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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국민 깔본 독재자 최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유신의 몰락,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김재규가 거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때는 언제인가.
서중석 : 김재규가 언제 거사를 결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부산 항쟁 직후인 1979년 10월 18일 오후 청와대 회동 때였을 수도 있고 그 이후인 23일이나 24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김재규는 대행사가 있을 때 거사하겠다는 생각을 이때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판단된다.
궁정동에서 있었던 이 행사라고 하는 것에는 소행사와 대행사가 있었다. 소행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여자와 단둘이 만나는 걸 가리키고 대행사는 여자 두어 사람에다가 비서실장,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이 배석한다고 할까, 자리를 같이한 것을 말한다.
이런 행사는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일 때 시작은 됐다고 한다. 육영수가 죽기 전부터 이런 행사가 있었던 것인데, 보안 유지를 위해 궁정동 안가에서 행사를 열게 됐다고 한다. 보안 유지라는 건 박정희가 압구정동 같은 곳에 은밀히 가는 것 때문에 이런저런 말이 생기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한 것일 터이다.
대행사의 날, 거사 계획한 김재규
프레시안 : 10·26 그날 상황을 짚었으면 한다. 김재규는 그날 어떻게 행동했나.
서중석 : 10월 26일과 관련해서는 참 많은 글이 있는데 여기서는 김재홍의 책과 조갑제의 책, 이 두 가지를 많이 활용하려고 한다. 그날 오후 2시 김재규는 얼마 전에 귀국한 재미 동포를 남산의 중앙정보부장 사무실에서 만났는데, 아주 초조한 모습에 표정이 굳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날쯤 대행사가 있을 것으로 김재규가 추측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4시경 차지철로부터 전화가 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차지철이 전화해서 '있다'라고만 얘기하면 그것으로써 알 수 있게 돼 있었다고 한다.
이 전화를 받은 후 김재규는 오후 4시 15분에서 30분 사이에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김정섭 중앙정보부 차장보한테 전화해서 궁정동으로 오라고 했다. 김재규가 대행사 때 거사하려고 했다는 점을 이걸 통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오후 4시에 전화를 받고 나서 몇 분 동안 어떠어떠한 식으로 일을 처리할 건가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바로 오후 4시 15분경에 전화하지 않았을까 싶다. 김재규가 궁정동에 도착한 시간은,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오기는 하지만, 오후 4시 반경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김재규는 도착하자마자 총기를 꺼내 잘 작동되는가를 시험했다. 그러고 나서 오후 5시 넘어서 비서실장 김계원이 왔다고 한다.
프레시안 : 운명의 날, 박정희는 어떻게 움직였나.
서중석 : 박정희는 이날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김재규가 '나도 가고 싶다'고 차지철한테 얘기했는데, 차지철이 못 오게 했다. 대통령 일행은 준공식에 참석한 후 아산에 있는 도고 온천 관광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 호텔에서 사육하던 노루가 헬기 프로펠러 소리에 놀라서 뛰다가 뭔가에 부딪혀 즉사했다. 이것에 대해 한 기자는 불길하다고 썼다.
삽교천 행사를 마치고 도고 온천 쪽으로 가기 전 대통령은 KBS 송신소에 들렀는데,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김성진 문공부 장관이 이때 수행했다. 김성진은 여기서 박정희가 너무 힘이 없어 보였고 얼굴에 죽음의 사자가 머물고 있는 듯했다고 했다. 이 무렵 정치건 경제건 다른 문제건 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날 박정희는 전날(25일) 청와대 새마을 담당 특보라고도 불리고 농촌 담당 특보라고도 불린 박진환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을 수도 있다.
부마항쟁 후 성찰하기는커녕 국민 깔보고 야당 탓만 한 박정희
▲ 10·26을 소재로 한 영화 . ⓒMK픽처스
프레시안 : 박진환과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서중석 : 박정희가 박진환을 부르더니만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번 사태라는 건 부마항쟁을 말한다. 박진환 고향이 마산이기 때문에 그걸 물어본 것이었다. 박진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민심이 떠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국민들이 새마을운동에도 옛날처럼 열을 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방 관리들이 올리는 새마을 관계 보고나 통계도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뭔가 헛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12월 초에 장충체육관에서 열 새마을 지도자 대회도 박수만 요란하지 김이 빠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박정희로서는 참 김빠지는 얘기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더 힘이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튼 박정희는 차지철과 함께 이날 오후 6시 5분경 궁정동에 왔다. 그러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이 얘기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가 신민당 일은 어떠냐고 물어보니까 김재규는 "공화당이 발표했기 때문에", 이건 김영삼 제명에 반발해 야당 의원들이 일제히 낸 의원직 사퇴서를 선별 수리하는 쪽으로 논의가 이뤄졌다고 여권에서 발표한 걸 가리키는데, "다 틀렸습니다. 암만 해도 당분간 정(운갑) 대행 (체제) 출범이 어렵겠습니다. 주류들이 강경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습니다", 이렇게 답했다. 그러자 차지철이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이어서 박정희가 이렇게 얘기했다. "부산 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해서 하는 일인데 괜히들 놀라가지고 야단이야. (…) 부산 데모만 하더라도 식당 보이나 똘마니들이 많지 않아.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 수리하느니 뭐니 알겠는가. 신민당이 계획한 일인데도 괜히 개각이니 뭐니 국회의장을 사퇴시켜야 한다느니 하면서…. 중앙정보부는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여기서 "신민당이 계획한 일"이라는 건 신민당이 부산 항쟁의 배후라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도 1960년 4월혁명 때 똑같은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나. 장면과 민주당이 봉기를 선동했다는,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이승만이 강변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프레시안 : 최고 권력자의 오만함과 그 충복의 무지막지함이 다시 적나라하게 드러난 대화다. 그 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두 여자, 즉 가수 심수봉하고 신모 씨인데 이 사람들이 오후 6시 50분경 술자리에 들어섰다.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다음에 차지철을 지명하자 차지철이 '도라지', '나그네 설움'을 불렀다고 한다.
그 무렵 김재규는 방을 나섰다. 연회장을 떠나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과 김정섭 차장보가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2층에 가서 준비된 권총을 갖고 나온 다음에 박선호 의전과장, 박흥주 수행 비서관을 세워놓고 '오늘 저녁에 해치우겠다. 방 안에서 총소리가 나면 나를 도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고 얘기했다. 자신이 가장 믿는 두 사람한테 구체적인 얘기를 처음으로 한 것이다. "각하까지 포함됩니까?" 박선호가 묻자 김재규는 물론 그렇다고 답했다. 박선호는 '경호원이 7명이나 된다. 다음으로 미루는 게 어떻겠느냐'고 얘기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안 된다. 오늘 저녁에 내가 결행한다. 나는 모든 준비를 하고 나와 있다'고 말했다. 사전에, 그러니까 여러 날 전에 결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총으로 권력 움켜쥔 박정희의 18년, 부하의 총에 막을 내리다
프레시안 : 거사의 순간, 상황은 어떠했나. 박정희 최후의 대화 내용도 궁금하다.
서중석 : 김재규는 다시 대행사장으로 갔다. 이때는 다들 윗도리를 벗고 있었다고 하는데, 박정희가 "김영삼이를 구속 기소하라고 했는데 유혁인이가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좋지 않아"라고 얘기했다. 이때 유혁인은 정무수석이었다. (유혁인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유신 체제에서 6년간 정무수석을 지냈다. 유석춘 연세대 교수의 아버지이자,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최금락의 장인이다. '편집자') 그러자 김재규가 "김영삼 총재는 이미 국회의원으로서 면직됐습니다. 사법 조치는 아니지만 이미 그것으로써 본인을 처벌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을 또 사법 조치까지 하면 일반 국민들한테 같은 건으로 이중 처벌을 하는 인상을 줍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중앙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딱딱 입건해야지"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정치는 대국적으로 상대방에게도 구실을 주고 국회에 나오라고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차지철이 "신민당 놈들, 그만두고 싶은 놈은 한 놈도 없습니다. 언론을 타고 반정부적인 놈들이 선동해서 그러는 거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 자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때 김재규가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오른쪽에 앉아 있던 김계원을 탁 치며 "각하를 똑똑히 모시시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차지철을 쳐다보면서 "버러지 같은 친구"라고 하고는 총을 쐈다. 이어서 박정희에게도 총을 쐈다.
