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운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사서 트럭에 싣고 있는 조나단 켄트에게 누군가가 차를 몰고 다가와 인사를 했다. “여어~ 별일 없지?”“그럼. 대런. 아무렴. 자넨 어떤가?”“조니가 저지르는 문제 빼면 뭐 별일 없다네. 녀석 때문에 이번 주에도 학교에 불려갔다 왔지 뭔가.”“조니가 또 뭘 했길래?”“제이미 콜린을 때렸어.”“저런.”“자네 아들 클라크가 몇 살이었지?”“열일곱 됐네.”“그렇구만. 하여간 자네도 조심하게. 그 나이때 애들은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마치 괴물 하나를 키우고 있는 것 같아. 내 부모님이 정말 존경스러워져.”“그래. 유념해두지.”“아, 그리고 얘기 들었나? 맥우드네 집.”“그 집은 맥우드가 다른 주로 떠나고 쭉 빈 집이었잖아. 그 집이 뭐가 어떻게 됐나?”“그게 며칠 전에 폭싹 무너졌다네. 마치 불도저가 밀어버린 것 같은데 주변엔 아무 흔적도 없었다지. 이상한 일이라고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어.”“그렇군......”“뭐 어쨌든, 서로 아들내미 잘 키우고 살자고.” 대런이 차를 몰고 떠난 후, 조나단은 트럭에 물건을 실으면서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될 일이었지만, 조나단의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짚이는 구석이 있었기에. 돌아온 조나단은 아내 마사에게 클라크가 헛간에 있다는 말을 듣고 헛간으로 들어갔다. 헛간에서 클라크는 바로 보이지 않았지만, 조나단은 클라크가 어디 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헛간의 지하로 통하는 바닥문을 들어올렸다. “들어가겠다.” 흙먼지와 지푸라기가 뿜어내는 냄새가 조나단의 코를 간지럽혔다. 들어간 지하에는 갓난아기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우주선 한 대가 캔버스 천에 덮여 놓여있었고, 그 뒤편에서 클라크는 팔짱에 고개를 묻고 주저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게냐?” 클라크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늘 똑같죠. 별 일 없어요.” 클라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별 일이 있다고 해도 별 일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또 네빌 패거리들이냐.” 조나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빌 패거리는 미식축구를 하는 애들로 네빌 매드슨이란 놈이 주축이 되어 있는 학교의 유명한 깡패 무리들이었다. “참느라 고생했구나.”“정말, 참기 힘들었어요.” 클라크는 격한 말투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냥 손가락으로 가슴을 푹 뚫어버리면 끝날 것 같았죠. 아니면 그냥 살짝 힘조절만 해서 발로 차버리던가. 그래도 골대를 넘어서 제이슨씨네 집까진 날아가겠죠. 그러면 모든게 끝날 것 같았어요. 그렇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잖니.”“아니까 더 미치겠어요!” 클라크는 아예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지만 조나단의 몸가짐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런 병신들을 상대하느라고 하루하루가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도대체 난 뭐죠? 아버지의 아들도 아니고, 지구인은 더더욱 아니고. 차라리 지구인이었으면 좋겠어요. 얻어터져서 아프면 차라리 그러려니 하고 엎드려 있겠지만......”“그만해라, 클라크.”“일곱 살 때 주사 맞으려다 주사바늘 구부러져서 학교에서 난리났던 거 기억하세요? 아홉 살 때는 모든 게 다 느껴지는 초능력 때문에 정신이 돌아버릴 뻔한 걸 어머니가 구해줬죠. 왜 난 이렇게 살아야 되죠? 왜 난....”“그만!” 조나단은 자신도 모르게 소릴 질렀다. 클라크는 조나단의 서슬에 급히 입을 다문 채로 조나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탈진이 온 것 마냥 조나단은 옆의 의자에 털썩 힘없이 앉았다. 물론 몸이 늙어서인 것은 아니었다. 클라크의 고민은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이었고, 자신은 그것을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 고민의 해결로 들어가면, 그건 어느 누구도 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조나단은 그것이 가슴 아픈 것이었다. “참기 힘들다는 걸 안단다. 힘을 써서 해결을 해보고도 싶겠지. 난 충분히 알고 있단다.”“아버지가, 알고 있다구요?”“나도 젊을 때는 한가닥 했지. 정의롭지 않은 것들과 싸우고 다니는 게 일과였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할 때마다 어떻게 됐는지 아니.” 조나단은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 운을 띄웠다. “나쁜 일은 더 나쁜 일을 부르고, 증오와 미움은 커지고, 끝내는 누구 하나가 완전히 불행해질 때까지 그 일이 계속되었단다. 우리들은 친구 하나를 무덤에 묻어야만 했지.” 조나단의 얘기는 그 때까지 클라크가 들어보지 못한 조나단의 과거 얘기였다. 하지만 클라크의 속에서는 아직도 잘 판단이 서지 않고 있었다. 클라크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네 힘은 다르다. 그 힘으로 누군가를 쉽게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그걸 어떻게 쓰느냐는 네게 달린 것이지. 