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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혼란혼란 에타 똥테러 사건과 난리난 서울대
현재 서울대 에타는 유래없는 글리젠을 겪고있다. 과연 어떤 일이 터진걸까? 선요약) 음…. 시간에 따라 자세히 알아보자. 하루 정후보 의대 정책 관련 위원장 경력 고의적 누락 논란 점화(시그널 측에서 제보받아서 공론화)먼저 어느대학이나 그렇듯이 지금은 서울대의 총학생회 투표 시기이며 두개의 후보 (하루, 시그널)가 있다. 시그널은 하루의 정후보가 누락된 약력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엥? 약력 누락이 뭔상관이야? 할수있지만 하루 정후보는 이와 관련된 논란이 한번 일어났기 때문이다. 자세한건 밑 내용을 확인하자. https://m.dcinside.com/board/singlebungle1472/1533571 싱글벙글 휴학한 의대생이 총학회장으로 출마한 서울대 근황 ㄷㄷㄷ.jpg 싱글벙글 지구촌 마이너 갤러리실시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1학기 의대집단휴학에 동참한 의대생이 출마하여 논란이 됨 ㄷㄷㄷㄷ반발이 거세자 본인은 당선이 되어도 중립적인 스탠스를 유지할 것이라고 해명문을 내놓음그러나 해명문을 내놓은 지 3시간 m.dcinside.com 2. 에타가 끓어오름 걍 부글부글 끓었다. 에타가 이렇게 끓는거 첨봤다. 대통령 선거때도 이정도는 아니었음. 3. 하루측 입장문 3개, 모두 비판 받음 이에 하루의 정후보, 부후보, 선본장은 각각 입장문을 에타에 제시한다. 그러나 하나같이 비판 받는다. 마지막에 가린것은 시그널의 정후보이다. 마지막 선본장 글에서 충격적인 것은 “공식 입장문”에 상대 정후보의 이름을 OOO님, OOO씨가 아닌 OO이, OO한테 등을 썼다는 점이다. 걍 대통령이 공식 입장문 발표하는데 친하다고 “재명이가”, “재명이한테”라고 쓴 꼴이다. 4. 비판 여론 거세짐. 이는 서울대 에타 내 큰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하루 사퇴 지지글은 현재 1300추를 받았다. 지금까지 어떤 서울대 에타 글도 이렇게 많은 추천을 받은 적이 없다. 5. 불특정 다수의 똥 사진 테러 1⅓ 일요일 오전, 갑자기 불특정 다수가 에타에 똥 사진을 올리기 시작한다. 싱갤에서 보던 그 똥 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같은 날 오후까지 계속된다. 현재 똥짤은 모두 사라졌지만, 에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격먹었다. 6. 혼란과 음모론 서울대 에타 이용자들은 혼란을 겪는 동시에, 이는 하루 측이 논란이 되는 글을 똥짤로 밀자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퍼지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것이 똥짤이 계속 올라오니 에타의 하루 비판글도 똥짤에 밀려 내려가는듯 했기 때문이다. 7. 하루 시그널 선본 회의 진행 1¼ 월요일, 하루와 시그널 선본의 회의가 진행된다. 여기서 하루 측이 시그널이 에타 똥테러의 범인이라는 주장을 한다. 하루 측은 시그널에게 “ 8. 폰 열람 실패 후 “그야 재밌으니까” 발언 (해당 짤은 하루의 입장문) 하루 측은 시그널 측에 핸드폰의 에타와 SNS 계정 공개를 요청한다. 당연히 기각. 요청 사유는 “마지막 가는 길에 재밌는 일 하나 정도 하자” 9. 시그널 측의 위 사실 공론화, 이후 하루 선본장 사퇴 시그널은 이를 녹음•기록해 에타에 공론화 했고, 이에 하루의 선본장이 사퇴한다. 10. 서울대생들: ??????? 마지막으로 서울대 에타 반응 그러하다. 이 일은 현재진행형이다. 출처: 싱글벙글 지구촌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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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희대의 사기꾼 김찬경