그런데 김재규 총에 맞긴 했지만 치명상을 입진 않았던 차지철이 화장실로 도망갔다. 김재규가 다시 차지철한테 총을 쏘려고 했지만 탄피가 잘 빠지지 않았다. 김재규는 바깥으로 막 뛰어가서 박선호 총을 뺏었다. 그걸 갖고 다시 들어온 김재규는 문갑 뒤에 숨어 있는 차지철한테 총을 쐈다. 그러고 나서 박정희를 확인 사살했다.
프레시안 : 총으로 권력을 움켜쥔 박정희의 독재는 그렇게 부하의 총에 막을 내렸다. 그 후 김재규는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김재규는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거기서 김계원과 마주쳤다. 김계원은 김재규가 총을 쏘기 시작한 후 행사장 밖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김재규는 김계원한테 "이제 혁명은 끝났으니까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시오", 이렇게 말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하지만 "혁명은 끝났으니까",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라고만 얘기했을 것 같은데, 하여튼 그렇게 얘기했다고 나온다. 그때 김재규는 굉장히 다급했기 때문에 맨발에 와이셔츠 바람이었다. 신발도 못 찾아 신은 것이다.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하고 김정섭 차장보가 있는 곳으로 급히 가서, 큰일이 났으니까 빨리 차에 타라고 얘기했다. 정승화하고 김정섭, 김재규가 뒷좌석에 앉고 앞좌석에는 박흥주가 탔다. 차는 남산 쪽을 향하고 있었다. 정승화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김재규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세운 다음 밑으로 뒤집는 시늉을 했다. 정승화가 다시 물었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김재규는 "적이 알면 큰일입니다", 이렇게 답했다.
차가 삼일 고가 도로 쪽으로 달리고 있을 때 정승화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중앙정보부로 가고 있다고 김재규가 얘기하자 정승화는 "육본으로 갑시다"라고 얘기했다. 이건 육본 벙커를 가리킨다. 김재규는 망설였다. 그때 박흥주가 "육본으로 가지요"라고 하면서 차는 육본으로 향해 밤 8시 5분경 육본 벙커에 도착했다.
숨 가쁘게 돌아간 10·26의 기나긴 밤
ⓒ오월의봄
프레시안 : 김재규가 이때 육본이 아니라 중앙정보부로 갔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남산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간 게 치명적인 실수 아니냐는 얘긴데, 옛날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게 본다. 김재규는 거사 얘기를 사전에 남산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믿는, 아주 가까운 몇몇 부하를 동원할 수는 있었지만 중앙정보부라는 거대 조직을 활용해서 거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산에 갔더라도 반드시 상황이 김재규에게 유리하게 전개됐을 것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또 남산은 육본하고 달라서 전국에 있는 군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군 지휘관들을 소집할 수 있는 건 역시 육본 벙커에서 가능하지 않았겠나.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남산에 갔다고 하더라도 김재규가 성공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육본 벙커에 도착한 후 정승화는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해군 참모총장, 공군 참모총장, 연합사 부사령관 같은 사람들한테 벙커로 빨리 오라고 전화를 했다. 그와 별개로, 총에 맞은 대통령을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청와대로 간 김계원도 주요 각료 등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맨 먼저 최규하 총리가 왔고 장관들도 연이어 도착했다. 그 후 육본 벙커에 있는 김재규하고 청와대에 있는 김계원이 통화를 하는데, 서로 자기 쪽으로 오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계원 비서실장이 최규하 총리한테 "육본 벙커로 가시죠"라고 해가지고 장관들과 함께 밤 9시 30분쯤 육본 벙커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때까지 최규하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대통령한테 그런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몰랐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최규하 총리가 도착하자 김계원이 바로 보고했다. 총리한테는 얘기를 해야 한다고 봤던 건데, "김재규가 잘못 쏜 총탄에", 잘못 쐈다고 한 게 눈에 띄는데, "각하가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런데도 최규하 총리는 못 들은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이건 사람이 신중하다는 것보다도 권력이 어느 쪽으로 쏠릴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다.
국무회의가 26일 밤 11시 50분경 국방부에서 열렸는데 이때도 최규하 총리는 대통령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이렇게만 얘기한 것이다. 그때까지도 다수의 국무위원들은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10분간 정회하자고 했고, 최규하 총리하고 신현확 부총리 등이 대통령 유해가 안치된 국군 서울 지구 병원에 갔다 온 뒤 국무회의가 속개됐다. 그 자리에서 비상 계엄 선포를 의결했는데,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비상 계엄을 선포했다.
프레시안 : 제주도는 왜 뺀 것인가.
서중석 : 왜 제주도를 제외했느냐 하면, 전국을 계엄 지역으로 선포하면 모든 행정 권한이 계엄사령관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계엄사령관, 즉 육군 참모총장이 국방부 장관의 지휘 감독을 받을 수 있도록 제주도를 제외한 것이다. 비상 국무회의가 이렇게 계엄을 선포하고 끝난 때는 27일 새벽 3시 45분경이었다.
그러면 김재규는 언제 체포됐느냐. 26일 밤 11시 30분경 김계원은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걸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한테 은밀히 얘기했다. 밤 11시 40분경 육군 참모총장은 보안사령관하고 헌병감한테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27일 0시 30분이 조금 지난 때에 김재규를 유인해서 체포했다.
28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11월 3일에는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이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국장으로 치러졌는데, 해방 후 최고 권력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국장을 치른 건 이때가 처음이다. (이승만은 가족장(1965년), 장면은 국민장(1966년)으로 장례를 치렀다. '편집자') 미국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국무부 장관을 보냈다. 제2기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1978년 12월 27일)에 특사를 보내지 않았던 일본은 이때도 정부 인사를 안 보냈다. 다만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이 왔는데, 짙은 안개 때문에 김포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회항했다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영결식에 참석하지는 못했다.
