 대여섯 명을 합쳐놓은 크기까지 올라갔다. 그러고 있는 가운데 그의 눈에 훔족 지휘관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눈 앞에 보였다. 주변에서 떨며 주저하던 하전사들도 그를 보자 갑자기 가슴을 두들기며 없던 용기들을 짜내기 시작했다.
한 두 놈의 훔족 하전사들이 달려들자 데미앙은 그들이 휘두르는 곤봉 사이를 어렵지 않게 피하며 마력의 오오라를 유지했다.
오오라를 만들고 있는 자가 몸을 피한다. 그 사실을 인식한 다른 놈들의 눈빛이 살기로 흐려지기 시작했고, 공격에 가담하는 훔족 하전사의 수가 더 늘어났다. 그래봐야 데미앙을 둘러싼 예닐곱 정도가 공간의 한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데미앙을 벅차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숨을 몰아쉬며, 마력을 유지하고 동시에 보법을 신경쓴다는 것은 데미앙도 처음 해보는 짓이었지만 아슬아슬하게 해내고 있었다. 곤봉은 간발의 차로 데미앙의 머리카락이나 갑주들을 스쳐지나갔고 점점 그 간격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때 데미앙의 눈 앞으로 길이 확 트였다.
지휘관 놈이었다. 승부처. 여기서 끝내지 못하면 안된다. 그런 결심이 데미앙을 휘감았고, 데미앙은 한 쪽으로 양손을 모은 채 자세를 웅크렸다.
나머지 훔족들이 한 보 두 보 물러나 지휘관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그 속으로 갑자기 지휘관이 육중한 점프로 뛰어들어 곤봉을 휘둘렀다. 그 곤봉이 한없이 느린 것처럼 데미앙의 눈 앞에 천천히 다가오는, 짧으면서도 영겁의 시간인 것 같은 그 잠깐.
데미앙은 눈을 부릅뜨고 양손을 깍지를 껴 힘차게 곤봉의 앞으로 내밀었고, 그 손을 감싸던 오오라들이 섞여들며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직후,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대지와 공기를 뒤흔들었다.
팔크람은 이제 막 발견해낸 로카치오의 안부를 물어볼 새도 없이 반은 반사적으로, 반은 힘에 떠밀려 로카치오의 위로 엎어졌다. 그리고는 로카치오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사지를 웅크렸다.
처음은 소용돌이였다. 소용돌이는 곧 주변의 공기를 일단 쓸어 담았다. 응축된 힘이 한꺼번에 사방으로 쏟아져 나오며 빛과 어둠이 함께 섞인 기묘한 상태의 광선들을 사방으로 쏟아내며 거대한 압력과 뜨거운 열을 만들어냈다.
아비규환. 그 기운에 휩쓸린 자는 열에 구워지거나, 혹은 쓸려나가며 사지가 먼지처럼 분해되어 버리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상태를 만들어낸 카오스의 위력은 이루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지독했다. 그 힘은 둥그런 모양으로 반경을 점점 넓혀갔다.
데미앙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마력을 끌어모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더 큰 마력들이 융합되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런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이슨을 비롯한 성 안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며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때로는 용처럼, 때로는 나비같이 그 카오스 덩어리들이 대지를 유린하며 떠다니는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독한 외경과 죽음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기에.
데미앙은 깍지를 낀 손을 풀지 않은 채 계속 서 있었다고 생각했다. 융합된 혼돈의 힘, 카오스가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를 무로 환원해 가는 것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눈을 뜨지 않던 데미앙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 눈을 떴다.
그의 눈 앞에는 물질이라고 할 수도, 물질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어떤 것이 데미앙의 앞에 있었다. 감히 손조차 뻗을 수가 없을 정도의 압박감이 데미앙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데미앙은 입을 열었다.
"당신은....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