1956년 12월 31일 ~ (67세) 대한민국의 사기 범죄자이며, 전직 금융인. 실제 학력은 신구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서울법대생이라고 사칭한 학력위조를 비롯해, 사기를 치기 위한 목적으로 저축은행을 인수하여 희대의 사기 행각을 저지른 악질적인 범죄자다. 2012년 5월 13일 기준으로 빼돌린 돈만 2,500억 원에 달한다. 미래저축은행의 CEO를 역임하다가, 부실경영으로 저축은행이 폐쇄되고 검찰의 조사가 다가오자, 회사 돈 200억 원을 빼돌린 후 조희팔처럼 중국으로 밀항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미래저축은행 시절, 투자한 골프장, 필리핀의 카지노 등은 김찬경 회장과 직,간접적인 관계에 있던 회사로, 자신의 회사에 은행돈을 대출시킨 후 부채의 부담을 국민에게 떠넘긴 악질적인 수법을 사용했다.2. 행적[편집]충청남도 아산시의 소작농 집안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다니면서 고학을 했다고 한다. 그 뒤 1980년대 초반부터 차츰 사기꾼의 싹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에서 논란이 되었던 '서울법대생 사칭 사건'의 장본인이다. 이하 서술하는 내용에는 김찬경과 같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강의를 들은 모 대학 법과대학 교수가 직접 강의 도중에 말해준 내용이 포함되었다. 1981년 군에서 제대한 후, 초졸 학력[2]으로 서울법대생을 사칭하면서 수업도 듣고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무척 성실하고 열심히 학과 활동을 도와서 이미지는 좋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당시 서울법대 분위기는 워낙 개인주의적으로, 사법시험 공부에만 전념하거나 일부가 운동권으로 투쟁을 하는 분위기였던 탓에 일반적인 학과 업무를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했으니, 적극적으로 솔선하던 김찬경이 좋게 보였을 법도 하다. 놀라운 것은 그런 와중에도 사법시험 공부를 해서 대학교 재학 중 1차 시험에 1문제 차이로 떨어졌다고 주장했지만[3], 1차 평균점수는 26점이라는 기사가 있다## 지금 사법시험과 그 때 사법시험의 위상과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지만[4], 이후 "사법시험 대신 취업을 하겠다"고 동문들에게 말했는데, 이때는 다들 격려해줬다고 한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도 속여서 1984년 결혼식에는 서울대 법대 교수가 주례[5]를 섰다. 놀랍게도 졸업사진까지 찍었으나, 이 과정에서 졸업앨범에 들어가는 주소를 안 적어 냈는데 학과 사무실이 이를 대신 기입해 주려다가, 학적부 명부에 없어서 가짜 학생이라는게 밝혀졌다[6]. 이게 당시 언론에서 논란이 되었던 일명 '서울법대생 사칭사건'이다. 이 사건을 각색한 소설이 나왔다. 이런 학력위조 사기행각을 벌였음에도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사실 법적으로 처벌할 건덕지도 마땅치 않았다고 한다. 잘해야 혼인 등 민법적인 부분이며, 형법적인 부분으로 걸고 넘어질 부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허위학력으로 취업하려고 한다면 모를까, 그 시점에는 게다가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기에 졸업앨범 때문에 걸린 후에도 그냥 묻고 넘어가려고 하기까지 했다. 대우그룹에서 서연고 졸업자에 한해, 면접만 보고 합격시키는 전형에 응시했으나 실패했다. 더 웃긴 것은 이렇게 개망신을 당하고도 서울법대 동문회에는 버젓이 계속 참석했다는 점이다. 진짜 동문들은 떨떠름했으나, 실제로 학과생활을 이끌어 준 인물이라 이미지도 좋았고 교우관계도 대단했으며, 사실 굳이 쫓아내 봐야 이득도 없고, 마당발 재력가가 동문회에 있으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 그냥 용인한 듯하다. 