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걸은 죽었다 - 15
-꿈,그리고 폭풍..-
군 제대후 처음으로 맞이한 새해를 병원에서 보낸다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어차피 지나간 나날들..이젠 앞만 보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나만 바라보며 사는 어머니..앞으로 사고 안치고 효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일단은 공부를 하든 기술을 배우든 무엇을 하던지 돈이 필요했기에
전에 하던 호프집 아르바이트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였다.
"준이 오빠.14번 테이블!"
"응."
그날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기철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녀석의 목소리는 핸드폰을 떨리게 할 정도로 항상 우렁차다
"행님.뭐하요?!!"
"야 내가 일할땐 전화 하지 말랬지?"
"아따 행님도 너무하네예.기철이 오늘 졸업도 했는디 술 한잔 안 사주능교?"
"쪼다 새끼.그렇게 좋은 날에 여자애들과 술이나 퍼 마시지."
"와 진짜..행님 또 이란다?실망이네."
최근 녀석이 나를 대하는 행동들을 보자면 예전과는 차원이 틀린 것 같다.
기철이 새끼..예전엔 내 눈도 제대로 못 맞췄는데...지금은 잘 못하면 날 한대 치겠다?-_-
물론 그럴일이 없다는 건 녀석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주축 멤버들이 장형식,문석주,황두환,남인철 이였다면,
지금은 기철이 녀석 혼자서 그 넷의 역할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기철은 전형적인 부산 사나이로서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성숙하고 듬직했고
녀석과 함께 있다보면 훈련소에서나 느낄법한 전우애,그리고 서로를 향한 알 수 없는 신뢰.
그런 감정들을 자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보다 5살이나 적은 녀석을 언제부턴가 친구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벽 4시..호프집 일을 마치고 녀석과 항상 가던 포장마차를 찾았다.
포장마차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제법 있는 편이였다.
"행님 여기요."
구석쪽에 앉아있는 기철이가 날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철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가자 녀석은 이미 소주 한병을 비운 상태였다.
"행님 하도 늦게 와서 벌써 한병 비웠어예.어서 앉으이소."
"얼마나 늦었다고 지랄이냐?" 하고 말하며 시계를 보니 5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인간적으로 좀 미안하긴 했다.-_-
"야 근데 오늘은 무슨 날이냐?여기 인간들이 왜 이렇게 북적대?"
기철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녀석이 내 말을 받아친다.
"뭐 행님만 술 마시라는 법 있수?다들 술 마시고 싶으니께 들어왔겠지예."
그래.다들 술 마시고 싶으니까 들어왔겠지..근데..
"이 새끼가 말하는 싸가지 좀 봐라?"
"으하하하.행님도 참;;그런건 애교로 좀 봐주이소~ ^0^"
난 테이블의 빈 소주병을 잽싸게 치켜들고는 기철을 무섭게 노려본다.
"그딴 표정 한번만 더 지었다간 뒤진다?"
"넵!"
"근데 오늘이 졸업식이라매?축하한다."
"애들도 아니고 그게 무신 축하할 일이라고..하여튼 고맙심미더."
그런 기철을 바라보고 있자 그 날라리 기집애도 오늘 졸업했을텐데..하는 생각이 든다.
"행님 무신 생각을 그리 하요?"
"아니 그냥.."
기철은 테이블 위의 새 소주병을 따고는 나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한다.
"행님.제가 전에 말했지예?"
"뭐?"
"이 바닥에서 큰 주먹이 될꺼라는 얘기 말이요."
난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이새끼.아직 철 덜 들었구만."
"아니 행님이 생각을 해보소.내가 이제 학교도 졸업했는디 뭘 할끼요?
공부도 항상 바닥을 기고 그렇다고 기술 하나 없는데 할게 뭐 있냔 말이지예.
이 박기철이가 오로지 자신 있는게 주먹질 밖에 없다는건 행님도 알꺼 아이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입안에 살짝 털어넣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런 얘기 할꺼면 집어쳐라.젊은놈이 어디 할게 없어서.."
"아따 행님도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십니꺼?
기철이가 지금 농담하는 걸로 보입니꺼?!"
기철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진다.술에 취한게 분명하다.
난 녀석의 그런 행동이 약간 불쾌하긴 했지만 애써 티를 내진 않는다.
피식 웃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든다.
기철이가 날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난 그런 식의 인생은 용납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아놓은 상태였다.
기철을 보며 비아냥 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니가 주먹질 하면 누가 키워준대냐?"
나의 그 질문이 건들지 말아야 할 곳은 건드린건지 기철은 쓴 표정을 짓고는
자신도 모르게 담배 한개피를 입에 물었다가 뭔가를 깜빡했다는 듯 날 향해 묻는다.
"아 행님 담배 한대 펴도 되겄지예?"
"펴."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허공을 향해 내뱉는 녀석은..아까 그 질문에 대답한다.
"사실 친구 하나 있긴 한데..걔가 억수로 잘 나가는 애거든예?"
순간 내 머릿속엔 이혜성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근데 모르겠어예.그 자슥이 키워준다고는 하는데..자꾸 망설여진다 아입니꺼."