11월 6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은 박정희 대통령 살해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일부에서는 시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난 시해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본다.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김재규 등 5명의 사형을 확정했다. 그로부터 나흘 후인 5월 24일, 김재규 등 5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전두환·신군부의 바람과 달리 상고 기각 결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법원 형사 3부에서 이 사건을 맡았으나 의견이 엇갈려 최종적으로 전원 합의체에서 다루게 된다. 그런데 전원 합의체의 판사 14명 중 절반에 가까운 6명이 소수 의견을 냈다. 소수 의견의 핵심은, 살인은 맞지만 내란 목적 살인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4·19를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을 근거로 '저항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의견,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새 헌법을 만들자는 것이 전 국민의 합의임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판사도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판사들은 '유신 헌법 자체가 주권을 찬탈한 범법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고, 김재규 등의 행위는 내란죄 성립 요건인 폭동에 해당하며, 저항권을 인정할 근거가 실정법에 없다'고 주장하며 상고 기각 결정을 내렸다. 소수 의견은 전두환·신군부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전두환·신군부는 소수 의견을 낸 판사들에게 다각도로 압력을 가했다. 소수 의견을 낸 판사들은 결국 강요된 사표를 내거나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어야 했다. '편집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2017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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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응답하라 1979
위의 사진은 1979년 5월3일.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김영삼.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김대중과 함께 블랙리스트 최상위 person. 몇십년 후에 꿈에 그리던 나랏님 되어.. 국가살림 다 들어먹는 저 양반이 그래도 저 당시엔 꽤 먹어주는 민주투사였음. 그가 총재로 등극한 신민당은 대한민국 대표 야당을 자처하며 당연히~ 또 꾸준히 민주 노선을 지향..... 국민들의 관심과 이목을 이끌어는데 성공했음. 한달 뒤, 1979년 6월 30일... 천조국에서 세계 일진 대장의 국빈방문...그의 이름 지미 카터. 방한 2년전인 1977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여 '도덕 정치'를 자신의 정치 모토로 삼고,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한바탕 싸울 기세셨음... 당연히 그의 개념으로는 민주 우방 대한민국의 독재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주한미군 철수'등의 초강수 밀당 압박으로 대한민국에 '민주화' 를 촉구.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까불지말고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엿이나 먹고 가.~' 의 신념으로 관례를 무시한.. 오찬 연설.. 러닝 타임 40분에 도전! 당시 영상 자료를 확인해보면..... 카터의 조낸 빡친 표정을 확일할 수 있음..... '이 새뤼가.... 사람 불러놓고 말이야!!!!!' 약소 우방국의 무례함에 치를 떨며.. 천조국으로 돌아와... 대,내외에 박정희의 대한민국을 '악의 축'으로 선전. 이는.....북한과 이란을 몇십년이나 앞선 것이다.ㅡㅡ; 결국 양국은 해방 이후.... 최악의 관계를 달림. 카터의 썩소가 잊혀질때 쯤...... 1979년 8월....'YH 무역' 이란 섬유회사에서 여공들이 노사분규를 일으킴...이유는 회사의 재정난에 따른 일방적인 폐업선언..돈 떼인 것도 서러운데....하루 아침에 오갈데 없는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 여공들은 사회적 이슈화를 목적으로 신민당사 1층에서 최후의 농성을 선택.... 허나 농성 사흘째인 8월 11일 새벽 2시... 1000명의 전경들이 신민당사를전격 기습...수십명의 여공들과 김영삼을 포함한 30여명의 신민당원, 10여명의 기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 폭력 진압을 시도. 야당 당사가 군화발에 짓밟힌 헌정사상 유례가 없었던... 없는 ....또 앞으로도 절대 없을 일이 벌어짐.....공권력 남용에 따른 강제해산에.... 결국...22세의 노조 상임집행위원 여공 김경숙 사망. 여론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정부는 문익환 목사, 시인 고은 등을 이번 사태의'배후불순 세력'으로 규정하고.. 또다시 본질은 은폐한 체, 이념 놀이에 사건을 끼어 맞추는 패착을 선보임. 이에 분개한 김영삼 신민당 대표....세계 최고의 메이저 언론사인 뉴욕 타임즈와의9월 16일자 인터뷰를 진행. '미국은 독재 정부에 지원 말아달라.' 며 호소.패키지로 독재정권의 만행을 낱낱이 고함. 그렇지 않아도 미국과의 관계 봉착에... 머리가 지끈한 집권당..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의 뉴욕 타임즈 인터뷰를 '반국가적 발언' 으로 규정....하고...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제명안을 국회에 상정. 1979년 10월 4일. 집권당 의원들은 독일 축구와 같은 조직력과 메가페스급 스피드를 자랑하며... 10분만에 날치기 통과..... 이 꼬라지 보고 있다 천불이 난 지미 카터 형님의 전화 한통에.... 당시, 주한 미국 대사인 '글라이스틴'이 이틀 뒤, 본국으로 소환 조치됨.유신체제의 대한민국과 천조국 사이가 최악으로 치달음...... 덩달아 천불이 난..국민들도 들고 일어남....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었던'경상도'.... 그것도 그곳의 심장..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함. 1979년, 10월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촉발된 항의 집회는마산 일부 지역으로까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 대학생,시민,노동자,여성 등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5만여명의 시위대로 발전하기에 이름. 이것이 그 유명한 부,마 항쟁. 10.16일~17일 양일 사이.. 이 지역 30여개의 파출소가 시위대에 의해 파괴되고...경찰차량 6대가 전소 되며... 사실상 과격 시위의 성격을 띔. 이에 정부는 다음날인 1979년 10월18일.... 이 지역에 '비상계엄' 선포하고군,경을 파견.... 무력 진압으로 으로 시위대 해산을 위해 총력.이날, 공안당국 최고 수장 자격으로 사태 파악을 위해 직접 부산으로 내려온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 김재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유신정권 최고의 권력기관'중앙정보부'의 甲 오브 甲. 박정희 대통령과는 혁명적 동지이자, 동향 선후배 (경북 구미) 이며...육군 사관학교 동기. 곧은 성품, 폭넓은 대인관계, 청빈한 생활, 뛰어난 행정 능력에다 대통령과의 학연,지연이 배가 되어...유신정권의 최대 수혜자 또 권력자로 등극함... 그런 김재규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양심적인 군인들의 무력 투쟁만이 박정희 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다.'고 주야장천 주장해온 재야의원 장준하와 각별한 사이였음. 장준하란 존재는 어찌보면 그와 그의 단체에서 이 악물고 관리,감독 내지 고문의 대상으로 다뤄져야만 했던 민주진영 운동 인사였기에 이같은 인연은 다소 충격적임.... 김재규는 장준하의 의문사 이후,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는 이들중 하나였고,, 가장을 잃은 장준하 가족에게 거처 및 각종 편의 제공까지 직접나서 챙겼다고 알려져 있음... 또 장준하의 아들은 김재규야 말로 자신의 아버지가 말한 이 땅의 민주화를 이끌 양심있는군인중 한명이었다고 증언함. 또 김재규는 유신 정권 탄압을 비판하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대놓고 '환자'라 표현했으며....양심과 직책에서 수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함.추기경은 그의 정신적 멘토로서 그들은 사회 전반적인 모순에 깊이 공감하였고, 여러부분에서 교류했다고 알려짐. 추기경에게 직접....'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할테니..종교 지도자로서...그분께 '하야'를 촉구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단다. 미국 정부의 한반도 담당관과....안보국 인사들이 작성한 많은 수의 리포트에도 김재규는 코쟁이들과 가장 말이 잘 통하는 민주주의통 정보부장이었고,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에겐 더없는 말벗이었다고 함. 미국 정부가 유일하게 대화 창구로 활용한 대한민국 정치인이었던김재규는 평소,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을 억제시키려면 미국의 지원이 절실하다.'며 여러차례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요구해 왔다고... 정보부장 취임 전.. 군생활 당시에도 흥미로운 사실이 존재하는데.. 1971년.. 그러니깐 유신 헌법 선포 1년전, 보안사령관 재직 당시,국정에 있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칠대로 지친 박 대통령에게 '나라와 당신의 건강을 위해 여기까지만 하셔라.' 고 충언까지 했다고 함...그의 이같은 조언에도 불구. 그로부터 1년후.. 1972년에 유신헌법이 선포되고...장기집권의 서막이 열림.... 이에 주군에 대한 인간적 회의, 본인의 민주적 가치관과 직책 사이에서많은 혼란을 겪은 것으로 추정....하지만 결국, 자신의 무소불위 지위까지는 들어엎지 못하며 '햄릿' 같은 인간의 전형적인 우유부단함을 드러내고.... 그렇게 시간만 흘러.. 유신헌법 선포의 해를 전후해서 대통령에게 취했던 자세와 앞서 열거한 1979년 정국의 심각성으로 말미암아 박 대통령에게 '민주화 세력에 너무 관대하고.. 무른 정보부장' 이라는 낙인이 찍힘. 그런 그가.. 1979년 10월..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부산에서 목격하자....순간....묘해지는 그의 감정...... 이윽고 청와대에 들어와... 박 대통령에게..'대학생들만이 아닌 전 시민이 함께 하는 시위며. 5개도시로 확대 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보고함. 그러자 박 대통령 대노~! '임자가 해결치 못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 내린다.' 며 꾸지람.... 대통령 곁에 있던 청와대 넘버2... 경호실장 차지철은 한술 더 떠....'캄보디아는 300만을 죽였는데...우리도 100만만 쓸어버리자.' 라는 폐드립 농담을 날림. 김재규는 이날, 청와대를 나오며 ....주군을 마음에서 완전히 지움....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 군 후배이자...당시 박 대통령의 비호를 등에 업고..자신과 정,제계 인사들을 상대로 안하무인격 행동을 일삼았던 경호실장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 또한 극치에 이름. 얼마 후, 1979년 10월 26일 오전. '삽교천 제방 준공식' 기념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기쁜 마음으로 청와대로 돌아옴... 