이 정도로 낯이 두꺼워서인지, 아예 이 거짓 신분으로 병원 이사장 딸인 이대 학생과 결혼했다. 이 딸은 동기(?) 서울법대생이 소개해 준 사촌동생이었다고 한다. 사기 사건이 터졌을 때는 이미 임신 7개월이라서 이혼도 못 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집안에서는 당연히 이혼하라고 난리였지만, 임신도 하고 해서 곤란했던 듯하다. 이혼은 나중에 했다. 김찬경은 처가에서 돈을 빌려 사업 여러 개를 했으나 실패했고, 마침내 채석장 사업을 벌여 겨우 성공했다. 이 돈을 바탕으로 서울 테헤란로 일대에 빌딩을 사서 수백억대의 자산가가 되었으나, IMF 때 망했다. 이후 금융업에 눈을 돌렸는데, IMF 때 망한 상호신용금고를 헐값에 사들여 금융업에 진출했다. 이런 사기꾼이 금융계 인사를 자처했으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사기에는 천부적 소질이 있었는데, 제3자를 내세워 자신이 소유한 미래저축은행으로부터 1,500억 원 정도의 불법 대출을 결정하고, 충남에 골프장 겸 온천 리조트[7]를 만들어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이 리조트의 시가는 2,000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문적인 금융계 인사가 아닌 사기꾼이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는지, 미래저축은행은 부실한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등을 이유로 예금주들에게 고소당했다. 이렇게 명백한 사기뿐만 아니라 부실경영으로 저축은행들은 결국 2012년 5월 퇴출 대상에 올랐고, 이렇게 경영을 부실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사기로 고객의 돈을 빼돌린 대출은행 경영진들은 법적 처벌을 받게 되었다. 결국 경찰에 의해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되자, 김찬경은 회사 돈 200억을 빼돌려 경기도 화성시에서 밀항까지 시도했으나 결국 체포되었다.#[8] 이때 검사 출신 곽상도 변호사가 변호를 맡아서 나중에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 임명 시 논란이 되었다. 결국 미래저축은행은 일본 J TRUST에 인수되었고 이것이 현재의 JT친애저축은행이 된다. 체포된 후, 필리핀에 카지노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270억 원을 횡령한 것과 회장 자신이 신용 불량자라는 것이 추가로 드러났다. 거기다 비자금 56억 원을 차떼기로 빼돌리다, 차량절도단에 의해 가볍게 도난당해 충남 아산경찰소에 다른 사람 명의로 액수를 대폭 줄여 도난신고를 넣는 짓까지 한 것이 드러났다. 참고로 돈을 훔쳐간 도둑은 "어차피 뒷돈인 거 다 아니까 신고 제대로 못 넣을 거"라며 대놓고 먹겠다고 배짱을 부렸다. 또 그의 아들이 2011년 6월 5일 오전 3시에 관악구청 소속 공익근무요원 신분으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벤츠 승용차를 혈중알코올농도 0.137% 만취상태로 마구 몰다가 차량 6~7대를 들이받아 6명이 크게 다치기도 했다. 참고로 체포한 경찰 쪽에서 그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검찰에서 기각했다.[9] # 아들은 결혼하여 서울 동작구에 거주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더욱 나쁜 것은 이렇게 사기로 모은 재산을 사적 보복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소작을 부쳐먹던 지주의 아들이 급전이 필요하자, 김찬경은 그 지주 소유인 아산 외암민속마을의 건재고택[10]을 담보로 70억 원을 빌려줬다.# 이후 채무자가 빚을 못 갚자 그 집을 차지했고[11], 이 때문에 채무자는 자살했다. 