"그래서?"
"그냥 그래서 쪼까 혼란시럽기도 하고..뭐 하여튼 그렇심미더."
"기철아."
"예 행님."
"난 솔직히 말이다.네 장래를 그런 쪽에 투자한다면 정말 발벗고 말리고 싶은데..
중요한건 너도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잖냐?"
"그렇지예."
"그렇다고 내가 그쪽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뭐 조폭이라고 해서 맨날 치고 박고 칼로 쑤시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거 없다던데예."
"그러니까 내가 너의 인생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참견 할 생각도 없고
가장 중요한건 난 니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잘해낼 것이라고..믿는다는 거..
지금은 그 말 밖에 해줄 수가 없다."
날 바라보고 있던 기철의 얼굴에 색깔이 돌기 시작한다.
"햐..역시 본드걸 행님이십니더.진짜 저는 행님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예?"
"절라 잘 살았겠지."
"-_-와따 무신 그런 섭한 얘기를 합니꺼?제가 행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예."
순간 기철의 그말에 온몸에 닭살이 확 올라오는게..
"이 씨;발 새끼..술 취했냐?;;"
"솔직히 그렇다 아입니꺼?!!행님 몸매도 완벽하지예?얼굴도 연예인 뺨치게 이쁘지예?
성별만 여자였으면 저 벌써 행님이랑 결혼했을 낍니더!!!"
난 더이상 참지 못하고 기철의 면상을 발로 후려깠다.-_-;
그러자 쾅 하는 소릴 내며 땅바닥을 나뒹구는 기철...
"악..해,행님 잘못했십니더!!!"
다른 사람들이 보면 둘이서 싸우거나 진짜 패는 줄 알겠지만
기철과 나에게 있어선 아주 흔한일이였다..
이미 대가리가 클만큼 큰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나한테 맞아주는걸 보면-_-;
기철은 본성이 무지 착한 녀석임에 틀림없다.
"행님 그 가스나랑은 아직 연락하요?"
다시 제 자리에 앉은 녀석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였다.
"누구 말하는 거냐?"
"그 가스나 있잖소.박진미라고 했던가.."
"됐다.그 기집애 얘기면 접어라."
"아니 혹시나 해서..이것만 대답해 주이소.안 만나는거 맞지예?"
"내가 그딴 기집애를 왜 만나냐?"
기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말한다.
"행님 진짜 잘했어예.그 기집애가 행님한테 흑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제가 얼매나 걱정했는줄 아십니꺼?진짜 다행이입니데이."
"그게 무슨 별일이라고."
"행님.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그 기집애가 다시 연락해오면 딱 잘라 거절하이소.
이건 진짜 행님을 위해서 말하는 거라예."
어이없는 미소가 입가에 지어진다.
"너 그 기집애가 그렇게 무섭냐?"
"행님."
"말해라."
"행님이 잘 모르나본데 그 기집애 옆엔....아,아입니더.
이런 얘긴 됐고 아무튼 무서운 애니까 진짜 다시는 만나지 마이소."
기철이가 말 안해도 이미 알고 있었다.
박진미 옆엔 네 녀석이 두려워 하는 이혜성이 서 있다는 것을..
하지만 박기철..이건 좀 실망인데?
항상 날 향해 본드걸이니 존경스럽다느니 치켜 세우더니 ..
내가 그깟 고등학생 따위를 무서워 할 줄 알았더냐?
어차피 이 빌어먹을 주먹; 쓸 생각도 없고,그깟 날라리 기집애 다시 만날 생각도 없지만..
니가 그렇게 존경하던 본드걸은..이미 죽은 것 처럼 보이더냐...?
하긴 어쩌면 네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난 예전의 그 감각,자신감,깡들은 이미 까마득히 잊어버린 상태이고
설령 너랑 주먹을 쥐고 싸우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될테니까.
너도 조금씩 느끼고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너의 기억속에 있는 그 화려한 본드걸은 이미 죽어버렸다.
기철과 헤어진 후 집으로 향하는데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한다.
이 시간에 누구일까?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실텐데..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열어보니.
발신번호표시금지 라는 글자가 떠 있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는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아무 대답도 없다.
"여보세요??누구세요?"
역시 상대방은 아무 말도 없다.
"전화 끊습니다."
그렇게 핸드폰을 닫으려 하던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한 사람...
"너 혹시...털모자냐??"
"...................."
"여보세요?너 털모자 맞지?그렇지??"
덜컥..
상대방은 결국 아무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어두운 새벽 골목길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나 보다.
피식..갑자기 알 수 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랬다.전화를 받으며 놀라던 나의 모습이 그렇게도 우스워 보였던 것이다.
.........................
설령 그녀가 진미라고 한들..아무 상관없지 않는가?
그 싸가지 없는 기집애 따위 이미 잊지 않았던가??
너의 눈가를 머물던 눈물은....이미 마르지 않았던가?
그 후..난 호프집 아르바이트로 바쁜 나날을 보냈고..