오후 6시. 그렇게 업된 마음에 지시한 최측근 연회가.... 최신식 시설을 자랑하는 대통령 전용 별채 '궁정동 안가 나동'에서 진행.정계 인사로는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이 참석하고... 외부 객으로는 당시.. 가수였던 심수봉, 한양대 연극영화과 학생 신재순이참석.... 총 6명이 연회장에 동석. 술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이 연합하여.....김재규의 중앙정보부가 김영삼 사태,YH 여공사태, 부마항쟁 사태를 키운 주범이고....미국과의 외교 또한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치부해가며...무한 갈굼을 시전..... .....................결국.................... 결국.......... 이성을 잃은 김재규는 별채 본관 나동에서 별관으로 이동하여 총을 습득....자신의 중앙정보부 왼팔, 오른이었던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의전 과장에게 총성이 들리면 경호원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연회장 일행들에게 돌아옴....... 이윽고 김계원 비서 실장을 향해.....'형님, 제발 각하를 잘 좀 모시세요~!'또 차지철과 박정희 대통령을 번갈아 보며... '각하,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시니 그게 되겠습니까? 라는 짧은 몇마디를 남기고.... 방아쇠를 당긴다.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실장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식당서 군것질을 하던 경호원들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아무런 원환이 없었던... 김계원 비서실장과 두 여식만이 목숨을 건졌으며.. 위대한 독재자의 시대가 이처럼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민주주의'란 단어를 수백번 외쳐가며...자신의 행동에한점 부끄럼이 없다 주장했고, 박정희 대통령을 호명할 땐, 각하란 호칭과 존댓말을 꼬박꼬박 붙여 썼다.군인답게 감형이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고, 자신의 명령을 받든 부하들의 선처를 호소했다. '각하와의 모든 소의를 끊고, 대의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법정에서- 이듬해 1980년, 사형 집행.. 그리고 도래하는 또 다른 어둠...... 김재규....그가 박정희 대통령을 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말이지...그는 양심과 직책 사이에서 수없이 고뇌했던....민주주의 신봉자였을까? 주군을 배신한 실패한 군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감정도 제어 못하는......정신 이상자였을까......? 어찌되었건.....그는 가슴 아픈 우리 역사다....... (너무 피곤한 관계로... 안가에서의 벌어진 자세한 사실 정황....정승화 육군참모 총장에 대한 이야기...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수사 전반의 내용.. 생략한 점 양해부탁드립니다ㅜ.ㅜ) 그리고 필자인 졸라맨 본인은 중도 보수자로서, 건강한 안보관, 바로 선 시민의식, 또 양심적인 경제활동이...이 나랄 더욱 부강케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글을 접하는 우리 모두가 가슴 아픈 현대사를 이해하고.. 논의 해보자는 취지일 뿐이니..... 색깔론으로 진창 만들지 마시고...그럴 의도가 다분한 분들은 그냥 글만 읽고 나가주심이..... 왜 세계사 관련한 제 글은 재밌게 봐주시면서...우리 역사를 주제로 하면.....세계사 만큼.... 대화하고 합의하고 즐기지 못하는 걸까요? 하나된 대한민국을 꿈꾸며.....
졸라맨2작성일 2013-10-17추천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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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박정희 대통령 서거의 날 10.26
5.16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뢰를 얻게된 차지철 대위(오른쪽)또한 이때부터 박정희의 옆에서 그분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박종규 소령(왼쪽)'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박종규는 불의의 사고가 발생한 이후에 경호실장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 불의의 사고란, 1974년 8월 15일에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이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 사건에서 영부인이 사망하게 된 책임을 스스로 물어 자진사퇴하게 되고그 후임에 차지철 공화당 의원이 발탁된다.차지철 경호실장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었다.그런만큼 육사 출신 관료,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고한다.이에 그는 경호실장에 발탁된 이후에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되는데 그 명목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이었을 지라도 그의 횡포는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당시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바로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이었다.차지철이 경호실장이었다면 중앙정보부에는 김재규가 있었다.김재규는 5.16군사혁명 때 혁명주체세력(김종필, 박종규, 차지철 등)으로 참가하지 않았다.이 사람은 혁명 당시(1961년 5월 16일) 육군대학교 부총장이었는데, 反혁명세력으로 낙인 찍혀 모든 직을 박탈 당한다.그런데, 김재규는 혁명의 주체인 박정희 소장과 동향(경상북도 선산군)이고 한국 육군사관학교 동기(2기)였다는 것을 알아낸다.이에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 소장에게 찾아가서는 취직을 부탁하는데박정희 소장은 김재규에게 대구중석(現 대구택)의 사장직을 주고, 후에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또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후임에 김재규를 임명하여 5.16에 참여하지도 않은 자에게 크나큰 권세를 누리게끔 해준다.김재규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운명을 뒤바꿔준 정말 최고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듯이 1974년에 차지철이 경호실장에 발탁되고 1976년에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에 발탁되자두 사람은 자연스레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위해 경쟁을 벌이게 된다.그런데 이게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한명을 물어뜯어 죽이려는 살벌한 경쟁이었던 것이 화근이었다.경호실장은 대통령과 같이 청와대에서 근무를 하지만, 중앙정보부장은 남산에 위치한 중앙정보부에서 근무를 한다.또한 경호실장은 대통령을 호위하는 임무가 주어져있다.차지철 경호실장은 김재규 중정부장보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가까운 곳에 있어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았으며비서실장이든 중정부장이든 장관이든 박정희 대통령의 가족을 제외하고서는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기 위해서는 차지철 경호실장을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박정희 대통령의 신변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차지철은 그 수준이 너무 지나쳤다.실제로 차지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려지는 서류 또한 '독이 묻었는지 않았는가'하는 이유에서 자신이 먼저 검토한 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게끔 하였다.당시 차지철에게 발탁되어 경호실에서 근무하던 전두환은 위의 짤방처럼 후에 증언하기를"우군 싸움(차지철과 김재규의 대립)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하다"이렇게 평할 정도로 대립이 심했었다.이에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요청하여 청와대에서 몸을 빼 군으로 복귀하게 된다.차지철과 김재규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전략이었다.실제로 이러한 전두환의 행보는 그가 후에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데에 크나큰 도움으로 작용한다.1979년 10월 26일박정희 대통령은 삽교천 준공행사에 참석한다.이 때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한 사람은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경호실장.김재규는?김재규 또한 준공행사에 참석하여 박 대통령을 수행하려 하였으나경호실장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말하기를"아, 김 부장? 1호기(대통령 전용 헬기)에 자리 없으니까 저기 뒤에 2호기에 타고 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요!"이 한마디에 김재규는 대통령 1호기에 탑승하지 못 했고 화가 나서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중앙정보부에 박혀 있는다.삽교천 준공식을 마친 후에 비서실장 김계원이 박 대통령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각하, 오늘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박 대통령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차지철 경호실장을 불러 묻고 말씀하시기를"차 실장, 김 부장은 왜 안 왔어? 김 부장도 오늘 오라고 해."차지철은 김재규가 참석하는 걸 싫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같은 박 대통령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차지철의 연락을 받은 김재규는 오후 4시 20분에 궁정동 안가에 도착한다.그리고서는 궁정동 안가에 배치된 자신의 개인 집무실에 있는 전화의 수화기를 들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하기를"정 총장, 나 김재규입니다. 혹시 시간 되시오? 오후 6시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시오. 식사나 같이 합시다."이에 정승화는 김재규의 제안에 응하게 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대답을 한다.1979년 10월 26일 오후 6시 궁정동 안가김재규는 박 대통령과 차지철보다 먼저 궁정동 안가에 도착한 김계원 비서실장과 사담을 나누게 되는데김계원은 김재규만큼은 아니더라도 차지철에 대해 꼴불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위에서도 말했지만 차지철은 육사 출신이 아니어서 육사 출신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김재규같은 경우는 육군 중장으로 전역을 했고 김계원은 육군 대장으로 전역을 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차지철은 육군 중령으로 전역을 한 사람이기에 두 사람보다 그 계급이 한참 낮았다.그래서 자연스레 둘이 차지철에 대한 흉을 보기 시작하는데 김재규는 그 분위기가 진지하고 심각한 반면 김계원은 그저 낄낄 거릴 뿐이었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박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두 사람은 황급히 박 대통령을 맞으러 나갔다.