이렇게 차지한 그 집에서 연회를 열면서 정관계 인사들에 대한 로비를 했다.# 학력 컴플렉스가 대단했는지, 서울법대의 최고지도자과정(advanced Law Program, ALP)을 10기생으로 수료한 사실이 드러났다.[12] 그나마 김찬경은 수업에 한두 번 들어왔을 뿐인데, 골프 모임은 맨날 나왔다고 한다. 한 번은 충청남도 아산시의 자신의 골프장에 동기생들을 초대하는 등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고, 인맥 만드는 데는 열심이었다고 한다. 사실 원래 최고지도자과정이나 최고경영자과정은 수업은 별 의미 없고 같이 술 마시고 인맥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2013년 1월 25일 1심에서 징역 9년이 선고됐다. # 그러나 2013년 12월 27일 항소심에서는 징역 8년으로 감형됐다. # 그 뒤 2014년 대법원에서 징역 8년이 확정되어 복역했다. 복역 중에 내연녀의 자살 소식을 듣고, 본인도 복역 중에 자살 시도를 했다. 그러나 2건의 혐의가 추가되어, 2020년까지인 복역 기간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 [1] 김찬경과 동향인 고등학교 교사의 말에 따르면, 사기 행각이 발각되기 이전에는 매번 마을 모임 때마다 내려와서 서울에서 성공한 기업가로 상당히 재력을 과시했다고 한다.[2] 중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고 한다.[3] 공시생 항목에도 나와 있듯 ‘아깝게 한 문제 차이로 떨어졌어요’ 하는 게 그들이 가장 즐겨하는 거짓말이다.[4] 과거와 현재의 시험 난이도를 비교하면 현재가 압도적으로 높다.[5] 당시 김찬경 결혼식의 주례를 맡았던 해당 교수는 이 사건 이후 격노했고, 다시는 제자들의 주례를 서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위에 링크된 한겨레21 기사 참조).[6] 사실 마음만 먹으면 가짜 학생도 졸업앨범에 들어가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졸업앨범은 많은 대학에서 대체로 총학생회 주관이기 때문에 학적을 엄격히 검증하지도 않는다. 다른 기사에 따르면, 졸업앨범에 얼굴이 없어서였다고 한다. # (그러나 졸업앨범에 김찬경 회장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유튜브 아이콘 석동현 전 검사의 사례.[7] 원래 김찬경의 꿈이었다고 한다. 개인 자산 500억+대출로 골프장을 지어 은퇴후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골프장 이름은 '아름다운CC'. 돈 들인 건 한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이 들였다. 그런데 정작 시설은 왠지 돈 들인 티가 안 난다고 한다.[8] 이 과정에서 낌새를 눈치챈 담당 직원이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방법으로 협조하지 않으며 막으려 했으나, 은행에 인감도장을 들고가 비밀번호를 바꾸는 바람에 그대로 출금되었다. 우리은행 총 예금금액은 250억 원이었으나, 뱅크런 사태를 우려한 담당직원이 50억을 인출하여 저축은행에 보관하고 있어서 빼돌리지 못하게 되자, 담당 직원을 그 자리에서 해고했다고 한다.[9] 교도소에서 1년 살면 출소 후 그대로 잔여 기간을 복무해야 하며, 2년 살면 면제다. 별로 이득 될 건 없다.[10] 이 집은 중요민속문화재이다.[11] 법적으로는 잘못이 아니지만, 은행에서도 담보를 바로 차압하는 게 아니라 채무자에게 몇 번의 기회를 준다.[12] 1학기 과정이지만 학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즉 문화센터의 명사 강연과 마찬가지이다. 1주일 1회 1시간 정도 수업하며 여기 졸업하면 서울대 동문 자격을 준다고 해서 저렇게 학벌에 목이 마른 정관계 인사들이 비싼 수업료(한 학기 500만 원)를 내고 들어온다. 이 수업료는 학과의 재정으로 쓰인다. 돈 많은 사장, 회장들은 이런 곳이 인맥 쌓는 곳으로도 좋기 때문에 참가하려고 안달이다. 여기 강연하는 교수에 따르면, 교수인 자신은 중형차 타고 오는데 학생들이 벤츠 S600, BMW 7시리즈, 아우디 A8, 에쿠스 같은 고급차만 타고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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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명분없는 축협 사면