열심히 일을 하는 만큼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도 갈수록 돈의 액수가 불어났지만..
처음 일할때처럼 보람을 느끼거나 즐겁다거나 하진 않았다.
몸은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 가지만 머릿속은 텅빈 느낌..
난 그 기계처럼 살아가는 하루에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어머니도 나에게서 그런 냄새를 느끼신건지 ..하루는 날 불러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니 요즘 무슨 일 있나?"
"아뇨.별일 없어요."
"무신 일 없는데 얼굴이 그 따구가?"
역시 자식이 부모를 속일 순 없는 일이다.
"그냥 이러고 사는 제가 한심해서요."
"한심하다고?"
"그렇잖아요.언제까지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준아."
"예?"
"니 돈 많이 벌어서 이 애미랑 식당 하는건 어떻노?"
"..-_-"
이 젊은 나이에 벌써 부터 식당일을 하며 늙고 싶진 않다.;
그 일이 나쁘다는게 아니라 적어도 내가 젊었을때,자신감과 의욕으로 가득차 있을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해보고 싶을 뿐이다.
"어머니.저는 힘들게 살더라도 짧고 굵게 살고 싶거든요?"
"니가 똥이가?짧고 굵게 살게?"
"아 진짜..농담할 기분 아니예요."
"이자슥아..도대체 고민할게 뭐 있노?니가 하고 싶은걸 하면 될꺼 아이가?"
"하지말라면서요!!!"
"해뿌라."
어머니는 내가 경호원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그새 잊어먹었단 말인가..?
"제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 알긴 아세요?"
"니 그 뭐꼬..그거 하고 싶다매.보디카든가.."
"헉.."
"해봐라.니가 하고 싶으면 해뿌라."
이처럼 반가운 말이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기쁨...
정말이지 그건 새에게 더 높이 날 수 있는 새 날개를 달아주는 것 처럼..기쁜 얘기였다.
나의 가슴속엔 까맣게 잊혀졌던 꿈과 희망들이 다시 자리잡기 시작하고..
"내가 여기 저기 알아봤는데..그 일이 그렇게 나쁜게 아니라카드라."
어머니를 보는 나의 얼굴엔 환희의 표정이 가득차있다.
"자식 새끼가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데..내가 우야긋노?
한번 해봐라.근데 그거 할라믄 준비도 많이 해야 된다드만..
니 잘 할 자신 있나?독한 마음으로 할꺼 아니믄 애초에 관두뿌라."
"할껍니다!!할낍니다!!!진짜 잘 할 자신 있어요!!"
마냥 신났다..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한 기분이였고,
나의 눈가에 눈물이 머물렀었는지,아픔이 머물렀었는지..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였다.
경호원이 되기 위한 과정과 정보를 여기 저기 알아보니..
단증과 운동은 둘째치고 공부도 어느정도는 해야 한다는 소리에
순간 모든걸 놓아버릴 듯 했지만...-_-;이대로 포기 할 수는 없는 일이였다.
목숨이 끊기지 않는 한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을 살아나가야 할 것이였고..
어차피 살아 갈 것이라면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유도 합기도 태권도 등의 운동은 그 누구보다 자신있었지만..
중요한건 그것을 남에게 증명해보이기 위한 단증이 없다는 것이였다.
누굴 절라 패고나서 나 이정도로 강하다..라고 지껄일 순 없는 법 아닌가?-_-;
운동도 그렇지만 틀도 잡히지 않은 공부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선..
상당 액수의 돈이 필요할 것이였다.
그렇다면 현재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를 짧게는 몇 개월.길게는 반년 정도는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듯이 기간 따윈 중요치 않다.
난 이제 앞을 향해..내 꿈을 향해..천천히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인생이라는 것은 마냥 호락 호락 하지는 않은가 보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똥과도 같은.....
그날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호프집을 나올때 문앞에서 잠깐 마주쳤던 사내 다섯이 날 계속 따라오고 있음을 느낀다.
난 그들의 행동을 떠보기 위해 길거리에 있는 한 편의점에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날 향해 인사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간단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진열대에 있는 껌들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지만 나의 시선은 오로지 밖을 향해 있었다.
밖을 향한 나의 눈동자 위로 검은 물체들이 스쳐지나가더니 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의 뒤에서 따라오던 사내 다섯이 편의점 까지 들어온 것이다.
아깐 경황도 없었고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그들은 검은 정장 차림의 엄청난 덩치들이였다.
인상은 말할 것도 없었고 걷는 폼 하며 깍두기 머리..영락없는 건달들이였다.
"300원 입니다."
앞에서 들려오는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뭐가요?"
"카운터에 내미신 껌요.300원 이라구요."
"아 네.."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고 있는데 편의점에 들어왔던 다섯 덩치들이 나의 바로 뒤에 멈춰선다.
그 순간 나의 신경은 극도로 긴장되어 있다.
조금의 움직임만 포착 되어도 주먹이나 발이 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온갖 신경을 뒤에 집중한채로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고 있는데..
뒤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Written by Lovepool
갈수록 잼있어지내요 담편 기달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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