(여기서부터는 심수봉의 증언에 따라 재구성된 내용)가수 심수봉은 TV프로그램 출연을 앞두고 있었다.그러나 오후 4시 30분경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심수봉과 만나 얘기를 나눈 후에 심수봉을 궁정동 안가로 데려간다.심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그 때 차에서 신재순을 만났다고 한다.심수봉은 오후 6시경 궁정동 안가에 도착하여 박선호 의전과장에게 보안각서를 써서 제출하였다.그리고 오후 6시 40분경심수봉은 신재순과 함께 박 대통령이 계신 궁정동 안가 연회장에 들어서게 된다.박 대통령이 계셨던 연회장은 (나)동이다.
박 대통령 왼쪽이 심수봉, 오른쪽이 신재순김재규의 옆에 앉은 사람은 김계원 비서실장심수봉과 신재순은 박 대통령에게 인사를 드렸고 심수봉은 안면이 있는 차지철, 김재규, 김계원에게도 눈인사를 하는데심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재규는 심수봉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줄곧 무거운 표정이었다고 한다.비서실장 김계원의 증언에 근거하면당시 연회장 내에서는 '부마사태'에 대한 내용이 오고갔다고 한다.오후 7시 10분김재규는 연회장에서 나와 궁정동 안가 (가)동으로 가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김정섭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를 만났다."정 총장, 미안합니다. 생각보다 연회가 길어지고 있어요. 김 차장보께서 정 총장좀 대접하고 계세요."김재규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자리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권총을 가슴에 품고 연회장으로 돌아간다.오후 7시 30분김재규는 연회장 자리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부관이었던 박선호와 박흥주를 호출한다.※박선호는 김재규가 교사로 재직 중일 때 가르쳤던 제자였다.김재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둘에게 말하기를
"오늘 죽인다"
이 말을 들은 두 사람은 놀랐다.
김재규 :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나? 나라가 잘못되면 다 죽는다. 각오는 돼 있나?
박선호 : 예. 각오가 돼 있습니다.
박흥주 : ….
박흥주가 망설이자 김재규는 권총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김재규 : 총장(정승화)과 제2차장보(김정섭)도 와 있다. 오늘 결행한다.
박선호 : 각하도 포함됩니까?
김재규 : 그래.
박선호는 깜짝 놀랐고 김재규에게 암살을 미룰 것을 제안한다.
박선호 : 오늘은 경비원이 너무 많습니다. 다음으로 미루는게 어떻겠습니까?
김재규 : 안돼. 보안이 샌다. 똑똑한 놈으로 두세 명만 준비시켜.
박선호 : 그럼 30분만 주십시오.
김재규의 명령을 받은 박흥주 수행비서는 유성옥, 이기주를 불러 김재규의 계획을 말한다.
이 세명은 궁정동 안가 요리실의 주변에서 대기를 하게 된다.
이들의 임무는 '김재규의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요리실 내에 있는 경호원들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박선호 의전과장은 '연회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호실 소속 경호원 두명을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오후 7시 38분
김재규가 부하들에게 임무를 하달한 후에 연회장 자리로 돌아온다.이 때 김재규는 품에 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3분이 지난 오후 7시 41분김재규가 갑자기 옆에 있는 김계원에게"형님, 각하를 좀 똑바로 모십시오!"연회장 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김재규는 멈추지 않고 박 대통령에게"각하, 이 따위 버러지같은 놈(차지철)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정치가 똑바로 되겠습니까!"(신재순의 증언)이렇게 말하고서는 총을 뽑아서는 차지철의 왼팔을 쏜다.차지철은 경호실장이라는 사람이 총 한 자루 가지고 있지 않았다.차지철은 총에 맞자 급히 총에 맞은 팔을 붙들고는 연회장 내에 있는 화장실로 도망쳤다. 차지철은 도망쳤고, 김계원 또한 말없이 자리에서 황급히 빠져나갔다. (심수봉의 증언)박 대통령의 옆에는 심수봉과 신재순만이 있을 뿐이었다.김재규는 그렇게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가슴에 총을 쐈다.?각하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자세를 고쳐 앉고 고개를 조금 숙이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김재규가 각하를 향해 1발을 쏜 것입니다. (심수봉의 증언)그 때 김재규의 권총이 갑자기 고장 난다.이에 김재규는 새로운 총을 구하기 위해서 황급히 연회장에서 빠져나갔다.
그러자 화장실에 숨어있던 차지철이 문을 열고 나와서는"각하, 괜찮으십니까?"박 대통령께서는 가슴에 피가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나는 괜찮아
그 때 심수봉도 박 대통령에게"각하, 정말 괜찮으세요?"박 대통령은 심수봉에게괜찮아라고 말씀하시고는 이내 쓰러진다.
김재규의 총소리가 울려터지자 궁정동 안가 요리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흥주, 유성옥, 이기주 세 사람은 그 총소리가 김재규의 신호탄인 것을 알았다.총소리가 들리자마자 요리실에 무차별적 난사를 감행하여 요리실에서 놀고 있던 경호원, 요리사들이 대다수 사망한다.
권총을 바꾸기 위해 연회장에서 빠져 나온 김재규는 정인형, 안재송을 사살한 박선호를 만났다.이에 김재규는 박선호의 총을 가로채듯이 가져가서는 다시 연회장으로 향한다.그 때 연회장에 들어서자 김재규는 차지철과 맞닥뜨린다.차지철은 주위에 있던 찬장을 이용하여 김재규를 제압하려 하지만,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먼저 총을 쐈고 차지철은 쓰러진다.김재규는 피를 흘리고 있는 박 대통령에게 다가간다.그리고서는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머리에 대고 총을 쏜다.심수봉과 신재순은 이 모습을 보고 놀라서는 안가 부속실로 도망쳤다
김재규는 연회장 (가)동으로 달려갔다.그리고서는 김정섭과 식사를 하고 있는 정승화를 붙들고서는"정 총장, 큰일 났소! 빨리 자리를 떠야 하오! 빨리 나를 따라오시오!"이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당황한 정승화와 김정섭은 김재규의 다급함에 이끌려 황급히 궁정동 안가를 떠나게 된다.세 사람이 (가)동에서 나오자 박흥주가 차를 몰고 와 세 사람을 태웠다.이들이 탑승한 차량은 황급히 궁정동 안가를 빠져 나갔다.
김재규 일행이 궁정동 안가를 빠져 나가자 몸을 피했던 김계원 비서실장이 궁정동 안가 경비원 두 명을 대동하고 자리로 돌아와서는황급히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국군수도병원으로 향하게 한다.