축협 : 승부조작 42명 + 그 이외에 합쳐서 100명 사면하자K리그 연맹 : ???????? 미쳤음????????축협 : ㅇㅇ 사면 할꺼임K리그 연맹: 우린 반대임축협 : ㅇㅇ 사면 할꺼임 K리그 연맹: 표결로 정하자축협 : ㅇㅇ 사면 할꺼임K리그 연맹: ??????????????????축협 : 이미 기사 냈음 ------------------------------- 회장정몽규(1962年生)고려대학교영국 옥스퍼드대 정치, 철학, 경제학 석사현 부산 아이파크 축구단 구단주현 대한체육회 부회장전 동아시아축구연맹 회장전 현대산업개발 회장전 FIFA 평의회 위원전 AFC 부회장, 심판위원장, 집행위원전 2017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장2016 리우올림픽 한국 선수단장전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전 울산현대 및 전북현대 축구단 구단주전 현대자동차 회장 부회장김기홍(1959年生)성균관대학교 행정학 학사동국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 석사동국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 박사현 법무법인(유) 율촌 상임고문대한체육회 특별보좌역전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 상근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전 문화체육관광부 관광국장/ 체육국장 /미디어정책국장 부회장조병득(1958年生)서울체고, 명지대학교현 대한축구협회 축구사랑나눔재단 이사장전 대한축구협회 대회위원장전 올림픽대표팀 코치(1995년 ~ 1996년)전 국가대표 선수(1979년 ~ 1989년) 부회장최영일(1966年生)동아대학교전 동아대학교 축구부 감독전 국가대표 선수(1994~1998) 부회장이석재(1958年生)현 경기도 축구협회장전 이천시 축구협회장 부회장이영표(1977年生)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전 강원FC 대표이사전 KBS 축구해설 위원전 국가대표 선수(1999~2011) 부회장홍은아(1980年生)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과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경영학)Loughborough 대학교 대학원 박사(스포츠 정책)현 이화여대 체육과학부 부교수현 FIFA 심판 테크니컬 강사현 AFC 엘리트 심판강사, 심판평가관, 심판분과위원회 위원전 FIFA U20 여자월드컵 조직분과위원회 위원FIFA U20 여자월드컵/ 베이징올림픽/ 런던올림픽/ 잉글랜드 여자FA컵 결승 주심 부회장이동국(1979年生)포항제철고, 위덕대학교TV 축구 해설위원전 포항스틸러스, 브레멘, 미들즈브러, 전북현대 선수전 국가대표 선수(1998년 ~ 2017년) 전무이사박경훈(1961年生)한양대학교 체육학과계명대학교 석사목포대학교 박사전 성남FC감독전 제주유나이티드감독전 전주대학교 축구학과 교수전 축구국가대표 선수(1981~1990) 대회위원장정해성(1958年生)중앙고, 고려대학교전 전남드래곤즈,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전 국가대표팀 코치(1998년 ~ 2000년, 2008년 ~ 2010년)전 럭키금성 선수 기술발전위원장이임생(1971年生)부평고, 고려대학교현 대한축구협회 지도자 강사전 수원삼성 감독전 국가대표 선수(1992년 ~ 2002년)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장마이클 