그러나 적어도 이 세상의 인간들은 네가 어떤 뜻을 갖고 있건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란다. 네가 참아야 하는 건 그런 이유다. 넌 혼자야. 너를 외톨이로 만드는 별에서 살게 하고 싶진 않단다. 넌 그렇게 두려워하고 널 멀리하는 사람들보다는 분명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멋진 일을 하게 될 거야. 그 때까지 좋은 너 자신을 스스로 만드는 거야. 그러니, 잠깐만, 아주 잠깐만 참아두는 거라고 생각하자.” 조나단의 말에 클라크는 조금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미안해요. 전혀 모르겠어요.” 클라크는 그 말을 남기고 헛간 지하를 나서려고 계단에 올라섰다. 그 때 조나단이 한 마디를 더 꺼냈다. “한 가지만 묻자. 맥우드네 집. 네가 그런 거니?” 클라크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아무 대답 없이 헛간을 나갔다. 조나단은 클라크가 사라진 쪽을 계속 보고만 있었다. 클라크는 로커를 열었다. ‘얼빠진 클라크’‘파이퍼 고교 최고의 머저리’‘샌님’ ‘병신’이런 글자들과 오물로 그 안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누가 했는지는 뻔히 알고 있었다. 네빌 매드슨 네 패거리들. 클라크가 아무리 가만히 있어도 그놈들은 항상 하는 짓이 이랬다. 그 꼴을 본 순간, 들어서 내리치려던 주먹을 클라크는 천천히 문에 살짝 두들기듯 해야만 했다. 보는 눈도 많고, 무엇보다 로커를 부쉈다가는 아버지가 불려오기 때문이었다. 오물들을 끄집어내고, 클라크는 천천히 자신의 책들을 챙겼다. 책은 썩은 음식물 찌꺼기로 완전히 뒤덮혀 있었다. 그걸 어떻게든 털어내고 있으려니 누군가 클라크의 어깨를 툭 쳤다. “클라크 켄트, 맞지?”“넌 제시 로빈슨일테고.”“음.......” 제시는 클라크의 로커 안을 보면서 말했다. “얘기할 타이밍은 아닌 것 같네.”“왜, 뭐든 해봐. 이 꼴을 좀 잊어보게.”“너, 내일 댄스파티에 나랑 같이 가자.”“뭐?” 네빌 매드슨이 자기네 미식축구팀 패거리들과 함께 험악한 눈으로 저 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띄자, 클라크는 제시를 더욱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답은?”“너한텐 네빌이 있잖아. 치어리더들은 미식축구팀이랑 같이 가지 않아?”“솔직히 말하면, 네빌이 싫어서 그래. 네가 나 좀 구해주지 않을래?” 클라크는 네빌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네빌의 얼굴이 진짜 울그락불그락 변하는 것이 열이 한껏 받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클라크의 맘 속에서 불현듯 뭔가가 변했다. “그래, 가자.”“정말? 알았어. 우리 집은 로드빌 1409번지야. 몇 시에 데리러 올 거니?”“5시쯤 갈게.”“그래. 꼭이다?” “알았어.” 방과 후, 클라크는 서너 명에게 붙잡혀 차에서 끌려나왔다. 여느 시골에나 있음직한 차도 옆 술집의 뒤뜰이었다. 맨 마지막에 거들먹거리면서 내린 것은 네빌이었다. 클라크는 여러 놈들의 발차기에 바닥에 팽개쳐져 굴렀다. “제시가 너한테 뭐라고 하던.”“댄스파티에 같이 가자던데.” 네빌의 주먹이 날아왔다. 클라크에겐 그런 주먹 따윈 누가 매만지는 정도의 느낌조차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타이밍에 맞춰 고개를 돌리는 게 더 고역일 지경이었다. 또 살짜기 입안을 깨물어 피를 내주는 것도.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냐?”“파트너가 되어주겠다고 했지.” 다시 네빌의 주먹이 날아오려는 순간, 차가 한 대 급히 멈춰서면서 누군가가 큰 소릴 질렀다. “멈춰!” 조나단 켄트가 차에서 내려 씩씩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네빌은 들었던 주먹을 천천히 내리고 쓰러져 있던 클라크의 얼굴 위로 침을 뱉었다. 그 모습을 본 조나단 켄트의 눈빛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클라크는 볼 수 있었다. 네빌의 멱살을 순식간에 잡아채서 벽 쪽으로 밀어붙이는 조나단의 우직한 서슬에 남은 아이들은 말려볼 생각조차도 못하고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이 개자식아. 그딴 짓거리 계속 하고 다니다가는 아예 이 동네에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주지. 네 아버지 매킨지 매드슨한테 전해! 이 조나단 켄트가 화가 단단히 났다고!”“이거 놔요, 꼰대 아저씨!” 미식축구로 다져진 네빌의 몸뚱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멱살을 꽉 잡은 조나단의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애들이 말리려 하기도 전에 조나단은 멱살을 잡은 손을 휙 돌려 네빌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너 이 자식, 학교에서 보자.” 네빌은 주저앉은 클라크 쪽을 보며 그 한 마디를 중얼거렸고, 다시 따라가서 한 대 치기라도 하려는 듯한 조나단의 몸짓에 패거리들은 차를 몰고 도망치다시피 그 곳을 떠났다. “괜찮으냐?”“그럼요. 별거 없어요.” 클라크는 조나단의 손을 잡아 일어났다. 그렇게 무서운 조나단의 모습을 본 적이 없던 지라, 클라크도 역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조나단은 클라크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집에 가자꾸나.” 클라크는 차에 다시 올라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요근래, 조나단의 어깨는 어릴 적의 클라크가 보던 것처럼 크고 넓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클라크는 그 어깨를 다시 쳐다보고 있었다. 어릴 적에, 자신을 감싸안던 그 큰 어깨가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