한편 김재규와 같이 동행하는 정승화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정승화가 김재규에게 묻기를"도대체 무슨 일입니까?"그러자 김재규가 정승화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었다 내리며"이분이 돌아가셨습니다."정승화는 깜짝 놀랐다."사실입니까?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김재규는 뻔뻔하게 거짓말하기를"저격당하셨소."
김재규는 본래 정승화를 중앙정보부로 데려간 후에 사건을 장악하여'차지철이 각하를 쐈다'고 공식 발표하여 자신의 죄를 덮어씌울 계획이었다.그러나 그는 무심코 운전을 하고 있던 박흥주 대령에게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한 마디를 하게 된다."박 대령, 중정(중앙정보부)으로 갈까? 육본(육군본부)으로 갈까?"그 때 정승화가 나서기를"김 부장, 육본으로 갑시다."그러자 박흥주도 얼떨결에"육본으로 가는게 낫겠습니다."이렇게 이들은 육군본부로 향하게 된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국군수도병원에 급히 모시고 갔다.그 때 근무하고 있던 의사, 간호사들은 환자가 누군지도 모른 채로 바락바락 성을 내는 비서실장의 압박에 의해 그 환자를 치료하게 됐다."살려, 이 분은 무조건 살려야돼! 살려야만 해! 알아들어!"그러나... 이미 박정희 대통령은 서거한 이후였다.의사들이 고개를 젓자 김계원은 망연자실한다.김계원은 자신을 수행한 두명의 경호원을 국군수도병원에 배치해놓고 박 대통령에게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국군수도병원에서 떠나 최규하 국무총리, 국무위원 등을 소집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한다.얼마 후에 국군수도병원장 김병수 준장이 의사들의 보고를 받고 밤중에 병원에 도착한다.김 준장이 환자를 확인하려 하자 경호원들이 이를 막았다. 그러자 김 준장은 환자의 상처부위를 보기 위해 옷을 벗겼는데 낯이 익은 상처자국을 보게 되었다.그렇다.자신이 주치의 시절 봤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흰색 상처자국이었던 것이다."각하, 그 상처는 어떻게...""아, 이거? 내가 어렸을 적에 불에 데인 적이 있었어. 그게 지금까지도 남아있어. 하하하
한편 청와대에 도착한 김계원은 급히 최규하 국무총리, 신현확 부총리 등 국무위원들을 소집한다.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최규하 국무총리였다."김 실장, 무슨 일입니까?""큰일났습니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범인은 김재규입니다."최규하는 깜짝 놀랐다.그때 신현확 등 국무위원들이 속속 청와대에 도착한다.국무위원들이 최규하와 같은 질문을 할 때였다.김재규가 김계원에게 전화를 걸어 육군본부로 오라는 말을 한다.이에 김계원은 국무위원들을 대동하고 육군본부로 향하게 된다.
이 때까지 김재규의 범행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최규하 국무총리김계원 비서실장박선호 의전과장박흥주 수행비서가수 심수봉모델 신재순그런데 문제가 된 것이 하나 있다.대통령 유고 시에 그 권한을 대행하는 국무총리 최규하가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국무위원들이 육군본부에 도착하자 김재규는 열을 내며 주장하기를"계엄령을 선포해야합니다"그러자 부총리 신현확이 화를 내며 "대통령이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계엄령을 선포합니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그때 김계원이 나섰다."각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이 김계원의 한 마디에 당시 육군본부에 있던 국무위원들, 장성들은 모두 멘붕했다.그런 와중에 신현확이 김계원에게 물었다."각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국군수도병원에 계십니다..."이에 자리에 모여있던 이들은 모두 국군수도병원으로 가 박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그 때 김계원이 은밀히 신현확 부총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렀다.그리고서는 말하기를"김재규가 각하를 시해했습니다. 김재규가 범인입니다."이에 신현확은 김계원에게 왜 진작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하고김계원은 "박흥주(김재규 수행비서)가 나를 감시하는데 어떻게 말을 합니까..."하며 변명한다.결국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육군본부 내에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김재규와 박흥주의 체포를 명령한다.김재규와 박흥주는 저항 한 번 해보지 못 하고 체포된다.
체포된 재규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향해 쐈다"고 발언하였으나이는 박 대통령 서거 직후 민주화의 물결이 불 것을 예상, 그 세력에 의해 자신이 구제받기 위해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김종필씨의 증언도 김재규가 차지철과 충성경쟁을 벌이다가 밀린 김재규가 일을 저질렀다고 함)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
박흥주는 현역 군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사형당했다. 1980년 3월 6일 총살형으로 사형 집행
박선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
유성옥은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
이기주는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
김태원은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
유석술은 징역 3년 복역 후 출소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 후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79년 11월 3일 오전 10시 중앙청 앞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이 거행되었다.국장에는 유족과 41개국 조문사절, 각계인사 3천명이 참석했다고 한다.(위키백과)전국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2,000만여명 이라고 한다
흥x쟁이님의 글중 일부를 첨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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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흔한야구선수들의굴욕
★ 프로야구 굴욕 사진 모음 ★
톡톡 > 야구야구| 야왕 (판) 2012.05.16 17:17
조회25,067 스크랩4
ㅋㅋㅋㅋㅋㅋㅋ 안녕하세요?
야구를 보다보면 정말이지 웃긴 장면이 많이 연출 되는 것 같아요
야구장 기자님들 사진기 또한 엄청 고성능인지라 웃긴 장면을 잘 캐치해 주셔서 재미가 2배!
그래서 준비 했습니다!
프로야구 굴욕 사진 모음!!!!!
1. 붕어해봐, 붕어
서재응 : 자, 석민아! 옳지 옳지~~~~~~~
붕어 해봐~~~~~~~ 부웅어~~~~ 부우우우우웅어~~~~~~~~~~
윤석민 : 부...부부..................
서재응 : 왜 말을 못해, 난 붕어다. 붕어는 나다. 자 어서 해보라니까~~~~ ㅋㅋㅋㅋㅋㅋㅋ
2. 날 따라 해봐요 이렇게
넥센 : 자, 스텝은 오른발이 앞, 팔은 왼손이 위로!!!! 자 따라해봐!!!!!
삼성 : ㅇ우ㅏ어아이잉ㅇ어엉ㅇ
3. 저요!!!!!!!
선생님 : 어제 선생님이 심수봉 콘서트에 다녀와서 싸인을 두 장 받았어요. 받고 싶은 사람?
연경흠 : 쩌요!!!!!!!!!!!!!!!!!!!!!
선생님 : 그...그래..... 2장 다 가져....
4. 접착성 좋은 녀석
기면수 : 헤헤 ㅎ흐ㅡㅎ헤헤~ 나는 그 어떤 벽이라도 찰지게 찰싹 잘 달라붙지
이렇게 찰싹 달라붙는게 특기인
나는 코딱지다!
표정도 코딱지 같다고??? 칭찬 ㄳㄳ ㅋㅋㅋㅋㅋ
5. 빌딩 사이를 지나가는데, 머리 위에서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방금 머리 위에서 짝! 소리가 났는데....
6. 할미는 정이를 사랑합니데이~
최정 외할머니 : 정아~ 할미가 응원합니대이~~~~♥
7. 오잉또잉?
와 볼 조낸 빨라, 어디로 갔지 오잉또잉~~~~~??????
8. "띵" 맞았거든여?
9. 민철아 배고프지, 좀 먹고 해라 임마
보는 형이 정말 안쓰러워서 그래, 먹고 좀 다녀,
허허 녀석봐라, 배고팠나보구나.
급하게 먹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
10. 처음 홈런을 하면 머리가 새하얗게 멍- 해진다고 한다. 나.. 홈런친거니?
아.....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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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7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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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빼고 굴욕을 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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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져리거 2012.05.1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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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져리그는 역시 물이 틀림.