뮐러(1965年生, 독일)쾰른 독일체육대학교 체육교육과현 대한축구협회 지도자교육 강사전 대한축구협회 기술발전위원장전 독일축구협회 전임지도자강사전 독일남자15세 및 18세 대표팀 코치전 독일남자21세 대표팀 스카우트전 독일축구협회 유스프로그램 총괄전 SV Darmstadt 98 코치전 UEFA P라이선스 취득 심판위원장김동진(1973年生)경북대학교현 안동과학대 축구학과 교수현 AFC 엘리트 심판강사전 프로심판, 국제심판 의무위원장서동원(1963年生)고려대학교 의학과현 바른세상병원 병원장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정형외과 외래교수전 대한축구협회 의무분과 위원전 대한체육회 의무위원 공정위원장서창희(1963年生)서울대학교 법학과현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장검사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윤리위원장유대우(1952年生)육군사관학교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전 육군협회 사무총장전 육군대학 총장전 국군체육부대(상무) 참모단장 사회공헌위원장조원희(1983年生)배재고등학교현 TV 축구 해설위원전 울산현대, 수원삼성, 위건, 수원FC 선수전 국가대표 선수(2005년 ~ 2009년) 이사박기찬(1959年生)경기대학교 토목공학 박사현 현암건설산업㈜ 대표이사현 서울용산구 축구연합회 회장현 용산복지재단 이사 이사한상신(1961年生)국민대학교전 이리동중학교 감독전 한국중등연맹 전무이사 이사양승운(1962年生)광운대학교현 광운공고 축구부 감독전 서울시 축구협회 전무이사전 남대문중학교 축구부 감독 이사박공원(1966年生)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과일본 중경대학교 석사영국 브링톤대학교 박사전 안산 그리너스 FC 단장전 서울이랜드 FC 단장전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 이사최광원(1966年生)충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현 대동초등학교 축구부 감독전 삼전초등학교 축구부 코치전 송정초등학교 축구부 코치 이사조연상(1967年生)한국외국어대 서양어대현 한국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전 LG스포츠 마케팅및 홍보팀장전 LG CNS 통신미디어사업부 디지털스페이스팀장 이사정재권(1970年生)부산상고, 한양대학교현 한양대 감독전 부산대우, 포항스틸러스 선수전 국가대표 선수(1992년 ~ 1997년) 이사박건하(1971年生)경희대학교 체육학과전 수원 삼성 감독전 상해선화 수석코치전 이랜드FC 감독전 국가대표팀 코치(2013~2014)전 국가대표 선수(1996 ~ 1998) 이사박채희(1973年生)한국체육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at UC 박사현 한국체육대학 노인체육복지학과장현 여성체육학회 총무이사 이사김진희(1981年生)울산과학대학 사회체육학과현 대한축구협회 경기감독관전 축구국가대표 선수(1998~2008) 이사신아영(1987年生)하버드 대학교 역사학과현 국립생태원 홍보대사전 서울교통공사 홍보대사 사무총장전한진(1970年生)연세대학교동아시아축구연맹 부회장대한축구협회 직원(1997년 - 2017년)AFC 경기위원(2013년 - 현재)2006, 2010, 2014 월드컵 대표팀 행정지원총괄 회계감사이태호(1961年生)연세대학교서울대학교 석사현 삼일회계법인 고문현 건국대학교 겸임교수현 국민연금 대체투자위원회 위원 행정감사손호영(1965年生)동양대학교 경영학교 졸업경운대학교 산업정보대학원 경영학 석사현 ㈜한국종합통신 / 대표이사현 경상북도축구협회 회장현 안동시 주민자치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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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상담] [절친사연]청원요청 드릴려고 합니다. 청원가입이 되어있다면, 동의해주세요.