나 맞았음. 아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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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ㅁㅁ 2012.05.18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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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보고 1차로 빵! 댓글보고 2차로 빵! 새벽녘에 미친듯이 웃고있는 1인~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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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우 2012.05.17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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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보다 댓글이 더 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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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 2012.05.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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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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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종훈 2012.05.1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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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포 턱주가리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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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513 2012.05.1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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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포??????? 아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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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녀 2012.05.1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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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 김태균짤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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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근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완전 빵터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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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스 2012.05.16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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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죄자작성일 2012-05-18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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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대통령 살해가 쿠데타, 12.12 진실 바로 세워야"
총성으로 사건은 시작됐다. 지난 1979년 12월 12일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합수부) 수사관들이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은 다음날 아침 사태가 정리될 때까지 숨가쁜 상황의 시작이었다. 경복궁 수경사 30단에 모여 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노태우 9사단장 등과 참모총장 연행에 항의하는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격돌은 금방이라도 피를 볼 것 같았다.
결국 사태는 나중에 신군부로 불린 전두환 사령관 측의 승리로 마감됐다. 이 당시 승자의 편에서 쓰여진 12.12 사건의 진상은 1995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 뒤집힌다. 승자와 패자가 서로 자리를 바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옮겨 앉는다. 서로 한 번씩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일까.
12.12사건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 의미를 두고 ‘신군부의 정권 찬탈 기도’라고 정의하기도 하고 “쿠데타가 아닌 정당한 수사권 행사였다”는 평가도 있다. 문민정부 이후 12.12사건은 대부분 ‘신군부의 반란’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같은 평가 역시 ‘승자의 시선에서 본 기록일 뿐’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뉴데일리는 30년 전 12.12사건의 주역이었던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과 신윤희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감사를 만났다. 이들은 이야기한다. “쿠데타가 아니었다”고. 뉴데일리는 이들에게 들은 그대로를 3회로 나눠 연재한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 뉴데일리
12.12의 발단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숨진 ‘10.26’이다. 지금은 공원이 된 궁정동 안가에서 박대통령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가수 심수봉, 당시 대학생이던 신재순과 만찬 중 저격당한다. 문제는 이 안가의 바로 옆 동에 김재규의 초대를 받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0.26 발발 후 직제에 따라 정승화 육참총장은 계엄사령관이 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수부장이 된다.
“발화점은 대통령 시해 현장이 있던 사람이 계엄사령관이었다는 것입니다.”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은 시해 동조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을 막강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5층 건물 1층에서 살인사건이 나면 그 건물 모두를 조사하지 않습니까? 정 총장은 불과 현장에서 수십 m 거리에서 범인의 초청으로 와 있었습니다. 게다가 권총이며 M16 등 총성도 아주 가까이 들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범의 혐의를 벗기가 쉽지 않죠.”
합수부의 조사는 막강한 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을 대상으로 시작됐다."정승화 사령관은 거짓말을 되풀이 했다"우선 신분 격차가 너무 심하니 조사에 제약이 많았다는 것이 허 이사장의 회고다. “정 총장은 수시로 수사기록을 보여 달라고 하고 마음대로 고치거나 빼거나 써넣곤 했습니다. 이걸 제대로 된 수사라고 할 수 없지요.” 허 이사장은 정 총장이 연행되기 전이나 1995년 12.12 주역들을 고발할 때의 얘기나 자서전에서 쓴 얘기가 모두 각각 다르다고 주장했다. “정 총장은 일관되게, 또 살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허 이사장은 한 예를 들었다. “정 총장은 합수부 수사관이 ‘김재규가 어디서 박 대통령과 식사를 했느냐’고 묻자 청와대 본관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총소리 역시 자하문에서 나는 소리인줄 알았다고 주장했어요. 김재규가 대통령을 저격한 뒤 험한 몰골로 정 총장에게 왔습니다. 총소리가 나고 얼마 안 지나서인데 청와대 본관 식당에서는 경호 때문에 시해 자체가 불가능하고, 시해를 했더라도 청와대에 가득한 경호원들이 김재규를 그냥 궁정동으로 가도록 두었겠습니까.” 허 이사장은 “6.25를 겪은 4성 장군이 20여m 떨어진 곳에서 난 총소리를 먼 거리의 자하문에서 난 곳으로 알았다면 차라리 코미디”라고 웃었다.
12·12를 승리로 이끈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5명의 보안사 핵심참모들. 왼쪽부터 이학봉수사국장, 허화평비서실장, 장도영보안처장, 전사령관, 권정달정보처장, 허삼수인사처장. ⓒ 자료사진
정승화는 김재규가 추천해 총장된 사람정 총장은 합수부의 수사에서 계속 “김재규와 잘 모르는 사이다. 도움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정 총장은 김재규가 추천해 참모총장이 된 사람입니다.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은 자신의 동기인 육사 3기 박희동 장군을 밀었어요. 박 대통령에게 ‘인사 적체 해소’를 내세워 육사 5기인 정 총장을 추천한 사람이 김재규입니다.”
허 이사장은 수사관으로서 도저히 정 총장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전두환 사령관이 자신을 동경사(동해안경비사령부)로 전출을 보내려 하자 반발했다고 하는데 사실과 다릅니다.” 그는 “전 사령관의 동경사 전출을 정 총장이 노 장관에게 건의했지만 노 장관은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일하게 하라”고 말했고 전 사령관도 12.12 이후에 그 얘기를 노 장관에게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허 이사장은 10.26의 밤, 육본 벙커에서의 정 총장 행동도 석연치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이 유고일 땐 당연히 전방 등의 상황을 점검하고 해당 조치를 해야 합니다. 당연히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주한미군사령관에게도 보고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날 정 총장은 김재규와 상의해 병력을 보고도 없이 움직였습니다. 당연히 공범 혹은 동조 의심을 받을만한 것이죠.”
나중에 문제가 된 최규하 당시 대통령권한대행의 재가 역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허 이사장의 말이다. “합수본부장은 장성을 조사하거나 연행할 때 관례적으로 국방장관과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지만 재가를 얻지는 않습니다. 12.12의 밤에 최 대통령에게 간 것은 재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경복궁 30단에 모여 있던 장군들은 군에 어두운 최 대통령의 이해와 설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허 이사장은 “일반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 같은 군 사정으로 오해가 많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재규-김계원-정승화의 사태장악, 얼마든지 궁정쿠데타할 상황
허화평 전 보안사령관비서실장이 12.12 및 5.18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기 위해 1995년 12월 10일 서울지검으로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허 이사장은 10.26의 세 주역의 지위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정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차지철이 없는 청와대를, 정 총장은 군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세 사람의 묵계 여부와 관계없이 이들 셋이면 얼마든지 궁정 쿠데타가 가능한 상황 아닙니까?”
그는 “물증이 없고 정황 근거만 있는 속에서 수사진은 정 총장의 끝없는 모호한 태도에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12.12의 계기였다”고 말했다.
허 이사장은 1995년 문민정부의 12.12 재심의로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좌파가 엄청난 승리를 한 것이 당시의 재심의”라고 평가했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의 공권력을 단죄하게 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고, 반공의 큰 축을 여지없이 뽑아 버린 일이었다는 것이다.주객을 전도 시킨 문민정부 재판
조영환 올인코리아 대표는 “12.12사건은 크게 3가지 측면에서 재조명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12.12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 쿠데타를 일으킨 김재규와 그 일당을 제대로 수사한 전두환의 합수부가 쿠데타 세력으로 후에 김영삼 정권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규정된 것은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로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은 법적 하자를 재검토를 받아야 한다는 것.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12.12사건 관련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급조한 특별법이 헌법 제 13조의 형벌불소급, 일사부재리, 소급입법제한 등을 위반한 점이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로, 1980년 광주 사태 주역과 2008년 광우병 사태 주축세력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12.12사건을 쿠데타로 몰아간 민주화세력의 진짜 정체를 환갑이 지난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허 이사장은 “좀 더 기다릴 것이다. 때가 되면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겠다”고 별렀다.