먼저 청원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국민동의청원 > 동의진행 청원 > 폐암 치료제 ‘타그리소’의 1차 치료급여 요청에 관한 청원 (assembly.go.kr)https://petitions.assembly.go.kr/status/onGoing/F10357A85C79618EE054B49691C1987F 감히, 회원가입해서 동의해달라고 부탁하기 너무나 어려워요.만약에 형님들, 회원가입이 되어 있다면 동의해줘요. 동의수가 얼마 안남아서, 조금만 힘을 보태주세요.제가 직업이 개발자라서 “클리앙”에도 친구가 올렸는데…짱공유 형님들이 이제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어느날, 아이들과 공원에서 공을 차고 놀다가, “다리 아파~~~”별거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가, 꾀 오랜시간이 지나도 차도가 없길래, 그래도 대충, 인터넷으로 보고 고관절이 아퍼서 그동안 고관절 염증 인줄 알았어요. 집앞에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만 다니며 나아지겠지 하며 다녔는데 통증이 오래간다고 이상하다며 의뢰서를 주셔서 큰병원에 가보라는 거에요. 별문제 있겠나 싶어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교수님이 바로 휠체어에 타고 조영제를 넣고 찍어보자고 하시더니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종양이 있다는것 이였어요... 어디서엔가 부터 옮겨온 전이성 암 같다는 믿기지 않는 말씀을 하셨어요. 어딘가 암이 또 있다는 거지요....(알고보니 폐암이 있었어요.) 와이프가 하루아침에 암환자래요. 암세포가 뼈를 갉아 먹어서, 곧 부러질거 같다며 긴급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지 구제술 수술도 했어요. 고관절 치환술이 아니라 더 크게 허벅지 뼈까지 잘라내는 큰 수술이였어요.일어나지도 못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다가 지금은 재활치료 중이에요. 여러가지 많은 검사를 하고 결과를 들었더니 폐암이고 폐에 있는 암이 여기저기 뼈에 조금씩 들러붙어 있다네요. 와이프는 지극히 건강도 많이생각하는 스탈이라 술도, 담배도 하지않는사람이구요 저도 술담배는 하지않아요... 1년전 했던 국가건강검진에서 아무런 이상소견도 없었구요 최근에도 약간의 고관절통증, 가끔씩 미열 외에는 어떤 증상도 없었습니다 폐암이 걸릴 소지도 없는데 걸린 이런경우엔 세포돌연변이가 생겨서 그렇다네요. 검사결과 돌연변이에 맞는 표적항암제로 치료를 하는데 비보험(타그리소)이라 많이비싸네요... (타그리소는 교수님이 저희 같은 경우 가능하면 1차로 사용하는 것이 권장 사항이라고 하셨어요.) 와이프는 전업주부라 돈벌 능력도 없는데 돈 먹는 하마가 되었다고 오열하고 있어요. 한푼이라도 아끼며 아이한테 좋은 미래를 주기위해 학원도 안보내고 집에서 책을 사서 스스로 교육하던 사람입니다. 딸아이는 장모님이 보살펴 주시고 계세요. 좀 있으면 유치원졸업식, 초등학교입학식인데 못갈 것 같네요. 저는 돈걱정하지말라고 했는데요... 솔직히 월 700만원 이라는 금액이 쉽지만은 않네요...회원분들이 동의를 좀 해주시면 혹시나 치료비에 도움되지않을까 올려봐요지나치지않고 동의 꼭 좀 부탁드려요.... 혹시나 믿기지않으시면 험한말 댓글로 남기지마시고 지나쳐주세요 지금상황에서 비난까지받음 정신적으로 힘들것같아요 ㅠㅠ
오빠짱~작성일 2023-02-26추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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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한국사 제대로 밝혀라" - 허성도 교수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2010년 6월 17일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왜?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한자) 쓰는 사람만 다냐, 글(한자)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그럼 와서 북을 쳐라’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 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擊)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구나’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거대하고)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거대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거대한)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양을 보냈습니다.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보지 마시옵소서.’‘왜, 그런가.’‘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마마, 보지 마시옵소서.’‘왜, 그런가.’‘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 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관찰사가 못 보는데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조선시대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세종이 말을 합니다.‘왜 이런 일이 나는가?’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그)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갑지(甲地)와 을지(乙地)는 동일한 자오진선(子午眞線)에 있다.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자오선(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자오진선(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갑지(甲地)와 을지(乙地)는 동일한 자오선상(子午線上)에 있다.갑지(甲地)는 북극출지(北極出地), 북극출지(北極出地)는 위도(緯度)라는 뜻입니다. 갑지(甲地)는 위도(緯度) 37도에 있고 을지(乙地)는 위도(緯度) 36도 30분에 있다. 갑지(甲地)에서 을지(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 : 북소리)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 종소리)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리수(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라)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명산과입니다. 밝을 명(明)자, 계산할 산(算)자, 과(科).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서울대학교 |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snu.ac.kr)
비타민D작성일 2022-05-27추천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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