씁쓸하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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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리뷰] [와이키키 브라더스] (스포)
요즘 장르가 드라마인 영화를 자주보게 된다.
잔잔하면서 삶또는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잔잔하게 담겨져 있는 그런 영화를..
오늘 1편의 영화를 봤다.네이버 영화 평점 순위를 꾀나 신뢰하는 나인지라,
드라마 장르에서 평점이 높은 순대로 보고 있던중에 '와이키키 브라더스'란 영화가 들어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귀에 익숙한 제목이긴 한데,,어디 출연진이나 볼까?
네이버 영화정보 클릭~! 이얼,박원상,황정민,오광록,류승범 등등..
오 지금이라면 돈 꽤나 들었을 케스팅이군.. 당첨!
[시작]
돈,여자,도박 따위를 모르고 오로지 음악에만 빠져있는 리더 겸 보컬 '성우' 여자 깨나 울렸을것 같은 넉살좋은 '정석' 다소 투박하지만 심성은 착한 시골 청년 느낌의 강수,그 등으로 이루어진 출장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에게 음악이란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할수밖에 없는 그런 '직업'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힘들게 주점이나 상가집을 전전하는 그들 밴드는, 리더 성우의 고향인 수안보의 한 호텔 '와이키키' 호텔에 전속 밴드로 계약을 하게 된다.
[과거]
성우는 고향을 천천히 둘러보던 중에,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초창기 멤버이자 현재는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민수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성우는 예전에 추억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젊음의 패기로 똘똘 뭉쳣던 4명의 절친한 친구 민수,수철,인기,성우. 그들은 방과후에 연습실에서 연주를 하는게 낙인 친구들이다.음악이 전부인줄 알았던 그 시절, 그들은 모두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우정을 쌓아나갔던 그 시절, 성우에게 가슴 아픈 첫사랑을 느끼게 해'줬던 여자 밴드의 보컬 오지혜가 존재했던 시절, 아무 생각없이, 노래를 부르고 연주 하고 *듯이 청춘을 즐기던 시절과 ,' 벌거 벗은채 아무도 없는 텅빈 바닷가에서 소리치며 모래사장을 *듯이 뛰어다니던 친구들의 '전*'는 , 음악이 '현실'이 아닌 '꿈'이 되어버린 시짐에서 끝나버렸다.
시청 건축과에 근무하는 수철은 환경운동가가 되어있는 인기와 시위가 있을 때마다 마찰을 겪으며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었지만 그런데로 현실에 만족하면서살고 있었고.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살고있는 성우만이 지금 뭐하냐는 민수의 물음에 고개를 떨구며 현실을 외면한다.
[현실]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정석은 강수가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를 뺴앗아서 두둘겨 맞게되고, 호텔 나이트 지배인에게 도박으로 매일 돈을 잃고, 정석에게 번번히 여자를 빼앗긴 강수는 급기야 대마초까지 손을데는 바람에 공연 중간에 큰 실수를 하게 되어 밴드에서 탈퇴하게 된다.
강수에 뒤를 이어서 들어온 새로운 맴버는 예전 성우가 다니던 음악교실의 원장인 알콜중독자 노인이었지만, 역시 공연중간에 술을먹어서 공연 도중 쓰러지게 되고 밴드는 호텔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약사 빠른 정석은 예전에 다니던 주점의 여자 보컬과 투톱으로 가기로 이미 지배인과 이야기가 끝난 상태이고,이래저래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꿈만 좇는 성우는 또다시 노래 주점등을 전전하게 된다.
와이키키의 웨이터였던 류승범은 드럼을 치던 강수에게서도 틈만나면 드럼 연주를 배우더니 이미 와이키키를 떠난 성우에게 올갠 기술을 배우고 기술을 배워서 또다시 와이키키 호텔로 복귀를 하면서, 또다시 성우는 혼자 남겨지게 된다.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지만 혼자 꿋꿋이 외롭게 있는 성우를 보여주면서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준다.
[인생]
왕년에 잘나갔던 그룹사운드 보컬인 오지혜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고단한 현실을 잊는게 취미다 .
남편은 일찍 요절하고 지금은 혼자 음식점에 야채를 대주면서 하루하루 근근히 살아가던 그녀는 ,
와이키키 호텔 근처에 한 포 장마차에서 우연히 성우와 마주치게 되고,성우에게 자신이 그동안 살면서 받았던 상처를
조금씩 조끔씩 보여주면서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점점 높여가고 있었다.그러던 중 시청 건축과에 근무하는 수철은 늦은밤 성우에게 술한잔 하자며 찾아온다. 자신이 시청에서 잘렸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수철. "그래 니 하고싶은 일을 하니 행복하니? 우리 중에서 너혼자만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살잖아" 라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는 성우를 보면서 나의 가슴은 매우 아프게 저려왔다..몇일뒤 여느날과 다름없이 주점에서 기타를 치던 성우는 '수철'이 죽었다는 민수의 전화를 받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간다..자기때문에 죽은게 아니라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인기의 모습과 환경 운동가인 인기의 데모 때문에 수철이 죽었는데, 장례식장까지 와서 왜 욕을 보이냐며 심하게 나무라는 민수를 보면서 성우는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시끌 벅적한 노재 주점에서 신나게 놀고있는 사람들, 그속에서 혼자 외롭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성우 ,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성우는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뛰어 놀았던 시절이 오버랩 되면서 영화는 클라이 막스로 치닫는다.
[결말]
자신이 만나던 여자의 기둥서방에게 오른쪽 팔을 칼에 찔린채 정석은. 성우를 찾아와 고향에서 마을 버스 기사를 하고 있는 강수에게 미안한 마음을전하고 싶다며 전화 연결을 부탁한다. 칼에 찔려서 팔을 다치고, 자신에게 정말 미안하다며 서럽게 우는 정석을 느끼면서 , '넌 왜 그렇게 사니'라며 강수 또한 서럽게 운다. 성우는 고다른 지방 주점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고 ,이제는 더이상 뗄레야 뗄수 없는 사이인 올갠에 정석 기타&보컬 성우 그리고 새로운 '와이키키' 멤버인 '지혜'와 함께
그들은 이제 더이상 숨막히는 현실이 아닌 그들은 '새로운 희망이 살아 있는 꿈을 연주 하고 노래한다'
[리뷰]
꿈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것을 100% 올인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영화인것 같습니다.
영화를 다 본뒤에 애절한 마음은, 도대채 영화의 어떤면을 보고 그렇게 가슴 아픈 것인지. ^^
딱히 꼬집어서 말하기가 참 어렵네요 .
영화의 각본까지 쓴 임순례 감독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
이 영화의 좋은점은 뭐니뭐니 해도 음악하는 밴드들에 대한 영화이고, 같은 예술쪽에 있는 배우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쪽 계통'의 생리를 매우 실감나게 잘 표현해 주신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할 정도로 연기력이 좋았던것 같구요..
특히 류승범은 실제 모습인지 연기인지 구분을 못하겠더군요..
그리고 음악하는 밴드들의 영화이다 보니 영화에 삽입된 애절한 노래들도 이영화의 멋을 한층 살려주어서,
영화에 깊이 몰입될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삽입된 ost 모두 저에게는 행복한 추억이 될것 같네요.
특히 마지막 심수봉에 사랑 밖에 난 몰라라는 노래가 어찌나 가슴을 흔들어 놓던지..
어쨋거나 이 밖에도 영화의 좋은점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저의 표현력의 부족으로 리뷰라기 보다 줄거리의 비중이 많았습니다. ^^
이 영화를 보고 다른 생각,,다른 느낌을 받으신 분들 다른 좋은 영화 추천해주실 분들.
댓글 달아주세요 .
2008년엔 우리 좋은 영화를 많이 봅시다.!
그리고 한국 영화를 사랑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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